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광복 80주년을 보내며

-쉬는 날이 편치 않은 이유

by Small Big Coach


방송에서 광복 80주년 행사 타이틀을 보고 80이라는 숫자에 새삼 놀랐다. 왜 놀랐을까? 올해 2025년과 1945년의 차이를 계산해 보면 당연히 나오는 80주년인데, 80이란 숫자 속에 숨은 의미가 무엇일까?


우선 내 기억 속의 광복절은 30주년~40주년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초등학생(국민학생) 때인 70년대에는 매년 8월 15일이 되면 어김없이 광복절 기념행사에 참석하였다. 땡볕에 먼지 나는 학교 운동장에서 면내의 주민들이 마을 단위로 모여 국민의례도 하고 “광복절 노래”도 불렀었다. 광복절 노래는 학생들이 불렀는데 가사에 “이 날은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 구절의 40이라는 숫자가 기억 속에 각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당시 면장 등 지역 유지 분들이 돌아가면서 연단에 올라 "광복절 축사"를 했는데 반복해서 나오는 멘트가 “광복 삼십 몇 주년”이었다. 이 두 가지가 내 기억 속의 광복절을 30~40의 숫자와 강하게 연결시켰던 것이다.


내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광복절 행사는 해마다 진행되었고, 그 형식은 간단한 국민의례 후 마을별로 축구나 배구 토너먼트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축구와 배구 경기를 하다 보면, 운동 잘하는 사람이 동네의 "스타"가 되었고, 덤으로 응원하는 과정에서 마을 주민 간의 단합은 더 단단해졌다. 면민들도 부지불식 간에 서로 얼굴을 익히는 계기가 되었다. 혹시 판정에 문제가 생기면, 원로들이 나서 중재를 했다. 광복절은 다수의 군중이 모여, 마을별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스타가 탄생하는 날이었고, 공동체가 똘똘 뭉치게 해주는 모두의 축제일이었다. 일제 강점기에서는 꿈도 꾸기 어려운 행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진학이나 취업을 위해 도시로 이동하면서 광복절은 참여자도 줄어들었고 참여자도 노령화되어 제대로 진행되기 힘든 행사가 되었다. 도시로 떠나간 젊은이들에게는 모처럼의 “쉬는 날”이 되어갔다. 향우회란 이름으로 도시에서 그 행사가 재현되기도 했으나, 이 또한 노인들의 추억 잔치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 또한 광복 80주년 중 약 40여 년 동안 바쁜 학생과 직장인으로서 “쉬는 광복절”이 되어 버렸다. 그저 쉬는 날로 여겨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40여 년이 내가 80주년이란 숫자를 보고 놀랐던 이유였던 것이다.


“쉬는 날”이 편치 않은 이유


"쉬는 날"로 40여 년의 광복절을 보내는 동안 그래도 기억나는 것은 방송에서 나오는 “특집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은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는데, 광복 이후 해결되어야 할 많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었다. 가령,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만 봐도 그렇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생각해 내는 애국지사들은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안창호, 이시영, 이회영, 김좌진, 김구 등 몇몇 분으로 한정되어 있다. 여전히 제대로 평가나 대우를 받지 못한 애국지사들이 너무나 많다. 최근에 홍범도 장군이 소위 좌익이라는 이유로 흉상이 제거되는 사건이 하나의 예이다. 안타깝게도 살아서도 죽어서도 독립운동에 자발적으로 헌신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 알려지지 않은 애국지사들도 꽤 많은 것 같다. 최근에 자주 등장하는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애국지사들의 스토리와 그 후손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는 프로그램도 그렇다. 우리의 후손들이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친일파들은 일제로부터 받은 토지를 기반으로 자손 대대로 떵떵거리는 경제력을 유지했고, 광복 후 80년이 지나는 동안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는데 "고도화"를 이룬 반면 많은 애국지사의 자손들은 가난을 세습하여 배우지 못하였고, 기회에서 배제되었으며, 그래서 여전히 비참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구체적인 사례이고, 나라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라고 후손에게 가르치고 있는 본보기인 셈이다. 그래서 "쉬는 날" 광복절 특집 프로그램은 우리들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광복절은 그냥 “쉬는 날”이 아니었다.


내가 40여 년의 광복절을 "쉬는 날"로 보내는 동안, 평생 광복절을 쉬지 않고 일하는 날로 여기시고 사시는 분이 계셨다. 나의 장인어른이시다. 장인어른은 친일파 토지 환수나 애국지사 후손들의 부당한 대우 해소를 위해 평생을 사셨다.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한 광복은 여전히 미완의 광복이라 여기신 것이다. 장인어른께 광복은 당신의 아버님(애국지사 이 정열)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자 과제였다. 당신의 아버님은 경기도 용인 출신의 천석꾼으로 평생에 걸쳐 임시정부의 자금을 대시는 역할을 하신 애국지사이셨다. 1919년 3.1 운동 이후 200석, 1921년 270석, 1922년 150석, 1924년 230석, 1929년 잔여 재산 전부를 매각하여 임시정부에 헌납하셨고, 이후 1932~1945년까지 이시영 선생의 지령하에 평안북도에서 광산을 운영하며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를 제공하고, 여기서 나오는 이익금을 임시정부 운영자금으로 매월 송금하거나 직접 찾아가 헌납하셨던 분이다. 아들로서 장인어른의 삶도 역시 당신 아버님의 삶의 궤적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장인어른은 애국지사 후손들의 빼앗긴 재산을 되찾는 일과 많은 애국지사들이 고초를 겪었던 "서대문 형무소"를 아파트로 재개발될 위기에서 구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재탄생시킨 일, 그리고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인 9월 17일로 바꾸는 법안 추진 등에 많은 시간과 돈을 쓰셨다. 어떤 것은 이루어졌으나 어떤 일은 이루지 못하시고 안타깝게 2010년 겨울에 돌아가셨다. 장인어른을 뵐 때마다 항상 이러한 주제가 대화 중에 있었지만, 사실 나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장인어른의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게 죄송할 따름이다.


사진 참고 : 이 정열 님의 훈장 인증서 및 훈장(인명자료는 디지털 용인 문화대전 인용)

이 정열(李 定烈) 일제 강점기의 경기 용인 출신 독립 운동가. 천석꾼의 부자, 지금의 서울대 법학부의 전신인 京城法定專修學院 졸업한 지식인. 3.1 운동에 참여. 임정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강태동 최석천에 토지 200석 팔아 전달, 이후 270석을 팔아 북경의 이회영에게 헌납, 1년간 북경에 머무르며 김좌진, 이세영, 김원봉, 유석현 등과 독립운동 방략 협의, 22년 자금 모금차 서울에 잠입하였으나 경찰에 잡혔으나 곧 석방됨.

22년 150석을 매각 강태동을 통해 임정에 전달하고 24년 230석을 매각 민효식 등과 상해로 가서 이시영에게 헌납함. 김구, 김규식, 김창식, 신익회 등과 군자금 문제를 협의함. 29년에는 잔여 사유재산을 모두 매각하여 이시영에게 헌납했음. 32년~45년까지 이시영의 지령에 따라 국내에 잠입, 평안북도 구성, 삭주에서 광산을 운영하여 그 수익을 전부 임정에 헌납함. 광산은 독립 운동가의 회합장소로 활용함. 45년 2월 김구의 지령으로 국내 밀파 행동대원의 군량 조달 사명을 받고 이를 진행하다가 비밀이 누설되어 진행을 중지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이시영 부통령이 관직에 나올 것을 권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장인어른은 이 모든 활동을 사재를 털어서 진행하셨다. 서대문 형무소를 아파트가 아니라 역사관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관련된 국회의원들을 한 분씩 찾아다니고 후원금을 내가며 역사관으로 보존할 필요성을 피력하고 서명활동 등을 요청하셨는데 이 모든 활동 비용을 사재로 충당하셨던 것이다. 2대에 걸쳐 나라의 독립자금 헌납과 해방 이후 국가를 대신해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들을 사재를 털어 진행하신 것이다. 천석꾼의 집안이 2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헌신하니 내세울 만한 재산도 없는 가난한 집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시아버지와 남편의 생전 활동을 모두 지켜보셨던 장모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셨을까? 노후에 자식들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고, 나아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장모님의 입장에서 그 많은 재산이 사라지고 자식들에게 한 푼도 못주는 상황은 무척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언젠가 응접실에 있는 훈장 증서(사진위)를 보시면서 “저런 훈장 하나 받으려고 그 많은 재산을 다 없애고 자식들한테는 … “ 하시면서 말씀을 흐리셨다. 무슨 말씀으로 위로를 드려야 할까? 조상이 나라를 구했으니 자손들한테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해야 할까?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에 예외가 있어요 해야 할까? 여전히 무어라 위로해 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고, 고민하다가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세상에는 보통 사람이라면 받아들이고 배우며, 가르치면 믿을 만한 가치들이 있다. 이러한 가치는 건전한 종교의 경전이나 널리 읽히는 위인들의 책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가령, 공선사후(公先私後)는 인촌 김성수의 좌우명이었고,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산상수훈(마태오복음 6장 33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내가 보기에는 모두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에 위인과 종교의 경전에 등장하는 경구이다. 그런 어려운 것을 아내의 할아버님과 아버님(장인어른)께서 평생 실천하면서 사셨다. 여담이지만 산상수훈의 말씀은 먼저 하느님을 위해 살면 너희에게 필요한 것(의식주, 천국)은 채워 주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인지 처가 식구 6남매는 어느 하나 치우침이 없이 대체로 중용의 범주안에서 건전하게 살고 있다. 주변을 보면 형제가 많으면 반드시 골치 아프거나 속 썩이는 형제가 한 명씩은 있는데 처갓집은 하나도 없다. 그저 평화롭다. 독립운동을 했지만 3대가 망하지 않았고, 잘 살고 있다.


더구나 아이들에게 물려줄 유산도 있다

물질은 아니지만 두 분의 삶과 그 스토리의 유산이 있다. (외) 할아버지, (외) 증조부의 삶의 스토리는 다른 아이들이 절대로 갖지 못하는 차별화된 가치와 의미를 준다. “엄마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하셨데..”가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우리 부부가 아이들한테 해주었던 이야기였다면, 이제는 어른이 된 (외) 손녀 손자들에게 (외) 증조부나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더 풍성한 가치를 강하게 부여할 것이다.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셨던 외증조부께서 그렇게 많은 재산을 바치면서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그런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글로벌 기업인 S그룹이나 H그룹 창업주는 꿈도 못 꿀 일을 하셨다. 돈의 가치를 뛰어넘는 가치 추구이다. 아무런 사적인 대가도 바라지 않고 쓴 돈이었다. 사재를 털어 과감히 독립을 위해 쓰시는 분이 가진 신념은 한 나라의 자손으로서 큰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나 또한 궁금하다. 과연 어떤 분이셨을까?

이러한 질문과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삶의 정체성을 더 풍성하게 탐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미국의 소설가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가 '뿌리'라는 소설로 자신의 조상의 역사를 추적해 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은 물론 가족의 정체성, 그리고 미국사회의 흑인들의 정체성을 찾아 자신의 삶을 정비하고 개인이나 사회의 미래를 추구해 가듯이 그분들의 삶은 그 자체로 큰 유산인 것이다.


후손으로서 물려받은 유산을 잘 계승하여 세상과 나누어야 한다.

최근 경제 관료 출신 후배한테 전화를 받았다. 관료 생활을 은퇴하고 새로운 기관의 기관장으로 부임했는데 그 기관의 사무실 위치가 남산 주변이었다. 부임 후 남산 여기저기에 있는 많은 애국지사들의 동상이 있음을 알고 정기적으로 동상에 헌화를 하는 봉사 아이디어를 직접 고안하고 조언을 구하는 전화였다. 특히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 있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선한 의도를 그 조직의 모든 사람들이 진정성 있게 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몇 가지 조언을 해 주었다. 지금은 SNS 등 활동까지 확대하고자 이시영 선생의 후손들을 찾아 인터뷰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장인어른이 살아계셨으면 기뻐하실 일이라 생각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적어도 후배가 일하는 조직의 많은 직원들은 이시영 선생에 대한 업적을 좀 더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애국지사나 나라에 대한 애정이 더욱 깊어지리라 생각된다. 어떤 계기가 후배에게 이런 생각을 갖게 했을까? 술자리에서 친일성향의 정부 얘기를 하다가 아내의 할아버지 얘기(자랑)까지 한 것 같다. 이시영 선생을 도와서 전재산을 헌납했다는 간단한 이야기였으나 그때의 얘기를 가볍게 듣지 않고 이를 자기의 권한과 방식으로 실천해 주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좋은 일, 진실, 의로운 일은 항상 호소력이 있다. 그 호소력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많은 사람이 움직이니 세상이 움직인다. 세상이 의롭게 변하는 것이다. 의로운 일에 아낌없이 사재를 쓰신 두 분의 이야기는 3대를 넘어 계속되어야 한다. 의로운 삶의 관점에서 광복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쉬지 않고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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