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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건 Aug 30. 2024

느낌

좋은 느낌이란

느낌



좋아하는 광고가 있다. 고등학생 때, 영화관에서 처음 본 광고였다. 삼양라면을 홍보하는 44초짜리 짧은 영상이었는데, 가수 장기하씨가 내레이션을 읊으며 시작한다. “그런 느낌 드는 날 있지 않어? ”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영상은 “오늘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든다거나”라는 문장으로 끝이 난다. 그날은 그런 날이었다. 이 광고가 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이 되는, 그런 느낌.



“비비탄 총 사격 1500원~!!!”

“잘생긴 메이드 총각이 말아주는 아이스 커피 2천원~~~!!!”


대학교에서 1년 중 가장 설렘이 가득한, 청춘의 냄새가 나는 시기이다. 그저께부터 오늘까지 3일동안 학교는 대동제를 열었고, 각각의 청춘들은 천원이라도 더 팔아보려고(더 팔아 적자를 면하고자) 혈안이 돼있다. 커다란 홍보지를 들고 돌아다니는가 하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난 것인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형, 누나 하면서 자기 과에서 만든 팬케이크를 먹여준다. 세 번째 맞이하는 축제이지만, 역시나 설레는 건 새내기나 나나 마찬가지.


“야! 강윤!! 윤아~!! 여기야 여기!!”

크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자, 동기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군대 가기 전까지만 해도 빼빼 말랐는데 어느샌가 근육맨이 되어버린 용환이, 나근나근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뼈 때리는 말을 해주는 남헌이, 항상 툴툴거리지만 막상 제일 먼저 나서는 정이 형, 지방에서 올라와 사투리가 매력적인 상여자 다빈이와 엄청난 친화력으로 캠퍼스를 같이 걸어 다니면 인사하느라 바쁜 마당발 예원이까지, 다섯명이서 하나같이 한손에는 맥주를 들고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같이 공연을 보기로 며칠전에 약속을 했건만, 나만 늦은 모양이다.

“미안 미안~ 차가 너무 막혀서, 자리는 아직 있겠지?”

“어. 괜찮아. 지금 빨리 걸어가면 있겠지”

무뚝뚝하게 용환이가 말한다.

“윤아, 쪄 죽는 줄 알았다. ”

정이 형이 한마디 거들고,

“얘들아! 빨리 가자! 자리 얼마 없대!”

그 사이 아는 사람한테 연락한 예원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재빠르게 옆 부스에서 맥주를 산 나를 포함한 6명은 맥주를 안 흘리도록 조심히 뒤뚱뒤뚱 공연장으로 걸어갔다. 공연장에 거의 다 와가니, 길이 북적였다. 드레스코드가 파랑색이어서 그런가, 학생들이 앞으로 걸어갈 때마다 파도가 학교를 휩쓰는 것처럼 보인다. 인산인해라는 말이 눈에 보이면 이런 광경일까.  푸르른 하늘과 어울려 종종 보이는 빨간색 모자를 제외하면 어디가 하늘이고 땅인지 구분이 안 갔다.


공연장은 가운데 스탠딩석과 양 옆 스탠드에 앉아서 볼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새내기들과 어울려 뛰어놀 자신이 없는 복학생 4명과 졸업반 2명은 스탠드에서 최대한 무대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 우리 이렇게 6명이서 축제 보는 거 몇 년 만이야~!!”

복학하고 첫 축제여서 그럴까 용환이가 설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 축제가 다 거기서 거기지. 우린 너희 아니었으면, 학교 오지도 않았어”

다빈이가 핀잔 주듯 얘기했다. 그러자 용찬이는 너무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맥주를 감싸안으며

“축제는 최고야. 듣지마. 넌 최고야, 축제” 라고 중얼거렸다. 그 덩치에 그러고 있으니 새내기때 용환이랑 겹쳐 보이며 웃음이 나왔다.


“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

우렁찬 목소리로 이목을 끌며 무대에 등장한 남자는 사회자였다. 선글라스를 끼고,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그 남자는 애매한 인지도의 초대 가수들이 무대에서 공연을 하기 전까지, 먼저 학생들의 무대가 있다고 순서를 소개하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 듣자 하니 힙합동아리. 댄스동아리, 사물놀이 동아리, 밴드 동아리, 보람가요제 등 아직 가수들의 노래를 듣기까지는 꽤나 많은 공연이 남아있었다.


“아직 덴져러스 공연하려면 2시간은 더 기다려야겠네..”

오늘 축제에서 공연하는 덴져러스라는 그룹의 광팬인 예원이가 맥주를 들이켜며 말했다.

“난 덴져러스 말고 왓투비가 더 기대되던데.. 엄청 이쁘더라”

가수들 공부를 중간고사 보다 더 열심히 한 정이형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어!! 진짜????? ” 가방에서 과자랑 물을 꺼내던 용환이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돌렸다. 항상 저렇게 눈이 반짝이면 플래쉬는 군대에서 필요 없었겠다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반짝였다. 오랜만에 만난 6인방이 시답잖은 얘기를 하는 동안, 공연은 빠르게 지나갔다.


“자!! 이제 대망의 코너이죠! 보람가요제 입니다~~!!! 모두들 참여하는 학생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학생들이 직접 축제 전에 신청을 하고, 무대에 서는 매년 진행하는 보람가요제이다. 1등하면 상품금액도 꽤 큰 터라 참여자도 많고, 몇십 년째 진행되고 있는 보람대학교의 전통이라고 부를만한 유일한 행사였다. 신청을 받으면 윤이처럼 노래를 못 부르는 어중이떠중이들도 무대에 오르는 거 아니냐며 궁금해하는 남헌이었지만, 예선으로 한번 거른다는 소리를 듣고는 만족한 양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대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는 저런 무대에서 한번 쯤 오르는 상상을 했었다.

임재범의 ‘이밤이지나면’ 이나 김동률의 ‘취중진담’ 같은 노래로 여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런 꿈을 꿔보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노래를 잘 부르지도 못 할더러, 잘 부른다 해도 몇 천명 정도 되는 관중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건 성격상, 태생상 무리였다. 그래서 저런 무대에 오르는 학생들이 멋있고, 부럽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명의 학생들의 귀엽고 싱거운 발라드 몇 곡이 끝나고, 어느새 마지막 참가자였다. “철학과 23학번 이설~~~학생입니다. 모두 박수로 맞아주세요~!!” 앞에 참가자들은 전부 27, 26 학번이었는데, 나와 같은 학번이라는 소리에 궁금증이 일었다. 잔잔한 전주와 함께, 부드러운 목소리가 공연장을 뒤덮었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않았네 ”

 이상은의 ‘언젠가는’ 이였다. 첫 소절은 내 마음을 힘껏 때리듯 지나갔고, 두 번째 소절은 내게 확신을 주었다. 그 확신이 축제의 분위기가 주는 그런 느낌이었던 건지, 실제로 그랬던 건지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날은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날 이였다.

“야, 예원아. 조예원!! 너 저 친구 알아? 이설?”

학교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예원이를 믿었기에 나는 다급하게 예원이를 불렀고, 예원이는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설이? 알아! 나 같은 동아리 했던 친구랑 기숙사 룸메이트였어. 인사도 몇 번 했을걸.. 아마 지금도 걔랑 룸메이트일걸??”

“….” (설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친구의 목소리에 홀린 듯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예원이가 몇 번 불러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

“야… 윤아, 근데 왜??”

“왜긴 왜야 딱 저 눈 봐라 반했네” 다빈이가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대신 답해주었다.

“와 윤아 너, 금사빠였어?? 처음 알았네~~~~ ” “그러게~ 윤이도 무대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니야?”

정이형과 용환이가 짓궂게 웃으면서 놀렸다.

 “예원아, 저분 남자친구 있는지는 모르지?”

자신 없게 끄덕이는 예원이와 이 자식 진심인 건가 하면서 쳐다보는 네 쌍의 눈을 뒤로하고 나는 무대 뒤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노랫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고, 내 심장 소리는 그 소리를 덮을 정도로 컸다.


“이야~!~~~ 가수급 무대였습니다, 이설학생~ ”

“자 그럼~ 전광판에 보이는 큐알코드로 투표를 진행해주세요~~!!”

고등학교 때 계주 말고 이렇게 열심히 뛰어본 적이 있었던가. 속으로 생각하며 파도를 뚫고 힘겹게 뛰어갔다. 스탠딩석 맨 앞에 도착했을 때, 선글라스 쓴 하와이안 셔츠의 남자가 크게 외쳤다.

“자 대망의 1등은~~ 축하합니다. 철학과의 이상은, 이설 학생입니다~~~!” 그녀는 수줍은 듯 웃으며, 상품권을 받고, 무대 뒤편으로 내려갔다.


마음이 급해졌다. 나도 그녀를 따라 무대 뒤편으로 가려고 했지만, 벌써 가수들이 대기 중인지라 경호원인지 학생회인지 모를 시커먼 양반들이 막아섰다. 이대로 끝인 걸까. 그런 느낌이 드는 찰나, 정말 혹시 모르니 기숙사로 가는 길로 한번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인연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그녀와 나의 이야기이기를 간절히 빌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설이를 만나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는 않을까, 그전에 남자 친구는 있을까. 괜한 짓을 하는 것 아닐까.

파란색으로 무장한 학생들의 무리를 비집으며 뛰어가는 내 머릿속은 만날지도 확실하지 않은 그녀에 대한 걱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득 차 있었다. 분명히.

그런데 저기 앞에 걸어가는 그녀를 눈에 담은 순간, 사라졌다. 걱정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상이 서서히 옅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에는 설이와 나, 분명히 둘만 존재하고 있었다.



“저기… ”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채로 말을 걸자, 설이는 의문이 서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네? 하며 되묻는 그녀 앞에서 모든 용기를 다 잃어버린 듯 했다. 얼굴은 빨개지고, 근육들이 제멋대로 움직여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혹시.. 남자 친구 있으세요?”

내 인생에서 단 한번밖에 없을 특별한 순간의 시작은 어디 아침드라마에서 나올 듯한 평범한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 설이를 바라보는데, 얼굴이 설레발 치듯 웃음을 짓는 게 느껴졌다. 누가 보면 데이트 신청을 받아준 것처럼 보일만큼 웃음이 새어나왔다.

“저. 이상한 사람 진짜 아니고요. 아까 공연을 너무 멋지게 봐서요. 혹시 저랑 옆 부스에서 맥ㅈ…아니, 아니 커피, 한잔하실래요..? ”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횡설수설 변명하듯이 하는 말에 설이는 웃음지었다.


“좋아요. 근데 커피는 밤에 잠을 못 잘 거 같아서.”

“아 그럼, 주스 같은 거 사올게요”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하려던 찰나 설이가 말했다.

“커피 말고 맥주 한잔 하죠?”


당황스러웠고, 기뻤고,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나 갈등이 있었지만, 순식간이었다. 나랑 설이는 맥주를 한 캔씩 들고, 골뱅이 소면을 파는 생명공학과 부스로 들어갔다.


“아.. 제 이름도 아직 모르시죠? 저는 23.학버…”

“알아! 윤이 맞지? 강윤”

그녀가 맥주 한잔하자는 것보다 더 당황스러움이 몰려왔다. 혹시나 용찬이나 정이형이 명찰을 나 몰래 옷에 달아놓았나 살폈지만, 딱히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티가 많이 났을까, 설이는 웃으면서 내게 대답을 해주었다.

“강윤, 문헌정보학과, 입학년도에 너랑 교양 하나 같이 들었었어. ” “세계종교와문화, 기억나?”

당연히 수업을 들은 기억은 났지만, 내 기억 속에 그녀는 없었다.

 “너 발표했잖아. 그게 기억에 남더라”

발표를 하면 점수를 더 준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새내기의 패기였는지, 즉석에서 발표를 했던 수업이었다. 그 후로 내가 발표를 꺼리게 된 계기기도 하였다.

“어… 그랬나요..? ”


내 이름을 알고 있었던 그녀와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설이는 자신 있게 발표하겠다고 한 같은 신입생인 나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발표를 시작하자 자신 있던 모습과는 다르게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를 보며, 웃겼다고 말하였다. 키도 크고 자신감 넘쳤던 남자는 자신과 똑 같은 신입생이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고 했다. 그 후로 설이도 발표를 두 번 정도 했다고 했지만, 출튀하고 간에 알코올을 충전하러 가는 게 수업이었던 나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신기했다. 인연이란 게 이런 걸까 하고 생각이 드는 찰나 말을 놓는 거 어떠냐는 설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건배를 후, 대화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노래로 이어졌다. ‘언젠가는’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 중 하나라는 말에  놀란 듯 그녀의 두 눈은 동그랗게 변했다. 물방울도 아니고 저렇게 눈이 자유롭게 변할 수 있나. 하며 신기함을 느꼈고, 용환이의 반짝거림은 빛이 바랜 은박지처럼 느껴질 만큼 반짝거리는 눈을 갖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90년대 노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내가 옛날 노래를 즐겨 듣는다고 말하자, 설이는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하냐고 되물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음치임을 깨달았기에 부르는 것보단 듣는 것을 선호한다고 답해주었다. 부르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남고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면 ‘고속도로 로망스’ 로 흥을 띄우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었으니까. 다만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내가 부르기에는 스스로 만족을 못 한다고 할까? 음치의 한이다.

설이는 내 얘기를 듣더니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언젠가는’ 이 아니라고 말했다. 자신 있는 노래일 뿐이라고.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따로 있다고 말하였다.

좋아함은 관심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나는 설이에게 관심이 있었고, 그녀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주워 담고 싶었다. 용기를 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뭐야?”  “비--밀” 이라고 말하며 혀를 쏙 빼고 씩 웃는 설이는 귀여웠다. 앞으로 어떤 고난도 그녀의 웃는 모습을 지우고 싶지 않아, 피해갈만큼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어떤 힘든 일이 그녀에게 닥쳐서 이 웃음을 빼앗는다고 생각하면, 열불이 날정도로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맥주를 다 비우자, 설이가 일어나며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알려주겠다고 하며 내 손을 이끌었다.


따뜻하고, 작고 하얀 손이었다. 문득 손에 땀이 났다는 것을 깨달은 내가 뒤늦게나마 손을 빼려고 했지만, 설이의 손은 거절하듯 더욱 세게 내 손을 움켜쥐었다.

내 심장 소리가 설이에게 들리는 거 아닐까. 혼자 중얼거렸다.

설이를 뒤따라가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보라색이었다. 어느덧 해는 지고 있었고, 공연은 한창이었다. 환호성 소리와 음악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그 소리가 마치 전쟁을 치르러 떠나는 나에게 무사 귀환을 바라는 소리 같았다. 몇천 명의 배웅 인사를 뒤로하고 그녀의 손을 잡고 도착한 곳은 학교 바로 앞 코인 노래방이었다.  “빨리 들어가자” 재촉하는 설이를 보고, 나는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다.

“나 노래 진짜 못 불러..”

고라니 울음소리 같은 내 노래를 듣고, 좋았던 분위기를 혹여나 망칠까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상관없어~ 뛰었더니 쪄 죽겠다. 빨리 들어가자”

땀으로 젖은 축축한 내 등을 떠밀며 그녀가 말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설이는 천 원짜리 3장을 지갑에서 꺼내서 기계에 집어넣었다. 6곡이 준비되었고, 주변은 조용했다. “자, 윤아 너 먼저 불러봐. ” 설이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알려주겠다고 온 코인 노래방인데도 당당하게 제일 마지막에 들려주겠다고 선언하더니, 나에게 먼저 노래를 시켰다.


나는 내 밑바닥을 보여주지 않은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 부르는 노래가 정해져 있다. 높지 않고, 가사도 쉽고, 적당히 신나는. 하림의 ‘사랑이 다른사랑으로잊혀지네’, 박명수의 ‘바보에게바보가’, 김동률의 ‘다시사랑한다말할까’ 이 세 개 정도가 내가 그나마 자신 있는 노래였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 곡을 부르리라 다짐했고, 하림의 노래부터 불렀다. 익숙한 멜로디가 기계에서 흘러나왔다. 옛사랑에게 묵묵하게 던지는 것 같은 이 노래는 내가 새내기 시절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이별 노래를 검색하다가 찾은 노래이다. 그 후로 노래방에서 이 노래는 강윤 18번으로 불리게 되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실수하지 않기를 바라며 노래를 불렀다. 부르면서 옆을 슬쩍 보자, 설이는 내 노래에 집중한 듯 보였다. 기뻤다. 노래를 마치자 설이는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


“야. 윤아 잘 부르네, 왜 밑밥 깔아~~!! ”

 이게 뭐라고 긴장을 했던 걸까, 긴장이 풀리고 멋쩍어서 나도 실없이 웃었다. 마이크를 설이가 가져갔다. 아까 내가 들었던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멀리서 거리를 두고 듣는 것과 바로 옆에서 듣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그녀가 뱉은 가사 하나하나가 방안을 점점 채우기 시작했다. 특별한 기교 없이 담백하게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온몸을 단단히 묶인 듯하였다.

노래가 끝나자 설이도 마찬가지로 멋쩍은 듯 웃었고, 나는 노래를 이어갔다. 두번째 곡으로는 ‘바보에게바보가’를 불렀고, 설이는 윤종신의 ‘환생’을 불렀다. 역시나 잘 불렀고, 나는 감탄했다. 마지막 곡을 내가 다 부르자, 설이는 엄숙한 표정으로 리모컨을 누르기 시작했다.

‘ㄱ.’

‘고.‘

‘곻.’

‘고해.’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임재범의 고해였다. 나도 종종 듣는 노래였기에 설이의 목소리로 부르는 고해가 상상이 안 갔다. 절규하는 듯한 그 감정은 ‘언젠가는’ 과는 확연히 다른 노래였다. 노래가 시작되고, 나도 모르게 조용히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 설이의 그 노래는 글로 표현할 수 없다. 아니 내 글솜씨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가 옳은 표현이겠다. 이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까까지 불렀던 노래들은 가사를 뱉는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씹어서 삼키는 느낌이었다. 노래가 다 끝나자 나는 머금었던 숨을 토해냈고, 설이는 조용히 웃었다.

“갈까?” 내가 일어나며 설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웃으며 그녀는 내 손을 잡았고, 노래방을 나섰다. 해는 저물었고, 밖은 가로등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땠어, 내 노래?”

 반짝이는 두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물어봤다.

“좋은 느낌이었어.  너가 얼마나 이 노래를 좋아하는지 알 거 같아 ”

“좋으면 좋은 거지 좋은 느낌은 뭐람~” 좋은 느낌이라는 게 이해가 안된다는 듯이 조그맣게 툴툴거린다.


 좋다 와 좋은 느낌. 비슷하지만 다른 두 단어이다.

좋은 느낌은 항상 다르다. 100퍼센트 똑같은 좋은 느낌은 없다. 한번 느낀 좋은 느낌을 다시 느끼기란 쉽지 않다. 어떤 때는 조금 씁쓸한 좋은 느낌이라면, 또 어떤 때는 수박을 한 입 가득 베어 문 것만 같은 풍만한 좋은 느낌일 때도 있다. 설이의 노래는 어둑해진 밤하늘을 헤엄치는 구름을 케이크로 만들어서 한입에 욱여넣은 것 같은, 그런 달콤한 좋은 느낌이었다.


끝. 202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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