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이는 삼십육 개월 꽉 찬 삼 년 생일을 맞은 손녀다. 그 손녀에게는 부캐 몇 개가 있다. 부캐란 '부 캐릭터의'의 줄임말이며 '실존 인물이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 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게 되어 주로 연예인들 사이에서 많이 쓰인다.
첫 번째는 여우 엄마다.
여우는 송이의 애착 인형이다. 여우 엄마가 될 때는 여우 아가에게 우유도 주고 밥도 차려준다. 송이에게 밥을 주기 위해서는 몇 배로 바쁘다. 여우 아가 밥도 식판에 송이와 똑같은 음식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달걀을 주기 위해 스크램블을 하면 꼭 두 개를 해야 한다. 한 개를 해서 나눠 주려 하면 절대 속지 않는다. 여우 아가 것도 한 개를 해서 줘야 한단다. 기저귀도 갈아주고 옷도 갈아입힌다.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새 기저귀를 응가했다며 휴지통에 버린다. 한번은 기저귀를 휴지통에서 꺼내다 송이에게 들켰다. 응가 싼 것은 더러워서 만지는 것이 아니라며 기저귀를 왜 꺼내느냐고 어른 같이 잔소리한다. 옷도 외출용과 잠자는 옷이 다르다. 외출할 때는 양말도 신기고 신발도 챙긴다. 놀이터에 데리고 가서 그네와 미끄럼틀, 시소까지 태우며 놀이터 일주를 한다. 때로는 여우 아가가 다쳤다며 밴드도 정성껏 붙여주면서 안쓰러워하는 표정이 일품이다. 어린이집에 가서도 선생님께 자기를 여우 엄마라고 불러 달라고 했단다. 친구들과 친구 엄마들에게도 자기는 여우 엄마라고 한다. 친구들은 무슨 말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름을 부른다. 송이는 자기를 여우 엄마로 불러 주지 않는 친구들을 보며 속상해한다. 여우 인형을 안고 가다가 여우가 너무 커서 힘들다고 하소연도 한다. 그래서 유모차를 태운다. 유모차를 태울 때도 잊지 않고 안전벨트는 꼭 매준다.
두 번째는 선생님이다.
송이가 선생님이라는 말은 동시에 나에게는 중노동이 시작된다. 집에 있는 모든 인형과 함께 학생이 되어야 한다. 어린이집에서는 방바닥에 앉으라고 한다. 의자에 앉으면 선생님만 의자에 앉는 거라면서 앉지 못하게 한다. 선생님은 슬리퍼를 신는다며 꼭 챙겨 신는다. 한군데서 계속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집과 놀이터 방이 따로 있다. 방을 옮겨 다닐 때는 인형들 전부와 함께 옮겨 다녀야 한다. 이렇게 어린이집과 놀이터를 셀 수 없이 왔다 갔다 한다. 의자에 앉으면 좀 수월할 텐데 방바닥에서 일어나고 앉기를 무한정으로 반복한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난다. 동화책을 읽어 줄 때는 조용히 하라며 시끄러우면 선생님이 읽어 줄 수 없다며 정색을 한다. 율동을 가르쳐 줄때 앉아서 하려면 서서 해야 한다고 한다. 낮잠 자는 시간도 있다. 이때를 이용해서 누워 있으려면 간식 먹고 놀이터 가야 한다면서 깨운다. 선생님 옷은 주머니가 있어야 한다며 그 주머니에 휴지를 접어서 넣고 다닌다. 인형 학생이 감기 걸렸다면서 휴지로 코를 닦아 준다.
세 번째는 송이 아가다.
본인이 투정을 부리거나 떼를 쓰고 오랫동안 울음을 그치지 않을 때는 아가가 된다. 그런 날은 송이가 아니라 송이 아가가 된다.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곤란할 때는 당연히 아가가 된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거나 과자 등이 먹고 싶을 때도 아가가 된다. 업히고 싶을 때도 안기고 싶을 때도 아가가 된다. 심통이 나거나 마음이 불편 할때는 바로 송이 아가로 변신한다.
네 번째는 의사 선생님이다.
송이가 의사선생님이 되면 조금 편하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머리도 배도 다리도 하면서 여기 저기 아프다 하면 진찰 하느라 바쁜 송이 때문에 쉴 수 있는 시간을 한참 벌 수 있다. 체온을 재고 청진기를 가져다 대고 입속까지 꼼꼼히 잘 살핀다. 진찰이 끝나면 약까지 꼭 챙긴다. 약 잘먹어야 한다는 맨트도 잊지 않고~
송이가 본캐로 돌아올 때는 의젓해진다. 여우 아가는 엄마가 회사 가는 줄 알면서 왜 우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요새 아이들은 제멋대로이고 왜 말을 듣지 않을까?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을 보면 혼자 보기 아깝다. 어느 날은 할머니가 싫다고 한다. 할머니가 오면 엄마가 출근해야 해서 그렇다는 말을 손자손녀를 키우는 선배들에게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순간 정말 싫어서 싫다는 것인가 하는 섭섭한 마음이 든다. 그런데 어린이집 다녀오자마자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조금 섭섭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진다. 그래서 모든 할머니가 힘이 들어도 계속 손자손녀를 돌봐 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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