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설에서 부족한 것, 내 소설에 필요한 건 사실 긴장감이다. 이야기에 긴장감이 없어진 지 좀 되었다. 가독성, 그러니까 읽게 하는 것에는 여러 방식, 전략이 있고 사람들이 이야기를 읽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은 긴장감, 으로 뭉뚱 그러져서 표현되기도 한다. 적어도 소설을 쓰는 내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와중에 이야기에 긴장감이 생기는 건 여러 요소가 있다. 내가 아는 바, 지금 생각하는 바로는 사건의 심각성, 인물들 간의 갈등에서 오는 긴장감이 있고, 소설에서 밝혀지지 않은 어떤 정보에서 생기는 호기심, 궁금증에서 오는 긴장감이 있으며, 소설의 분위기에서 오는 심리적인 긴장감 같은 것들도 있다. 문장 자체가 재미있어서, 소설이 그리고 있는 이미지 자체가 좋아서 계속 읽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작가가 뛰어난 문장가이거나, 반짝이는 감수성이 있을 때의 문제다. 그리고 그 조차도 일반 독자들에게는 잘 읽히지 않고, 선호되지 않는다. 가끔 고급독자와 일반독자를 나누는 게 어딘가 어색하고 부끄러울 때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두 부류는 나뉜다. 어려운 것을 기꺼이 읽으려 하고 읽을 수 있으며, 거기에서 재미를 느끼는 독자가 있고, 어려운 것은 읽지 않으려 하고 거기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독자들도 존재한다. 둘 다 취향과 선호의 문제가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어려운 것을 읽으려 하지 않고, 쉽게 이해를 포기하는 부류를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한다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사람의 본성인가, 삶이 갖는 어쩔 수 없는 어떤 인력과 척력인가, 하면 또 그런 것 같기도 해서 함부로 말을 못 하겠다. 그러니까 누구나 긴장감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조금 복잡하거나 어려운 이야기는 싫어한다는 것이다. 앞서 유머가 사람의 감정에 있어 경제적인 쾌감을 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유머를 좋아한다고 한다면, 비슷한 이유로 어려운 이야기, 깊은 이야기를 싫어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또 이끌리는 이야기의 속성에는 내가 싫어하는 속성들도 있다. 소설 자체에서 그러한 속성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긴장감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읽는 사람을 계속 궁금하게 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가슴 뛰게 하는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잘 감춰진 신파라면 신파 또한 기꺼이 소비한다. 하지만 그게 소설이나 영화를 대하는 자세가 아니라, 이야기를 대하는 자세라고 좀 더 넓혀 봤을 때, 내가 싫어하는 군중의 속성이 거기에 있기도 하다. 긴장감 있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인다. 어렵지 않고,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어떠한 것들을 사람들은 좋아한다. 복잡하지 않고 간편하며, 자신의 지루함을 달래줄 수 있는 이야기.
결국엔 지루함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긴장감을 선호하는 게 아니라, 긴장감을 차라리 선호할 정도로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구렁텅이에 넣어가면서까지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안다. 어떤 것들은 너무 위험해서 차마 시도하지 못하지만, 어떤 것들은 가볍게 시도해 볼 수 있다. 그게 스포츠일 수도 있고, 게임일 수도 있고, 투자일 수도 있다. 좀 더 위험해지면 도박이나 투기, 음주, 더 위험해지면 불륜이나 범죄, 전쟁, 살인 같은 것들이다.
불행에 몸서리치면서도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비관하면서, 살아간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런 부류가 있다. 그렇다고 밖에 말할 수 없고, 그렇게 밖에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재앙인지도 모른 채, 삶을 비관하지만, 그 비관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그 누구보다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좀 더 어렸을 때에는 그런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으며 불쌍한 사람이구나, 하며 그 이야기에 함께 슬퍼하기도 하고 감동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다. 그래서 그 불행이 하늘에서 떨어진 불행인지, 아니면 스스로 불러온 불행인지 속으로 되묻다가 그 사람을 멀리한다.
자기 자신을 너무 감추는 것도 좋지 않지만, 자기 자신을 너무 드러내는 사람은 오히려 꺼려진다. 그 이야기를 타인에게 함으로써 무엇을 얻고 싶은 것인지 자연스레 물었을 때, 긍정적인 대답이 내 안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나 자신이 감수성이 부족해서, 인색한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눈에는 공통적으로 자기 자신을 연민하는, 그래서 자기 자신을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여기는 그런 이상한 시선이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런 이야기를 만든다. 자신의 삶을 그런 쪽으로 이끌어간다.
드라마는, 비극은, 소설은 어쩌면 그런 것들의 대리만족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이 그런 것이 되기를 바라지만, 어떤 사람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 이야기들을 모은다. 나 또한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 안에는 자기검열하는 나 또한 있는데, 그런 이야기들을 듣지 않으려 하고 피하려고 한다. 궁금해하려 하지 않고 묻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소설을 쓰고 싶어 한다. 아직까지 왜 이러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나는 써야 하고, 써야 한다면 그런 이야기의 속성을 받아들여야 할 텐데, 겉으로는 그런 속성을 기피하고, 때로는 혐오까지 하면서도 나는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읽어주길 바라며 소설을 연습하고 있다.
최근에 깨달았지만,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속성을 이용해야만 제대로 된 소설을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의 본질이 뭔지 감히 말할 수는 없겠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그런 긴장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득 또다시 드는 생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이야기는 필요하다.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사람들은 소비하면서도 어쩌면 좋은 이야기, 웰빙의 어떤 것을 마음속으로는 바라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건 내 바람일 지도 모르지만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없이 가벼워지다 보면 어느 순간 적절한 무게와 깊이를 가지고 싶어지는 것처럼.
어렵지만 지루한 삶 안에서 위트를 잃지 않으면서, 적절히 긴장하면서, 무언가를 찾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