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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llyfish Jun 25. 2024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다시 그리기 위해 용기를 냈다. 테솔 과정을 함께 한 동기가 노트에 끄적거린 끄적거린 스케치를 보고 '나는 왜 저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라는 열망이 강하게 들었다.


"OO야, 나도 너처럼 그림 그리는 거 알려줄 수 있을까?"

"어? 내가 가르쳐줄 게 있을까? 언니는 더 잘 그리잖아?"

"아니, 난 그냥 끄적거리는 걸 못해. 너처럼 그런 그림 그리고 싶어. 힘 안 들어간 그림."

"그럼! 언니가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해 줄게."


그냥 손이 가는 대로, 아무런 기대 없이 그림을 그린 다는 건, 내겐 평생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스케치북을 바꿔보면 될까 싶어 시작하고 첫 몇 장만 가득 채운게 수십 권.

연필이 무르면 더 잘 그려질까, 지우개가 좋으면 되는 건가 싶어 모으기만 한 연필이 수십 자루.

색연필, 수채화물감, 마커 등등


동생과 드로잉 데이트 날짜를 잡고, 오랜만에 펼쳐본 옛날 스케치북엔 그림 빡빡한 일기와 아이디어만 가득 적혀 있었다.


작품에 대한 생각은 모두 스케치 대신 말로 풀어서 적었다.


<그냥 힘 빼고 하는 것>이 내겐 너무 어려운 숙제였다.


심지어, 미국 유학을 준비할 때, 완성도 있는 그림과 휙휙 그린 스케치 등을 적절히 엮어야 하는데, 그림들이 너무 완성도가 있고 숨구멍이 없어서 스케치, 드로잉 연습만 따로 몇 개월 했어야 했다.

그 드로잉들은, 손이 가는 대로 그린 그림이 아닌, <손이 가는 대로 그린 것처럼 보이는> 그림들이었다.


미국 미술대학 입학 포트폴리오를 위해 제출한 스케치들 모음


그냥 끄적끄적 그리는 건, 이처럼 노력을 따로 해야 하는, 그래도 잘 안 되는, 나의 아킬레스건 같은 부분이었다.


동생과 약속을 잡고,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 반려견 사진을 보면서 나도 손이 가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제법 그럴싸한 그림이 나왔다. 그림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무엇보다, 마음이 편했다.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고, 그냥 손이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림이 아닌, 그저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오로지 나만을 위한 그림.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왼쪽은 동생이, 오른쪽은 내가 그린 그림


Pure Joy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본 적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 망쳐도 되는 그림 >, < 잘하지 않아도 되는 그림>.


"뭐 어때?", "그래도 돼."는 동생의 한마디 말에 난 마음속에 쌓아놓은 응어리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언니 그림 너무 잘 그리네. 아무 생각 말고 이렇게 그냥 그리면 돼. 알았지?"

용기를 주는 그녀의 말에 난 신이 나서 계속 그림을 그렸다. 그녀가 내가 남긴(?) 파스타를 한편에서 먹을 동안 난 계속 그렸다. 그동안 꽁꽁 싸매둔 나 자신에게 속죄를 하듯.


"OO야, 너무 재밌어."

누가 그림을 그리면 안 된다고 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정해 놓은 박스 안에 나를 가둬두었던 지난 세월들의 내게 너무 미안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의 말 한마디 때문에 그날 이후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전공도 회화과가 아닌, 조소과로 선택을 할 정도로 왜 그리 어려웠을까?


"너 때문에 우리 반 전체가 망신당하게 생겼잖아."라는 선생님의 말 한마디. 그 말 한마디가 그리 상처였을까. 그림 그리기를 가장 좋아했던 9살짜리 아이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림을 못 그릴만큼. 어린 시절의 내가 너무 딱했다.


"OO야, 나 왜 그동안 이 쉬운 걸 못했을까? 이게 뭐라고."

"재밌어? 언니가 좋아하니까 너무 좋다."

동생의 말 한마디에 나는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눈물 콧물 흘리는 나를 보고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기차 안에서 그리는 그림은 몰입감을 준다


그동안 그림을 못 그린, 어린 나 자신에게 속죄하듯, 가는 곳마다 스케치북을 들고 다녔다. 기차 안에서도, 조카들과 워터파크를 가서도 그림을 그렸다.


조카 키 만한 종이 위에 그리는 그림


Life Size Figure를 그리고 인사이드 아웃 2 캐릭터를 그리는 조카와 나


조카들이 심심해하면, "우리, 그림 그릴래?" 하며, 함께 그림을 그렸다.


조카와 함께 그린 그림


꼭 완성을 하지 않아도, 순수한 즐거움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서 나오는 힘은 강력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몰입의 감정이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내가 너무 좋아하는 것을 포기했다니, 참 어리석다.


상처받고 외면하기엔 너무 소중한 나.

그리고 그림.


앞으로 부지런히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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