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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우물 Oct 28. 2024

건강검진을 받은 날, 난 정신을 잃었다.


건강 검진을 받는 날이다. 의료원에 가서 혈압을 재고 소변검사, 시력검사, 혈액검사 등을 해야 한다. 중학생 때도 여기에 와서 건강 검진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는 되게 귀찮고 사람도 많아서 하기 싫었는데 이날은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도 적고 간호사분들이 친절해서 좋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피를 뽑아야 한다는 점이다. 엄마는 저체중인 내가 혹시나 쓰러지진 않을까 걱정을 했다.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어릴 때 엄마가 내게 주사가 아프다는 걸 숨기지 않고 말해준 탓인지 어릴 때부터 주사 같은 건 무섭지 않았다. 피를 뽑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조금 낯설 뿐이었다. 나는 삶에서 다신 오지 않을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고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피를 뽑는 것도 나에겐 잘 오지 않는 순간이기에 그 순간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런 사소한 순간들이 지나가고 나면 그 순간들을 머릿속에 새겨두지 않은 걸 후회하곤 했다. 바늘이 들어가는 것과 내 피가 빠져나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조금 따끔할 뿐이었다. 피를 다 뽑은 뒤에 지혈을 하라고 해서 왼손으로 오른쪽 팔의 접히는 부분을 지혈했다. 의자에 앉아서 지혈하고 있는데 팔 안 가득 시원함이 퍼졌다. 왼손에 힘을 주는 게 힘들어졌다. 그래서 엄마에게 지혈해 달라고 겨우 말했다. 몸이 이상했다. 엄마가 대신 지혈하고 있는데 갑자기 앞이 잘 안 보이기 시작했다.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났을 때 머리가 핑 돌면서 앞이 잘 안 보이는 증세랑 비슷해서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도 나아지지가 않았다. 누가 내 눈동자에 빗금을 마구 그어놓은 것 같았다. 패닉이 왔다. 엄마한테 “엄마, 나 앞이 잘 안 보여.”라고 말하고 엄마에게 기대어 눈을 감았다. 감긴 건지 감은 건진 잘 모르겠다. 몸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머릿속이 뒤엉켰다. 속이 울렁거렸다. 의식이 사라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는 내가 그 말을 하자마자 “저기요!”하며 사람을 불렀다. 의식이 조금 남아 있는 상태로 눈을 감고 있는데 문득 엄마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저렇게 불러도 누가 와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초 동안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 몇 초가 내겐 몇 분처럼 느껴졌다. 몇 초뒤 다행히 간호사분들이 왔나 보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시력 외의 모든 감각으로 간호사분들이 오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응급실을 불러준다고 하는 소리와 여러 잡음, 엄마의 목소리들이 뒤죽박죽 섞여 희미하게 들리고 있었다. 애가 피를 뽑았는데 어지러워서 쓰러졌다고 엄마가 설명하는 것 같았다. 소리는 계속 들리는데 단지 소리로만 들릴 뿐, 그 말소리들이 무슨 의미인지 해석하는 데는 몇 초가 걸렸다. 이렇게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내 오른편으로 와서 기대라고 해서 기대고 있는데 엄마의 쇄골이 느껴졌다. 불편해서 나를 붙잡는 엄마의 손을 치웠다. 그럴 정신은 있었나 보다. 난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죽기 전엔 편안하다던데 이런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프다기보단 힘들었고 힘들다기 보단 무서웠다. 그리고 마음을 놓으니까 편안했다. 의식이 좀 없어서 그런지 편안했다. 그러고 있었는데 응급실에서 남자 간호사 두 분이 나를 실을 것을 들고 와서 나를 부축하면서 눕혔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점점 앞이 잘 보이기 시작했고 갑자기 간호사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괜찮은데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것 같아서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미안했다. 나 자신이 꾀병 부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응급실로 가 혈압을 재 보았는데 86/63이 나왔다. 혈압이 낮다며 수액을 맞아야 한다고 했다. 사실 그때는 앞도 잘 보이고 스스로 나의 상태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때 난 괜찮지 않았던 것 같다. 수액을 조금 맞다가 다시 혈압을 쟀는데 똑같았다. 과장이라 불리는 남자분이 ”원래 혈압이 낮은가 보다 “라고 하셨고 엄마는 걱정되는 말투로 “애가 또 저체중이어서”라고 했다. 난 하나님께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고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간호사 분들이 전부 다 친절해서 아직은 좋은 세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날 너무 많은 감정을 느꼈다.  잠깐이었지만 내게 죽음이 다가온 줄 알았다. 갑자기 앞이 안 보인다는 것 자체가 큰 충격을 주었다. 보잘것없는 나를 위해서 이렇게 많은 분들이 도와준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나를 위해 뛰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동받았다. 사람은 살아야 하구나. 항상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갈 만큼 가치 있는 존재인지 고민해 왔는데 그 해답을 얻은 것 같기도 하다. 응급실에 누워서 천장을 보며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에게 고마운 존재가 되고 싶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겠다.

202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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