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뽀득여사 Jul 03. 2024

진주 품은 조가비

나의  <자기서사 이야기 심리치유 글의 마지막 부분 요약>


출렁이는 인생의 바다에서 작지만 단단한 껍질을 굳게 다문 당찬 조가비는 꿈꾸고 있지. 그 어느 날 껍질을 스르르 열고 보여줄 거라고. 기쁨으로 슬픔으로 설레임으로 인내로 품고 품었던 찬란히 빛나는 진주를.’  

 

연 이틀 다. 비라는 이 참 묘해서 내면의 ‘’를 불러내이야하자고 하게 다. 

오래전에 이야심리치유 소논문으로 <자기서사 자기분석>을 쓴 적다. 나의 통전하주 긴 이야기풀어냈었다. 힘든 과정이었지자기서사끝냈을 때, 얼마나 큰 자유함자기치유경험했는지 모른다. 오늘 시 그 긴 이야기를 찬찬히 읽어보았다.

그리 의 <자기서사 이야기> 중 결론 부분에서의 일부만 살짝 꺼내 보려 한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과 같이 써 내려가다’


  눈을 감고 다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 보다, 자신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듯이 처음에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 낼 지 난감했었다. 뭔가 풀어내고 싶은 것은 잔뜩 있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지 어려웠다.

그때 문득 떠오른 음악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었다. 그 어떤 악기의 보조 없이 마치 하얀 백지위에 검정 잉크펜으로 덤덤히 때로는 격랑이 일 듯 써내려가는 편지처럼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은 그렇게 흐른다. ‘그래, 그렇게 써내려 가보자’하는 마음으로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듯이 나는 나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어떤 질문에 답을 할 때는 기쁨과 흥분에 휩싸이고, 어떤 질문에 답을 할 때는 슬픔과 불안에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또 어떤 질문에서는 살짝 발끝이 공중에 붕 떠오른 느낌이 들기도 했다. 사실,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나의 가족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도 되었다. 정말 가까운 몇 사람에게만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던 이야기를 글로 남긴다는 것이 나에게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글로 나의 원가족 이야기를 쓴 것은 처음이었다. 이 부분을 쓸 때가 가장 힘들고, 또 쓰고 나니 뭔가 가슴 한 켠이 확 뚫린 느낌도 들었다.


조각보를 수 놓듯이 한 조각, 한 조각 완성하였는데 이것을 한데 모아놓으니, 마치 한 장의 아름다운 조각보 이부자리처럼 ‘나의 이야기’가 하나로 응집되는 것 같았다.   


  자기분석(모더니즘적 시각, 포스트모더니즘적 시각).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 가면서 처음에는 조각보마다 다른 수를 놓는 듯 하였으나 조각보들을 한데 모아보니 어우러지듯 아름다운 이부자리 한 채를 만든 기분이였다. 나의 과거의 이야기들은 빛바랜 사진첩의 흑백사진이 결코 아니며,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그야말로 하나로 관통되는 통전성을 지닌다는 것을 통찰할 수 있었다. 또한 나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과정에서 가슴이 시원해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듯 하였다. 내게 원가족에 대한 상처는 건드리면 너무 쓰라릴까봐 애써 마음속에 봉인해 왔던 부분이었다.

 자기서사를 쓰면서 사실 처음에는 이 부분을 어찌 다룰까 망설여졌다. 그러나, 단순한 과제가 아니라 진정으로 ‘내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그리고 용기를 내고 솔직하게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그 부분의 이야기를 쓰면서 동시에 읽고 또 읽었다. 마치 실컷 울고 난 기분이랄까. 제임스 힐만이 이야기 했던 ‘Healing Fiction’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에 절대적으로 공감이 되었다. 그리고 단순히 상처만이 아니며, 물론 아프지만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나의 희망의 노래를 찾아내고 또한 부르고 있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이 곧 주인공입니다’라는 광고카피문구처럼 우리 인간은 저마다 각기 다른 영화의 주인공이요, 작가이며, 감독이다. 자신의 신화적 삶을 스토리로 하는 한 편의 영화를 우리 모두는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모더니즘적인 관점에서 나의 이야기를 분석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나는 어떤 나의 개인적인 신화(personal myth)를 쓰고 있는가’였다.


나는 나의 자기서사의 대제목을 ‘진주 품은 조가비’라고 명명하였다.

바다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잔잔하다가도 일렁이다가도 밀려가는 듯 하다가 어느새 되밀려오는 파도를 품은 바다. 여린 듯 무심한 듯 작은 조가비는 그 드넓은 바다에서 꿋꿋히 살아간다. 조가비는 꿈이 있기에 바다가 두렵지 않다. 자신의 몸 가장 깊은 곳에 고귀한 진주를 품고 있기에. 조가비는 어느 날, 기쁨으로 슬픔으로 설레임으로 인내로 품고 품었던 찬란히 빛나는 진주를 보여줄 것이다.


  요 몇 년 사이 나와 남편은 심심치 않게 ‘인생이 무엇일까?’라고 서로에게 묻곤 한다. 아마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탐색을 하려는 욕구가 부쩍 높아진 이 시기. 우리는 중년에 접어드는 것이다. 이야기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중년의 성숙성의 대본’이 내게 특별히 와 닿았다. 그러면서 인생의 의미가 단지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아니라, 나의 삶의 흔적을 만들고 싶은 욕구,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신념 그리고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함이 아닌 내가 이 세상에 어떤 형태로는 좋은 자양분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일렁임을 통찰할 수 있었다. 이제 펼쳐지는 나의 중년 성숙성의 대본은 희망과 꿈의 노래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분석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문제를 외재화’시키기와 ‘다양한 관점과 다각도적인 연관성’ 그리고 ‘재저작-다시쓰기(대안적 이야기)’이다.

 나의 이야기의 포스트모더니즘적 분석은 이러한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에서 나는 어떤 것을 외재화 할 것인가. 나는 위의 ‘아직 해결되지 않은 스트레스’에서 기술했던 ‘좋은 사람 콤플렉스’ ‘불안(마음의 여유를 갖기 어려움)’을 다루고자 한다.   


“관계적인 면에서 긍정적인 메시지는 잘 전달하는데 부정적인 메시지는 타인에게  전달하기 어려워한다. 특히 센터를 운영하는 원장으로서 때로는 직원들에게 또는 학부모들에게 단호하게 어필해야 하는(때로는 쓴 소리를 해야 하는) 부분에 있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다. 갈등상황에 대한 직면을 스트레스 받아 한다.”


“몸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싶은데 좀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오죽하면 나는 보   통 사람들 보다 지나치게 맥박이 빠르다(평소맥박이 110 이상). 가끔은 내 자신   이 물밑에서는 끊임없이 바둥거리며 물길질을 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유유히 수면    을 가르는 백조 같다고 여겨 질 때가 많다. 최근에는 의도적으로 여유를 가지려고   한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스트레스 부분 중에서>


  나는 위의 스트레스들이 이미 어느 순간부터 내 안에 내재화되어 있다고 느껴왔다. 나의 정체성의 한 부분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오히려 스트레스로 와 닿았던 것 같다. 이제 이것들을 내 안에서 분리하고 해체해서 밖으로 꺼내보아야 겠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이야기치료에서 외재화의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이름 만들기’를 해 보자.

나는 ‘좋은 사람 콤플렉스’를 ‘피에로’라고 명명하겠다. 그리고 ‘불안과 여유 없음’을 ‘콩닥이’(빠른 맥박을 비유함)이라고 하겠다.


이제 ‘피에로’와 ‘콩닥이’는 나에게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녔다. 그리고 나는 ‘피에로’와 ‘콩닥이’를 마주하고 있다.


   나는 마주 앉은 ‘피에로’와 ‘콩닥이’에게 대화를 하고 싶다.


  “피에로야. 그동안 힘들었지? 울고 싶어도, 화내고 싶어도, 싫다고 딱 잘라 말하고 싶어도 너는 늘 그렇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 입술에 크고 두껍게 빨간 색을 바르고 사람들이 너의 웃는 커다란 입만을 보길 원했지. 그래야 눈물어린 또는 분노서린 눈빛을 들키지 않으니까.....그래, 피에로야.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물론 맨날 억지 웃음과 춤을 춘거는 아닌 거 알아. 진짜로 기쁘고 즐거운 춤도 추었지. 그때는 어땠니? 그래, 눈도 가슴도 웃었지. 그래 피에로야 이제는 그렇게 하렴. 네가 진정으로 웃고 싶을 때 춤추고 싶을 때 실컷 웃고 춤추렴. 때로 울고 싶거나, 화내고 싶거나, 웅크리고 혼자 있고 싶을 때는 그렇게 하렴. 꼭 그렇게 하렴. 너는 자유로울 권리가 있단다. ”


  “콩닥아, 콩닥아! 큰 숨 한번 천천히 쉬어보렴. 그리고 나를 봐주렴. 그렇게 급하게     보지 말고 찬찬히 나를 보렴. 그래 그래, 고마워. 콩닥아 지친 너의 발을 만져보렴.    너의 빳빳하게 경직된 어깨를 만져보렴.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쓰다듬어 주렴. 느껴지니 콩닥아? 따뜻하게 퍼지는 온기가 너의 가는 손가락 끝까지 전해져오는 것이 느껴지니? 콩닥 콩닥 콩닥... 늘 너는 그렇게 빠르게 뛰고 또 뛰었지. 그런데  콩닥아 그럴 필요 없단다. 이제는 조금 천천히 걸어보렴. 걷다가 쉬고 싶으면 아무 생각 말고 쉬기도 하고 뒤를 돌아보고 싶으면 그렇게 하렴. 아무도 네 옆에서 째깍 째깍 초시계를 재며 재촉하지 않는단다.

콩닥아, 너에게는 여유부릴 충분한 권리가 있단다.”


  나에게서 분리된 독립체인 ‘피에로’와 ‘콩닥이’는 이제 자유함을 얻었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피에로는’ ‘조이(joy)’-진정으로 삶의 기쁨을 느끼고 감사함으로 충만한 삶에서 기쁨의 노래와 춤을 추는 그리고 내 감정에 솔직함-,

 ‘콩닥이’는 ‘피크닉’-살랑이는 바람과 싱그러운 풀향기를 맡을 수 있는 여유로 삶을 즐기며 사는 것-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재저작-다시쓰는 이야기’ 즉, 대안적이야기 쓰기로 나의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지며 곧 나의 인생은 더욱 찬란해진다. 대안적 이야기에서 주요한 기법으로 질문하기가 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을 하며 나의 대안적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다시 쓰는 나의 이야기의 제목은 < ‘행복 하고 싶니? 넌 벌써 행복한 걸’>이다.

 

“나는 나와의 재저작 질문에 대한 답을 하며 나를 새롭게 볼 수 있었다. 관계성에 대해 내가 ‘좋은 관계성’에 속박되고 강박적으로 옭아매져서 피에로 같다고 느껴졌던 관점이 다르게 해석되고 또한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편안하고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싶어 하며 이 삶은 나 혼자가 아닌 함께 하는 삶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억지웃음을 짓는 피에로가 아니라 삶의 기쁨에 감사하고 그 기쁨의 노래와 춤을 내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추고 싶어 하는 ‘조이(joy)’가 내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나는 앞 만보는 눈가리개를 한 단말마 같은 콩닥이가 아니라, 햇살에 빛나는 이슬방울 같은 일상의 소소함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잠시 그 순간을 멈추고 음미할 수 있는 ‘피크닉’이 내 안에 숨 쉬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행복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미 행복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진주를 품은 조가비는 진주를 품고 있다는 걸 알기에 이미 그 삶은 충만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매거진의 이전글  똑.똑.똑.  노크 에티켓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