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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위트

by 박진영


유머가 있는 사람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감정을 해소해 주기 때문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긴장되거나 슬픈 상황, 절망적인 상황에서 누군가가 농담을 던진다. 물론 유머라는 건 고도의 지적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서 적절한 상황판단 능력과 창의력, 순발력이 있지 않으면 대체로 눈살을 받거나 비난을 받기도 한다. 눈치도 없고 부적절하며 경우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 인간관계에 조금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적절한 농담이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위트였을 때 그건 사람들의 감정을 해소해 준다. 그 원리를 설명하려면 깊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은데, 긴 설명이 들어가면 재미가 없으니까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설명이 필요한 위트는 위트가 아니기도 하다.


또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어떤 유머를 받아들이려면 그 유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이나 교양이 필요할 때가 있고, 더 나아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건강한 내면도 필요하다. 어떤 농담은 너무 고도의 것이라 이해할 수 없고, 또 어떤 농담은 내가 받아들이기에 내가 너무 약하거나 지쳐있는 상태일 때도 있다.


그러니까 농담은 어려운 것이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바탕을 알고 있어야 하며 그 사람이 지금 이 농담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인지도 알아야 하고, 너무 어렵지도, 그렇다고 너무 상스럽지도 않게, 모든 것이 적절한 상태에서 던져지는 언어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 구석도 있다. 예를 들면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이 있다.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 부담감을 느낄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내가 그 슬픔을 부담스러워할 수 있냐고 말하는 선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선한 사람조차 그 사람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어떤 말이 적절한지, 내가 어떻게 대해줘야 하는지는 고민할 것이다. 그런데 슬픔에 빠져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본인의 상황을 이용해서 농담을 한다.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던 사람 입장에서는 그 사람의 농담을 통해 가졌던 부담, 마음의 무게를 덜어놓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경제적인 쾌감을 준다. 내가 생각한 건 아니고, 누가 그런 말을 했다. 누가 했는지는 기억이 잘나지 않는다.


반대로 슬픔에 빠진 사람이, 슬픔에 빠진 채로 주변 사람들에게 계속 부담감을 준다고 가정해 보자. 처음에는 그 사람을 위로하려 하고, 또 공감하려 하고, 곁에 있어주려 하겠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다. 한 달이고 반년이고, 일 년이고, 그 사람이 그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상황에 계속 머무르려 하고, 나아가 자신의 그러한 상태에 있으니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에게 위로를 바라고 공감을 바라는 것이 지속되면 사람들은 떠난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체로 그렇다. 슬퍼하는 사람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감정을 소모한다. 위로의 말에도 한계가 있고 공감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로감이 계속 쌓이게 되면 그 사람을 떠난다. 가족이라고 다를 건 없다. 물론 가족이니까 떠나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사람 또한 계속해서 감정을 소모하면서, 피로감을 느끼면서, 어쩌면 함께 계속 썩어 문들어져가면서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다. 이건 내 생각이다.


그러니까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바라봤던 그 그림 속 문장은 어느 정도 인간 사회를 꿰뚫는 부분이 있다. 나는 가끔 그 문장을 생각한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웃어라, 모두가 함께 웃을 것이다.'

나는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 모습을 자주 보았다. 또 너무 오래 슬퍼하는 사람이 피곤해서 사람들이 떠나는 모습도 자주 보았다.


농담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의식적으로나마 그 상황을 밟고 일어설 수 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이건 그냥 내 생각. 그렇게 위트로 삶을 견디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신 승리일 수도 있겠다. 자기 최면일 수도 있겠다. 잠시 잠깐 그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농담은 중요하다. 농담은 그 자체로 어떤 주문이고, 궐기이며, 도전이고, 환기이기도 하고, 피안이기도 하다. 위트는 익살이면서 해학이고, 기지다. 익살과 해학은 저항이기도 하고, 기지는 그 글자 자체로 지혜다. 대상은 세상이기도 하고, 자신의 삶 자체이기도 하다. 위트는 통통 튄다. 튀면서 반짝인다. 반짝이면서 날카롭고, 날카로우면서도 시원하다. 시원하면서도 따듯하다.


문장이 좀 거친 것 같은데 멈추거나 정리하지 않고 주욱 써 내려가는 글이라서 그렇다. 이렇게 갈겨놓은 글을 나중에 손볼 일이 생길까, 싶기도 하지만 이렇게 써놓고 나면 소설의 어느 장면이, 어느 대사가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건, 이제 곧 끝날 이번 겨울에 어떤 사람과 통화하다가 들은 이야기 때문에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이다. 나에겐 이런 파편들이 많은데, 적지 않으면 날아간다. 불현듯 떠오를 때도 있지만, 그 또한 적고 있을 때 나타난다. 이건 그냥 잡문장.


다시 돌아와서, 내가 요즘 다이어트 중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아, 아니다, 다시 조금 전으로 돌아가서.

내겐 학부 시절부터 꾸준히 다니던 단골 카페가 있다. 나는 사람에 대해 궁금해하긴 해도, 잘 묻지 않고,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추는 경향이 있어서 직접 말해주지 않으면 그 사람의 사적인 것까지 알 기회는 없다. 궁금해도 묻지 않는다. 묻는 게 실례라는 생각도 있지만, 굳이,라는 생각도 있고, 말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카페 사장님은 오랜 기간 투석을 하고 있다. 무슨 일로 신장이 망가졌는지, 그런 병이 있으면 뭐가 불편하고 위험한지는 직접 물어보지 않았다. 검색해서 정보를 찾아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조차 실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런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을만한 이유가 내게는 없었다. 그러다 불현듯 한 마디씩 듣는다. 이를테면 팔에 어느 부위가 크게 부푼 것은, 그 부위를 통해서 계속해서 투석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 투석을 너무 오래 하다 보니 심장이 비대해져서 얼마 못 버틸 수도 있다는 것. 신장 이식에 대한 생각도 있지만 적절한 기증자가 없다는 것...


평범한, 건강한, 아니 평범하고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듣기에는 다소 두렵고, 또 마음이 무거워지는 말들이다. 우리는 대체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병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는 내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나 내 주변사람이 죽었을 때다. 병도 그렇다. 내가 병에 걸리기 전에는, 내가 아프기 전에는 어떤 병이나 아픔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틀린 게 아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그 모든 위험요소와 불안요소를 모두 생각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 모든 걸 생각하고 살아가는 건 불안장애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삶 안에서 잊고 있었던, 와닿지 않았던 죽음이나 병을 생각하게 하는 사건들은 비극인 것이 아닐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이, 인간의 삶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맞닥뜨리게 하고, 또 그곳으로 끌어내리는, 추락하게 만드는 일이니까. 물론 그게 추락인지 상승인지는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게는 그런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내가 다이어트를 한다고 했더니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나는 투석하고 나올 때마다 몸무게가 5kg씩은 줄어든다.' 그리고 웃으면서, 그 웃음은 쓴웃음도 비웃음도 아니라 굉장히 일상적인 웃음이었는데(그래서 더 놀라운) 그렇게 웃으면서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다. '너도 다이어트하지 말고 투석이나 해.'


나는 할 말을 잃었지만, 그 친구는 웃고 있었다. 그건 본인 삶의 저변에 깔려있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그것은 농담이 되었다. 그러다 문득 그 친구가 처한 모든 상황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데, '어떻게 웃을 수 있지?',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아무렇지 않지 않을 것이다. 당연하다. 그 웃음이 쉬운 웃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웃음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이다. 그 웃음이 있기 때문에 발 밑에 깔려있는, 어쩌면 목 끝까지 차오르는 어떤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추측이고 내 생각이다. 나는 그 사람의 삶에 대해 알 수 없다. 다만 그 웃음이 그 사람이 가진 것 중에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그것이었다. 감히 상상할 수 없으면서도, 상상했을 때 놀라운 어떤 것.

인생 전체를 비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은 웃으며 살고 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엔 많을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에게선 쉽게 슬픔을 볼 수 있지만, 그렇게 웃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쉽게 슬픔을 찾을 수 없다. 모르겠다. 위로를 받는 쪽이 좋은지, 스스로가 이미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쪽이 좋은지.


오늘은 여기까지만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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