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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히콥스토스 Jul 28. 2024

이국의 삶

아침이다. 오늘도 떠지지 않는 눈을 손으로 부비적 한번 쓸고 힘겹게 눈을 떠보려 애를 쓴다. 하지만 너무 졸린걸… 조금 더 자고 싶다는 생각에 한껏 널브러진 자세를 조금 고쳐 잡는다. 감은 눈으로 대충 만져지는 이불을 잡아 목 아래까지 끌어당기고 다시 편한 자세를 만드는 찰나,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무언가가 내 어깨 위로 올라와 둔탁하게 내 몸을 잡는다. 깜짝 놀란 나는 순식간에 잠이 달아나 버린다. 뒤이어 황급하게 뒤를 돌아 정체를 확인한다. 눈이 퉁퉁 부은 귀여운 얼굴로 아침 인사를 건네는 남자친구다. “Good morning 여보.” 아 맞다. 여기 한국이 아니었지.


내 남자친구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살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한 두 달에 한번 정도밖에 만날 수 없는 소위, 롱디커플(Long-distance couple)이다. 주기적으로 남자친구의 나라에 가는 나는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남자친구와 함께 하는 일상은 평범하기 짝이 없지만 우리에게는 순간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한 침대에서 아침에 같이 눈을 뜨고 밤에 같이 이불을 덮는 일, 아침 점심 저녁, 매 끼 무엇을 먹을지 설레며 함께 하는 식사, 주말에 가보고 싶었던 카페를 방문해 여유를 만끽하는 데이트, 그리고 원할 때마다 잡을 수 있는 한 뼘 거리에 있는 손. 이 모든 것이 멀리 떨어져 사는 우리 커플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들이다. 이런 소중한 평범함 외에도 내가 이 나라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데 그건 바로 이곳에서는 남자친구와 손을 잡고 거리를 누빌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나라는 동성 커플에 관대하다. 도심으로 나가면 손을 잡고 길을 걷는 동성 커플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여느 커플들과 다를 바 없이 서로를 향한 애틋한 눈빛을 공유하며 웃고, 떠들고, 길을 걷는다. 그 누구도 그들을 쳐다보지 않는다. 신기해하지 않고 이상해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 커플에게도 적용된다. 여기서 오는 편안함과 안정감은 내가 우리나라에서 살면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한국에서는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혹시나 누군가 우리를 커플로 보지는 않을지 쉴 새 없는 불안함이 시작된다. 이 불안함은 우리의 일상을 아주 크게 방해한다. 이 불안함은 서로를 부르는 호칭부터 나를 검열하게 만들어 서로를 쳐다보는 눈빛, 둘이 있을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까지 완전히 바꿔버린다. 마치 친한 친구사이를 억지로 연기해야 하는 불행한 배우가 되는 느낌이랄까. 밖에서 손을 잡기는커녕 우리는 친구 사이로 보이기 위해 둘 사이에 일정 거리를 의식적으로 두면서 걷는다. 그러다가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면, 우리의 관계는 ‘교환학생 시절 만난 친구’라는 거짓말로 포장되는 우스꽝스러운 순간들도 생긴다. 커플들이나 갈법한 로맨틱한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를 할 때면 우리는 식사 내내 힐끗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억지로 모른척하며 견뎌내야 한다. 이런 한국에서의 삶에 지친 나에게 자유의 문이 있다면 이 나라에서의 삶은 그 문 너머의 세계일 것만 같이 느껴진다.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이곳에서 남자친구와 근사한 레스토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식사가 끝나갈 즈음 서빙하는 직원이 환하게 웃으면서 우리의 테이블에 디저트를 올려놓았다. 우리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특별 제작된 디저트, 남자친구가 미리 준비한 이벤트였다. 디저트를 서빙하는 직원도 박수를 치며 우리의 기념일을 함께 축하해 주었다.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감정은 놀람과 기쁨보다는 당혹스러움이었다. 30년을 살면서 상상 속에서도 그려보지 못했던 그림이었다. 레스토랑에서 준비한 게이커플을 위한 특별 제작 디저트라니… 죽기 전까지 경험해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나에게 일어난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교차하는 여러 감정에 벅차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누군가에게는 지극히도 평범하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특별한 순간, 그게 이곳에서는 가능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화가 날만큼 감사하다고 표현하면 이런 감정을 누군가는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남자친구와 방문하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커플임을 드러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같이 다니는 체육관에서 우리는 귀여운 커플이다. 체육관에 들어가면 모두가 우리를 향해 아주 반갑게 인사를 한다. 남자친구를 따라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나에게 남자친구는 이것저것 챙겨주며 가르쳐줄 때가 많다. 그럴 때면 같이 운동하는 친구들이 남자친구의 자상함에 몸서리치며 우스꽝스런 표정을 짓고 야유를 보내며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그 순간마다 내가 느끼는 작은 기쁨이 나에게 속삭인다. ‘너는 이곳에서 다르지 않다.’  남자친구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한 적도 있다. 남자친구의 친구들에게 나는 파트너로 소개된다. 내가 소개되는 수없이 많은 순간에 나는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그들과 똑같이 웃고 떠들며 자리를 함께한다. 마치 나도 이 무리에서는 다를 게 하나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여행을 다니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우리는 커플로 소개된다. 한국이었다면 겪을 수 없는 이 모든 순간들의 특별함안에서 나는 나의 평범함을 인정받으며 안도한다. 이런 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의 기분은 뭐랄까, 사치스러운 해방감과 30년간 받았던 차별적 시선에 대한 비웃음이 뒤섞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에서의 삶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여러 행복들 중 가장 평범하면서도 큰 행복을 꼽으라면 나는 나의 스마트폰 잠금화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가 이곳에 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 중 하나는 내 스마트폰 잠금화면을 남자친구의 얼굴 사진으로 설정해 놓는 일이다. ‘그게 뭐 대수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이 작은 변화가 나의 일상에 이렇게까지 큰 기쁨과 에너지를 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루동안 수시간을 쳐다보게 되는 스마트폰, 시간을 확인할 때, 메시지를 확인할 때, 궁금한 것을 검색할 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는 남자친구의 얼굴을 마주한다. 정신없는 일상 속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면, 나는 영락없이 아이처럼 빙그레 웃고는 노오랗게 따뜻해지는 나의 마음을 느낀다. 한국에서라면 어땠을까? 남성이 다른 남성의 웃는 얼굴을 스마트폰 잠금화면으로 설정하는 행위. 스마트폰 잠금화면이 혹여나 남에게 발각될까 전전긍긍하는 모습부터 그려진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친구나 가족, 직장 동료들이 잠금화면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더 나아가 어떤 질문을 꺼낼지 미리 예측까지 해보게 된다. 그 순간을 마주하면 얼마나 당혹스럽고 무안할지 또 그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걱정이 앞서니 그저 스마트폰 잠금화면의 자유정도는 포기하게 될 것이다. 결국 한국에서는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나의 스마트폰 잠금화면까지도 남들에 의해 침해를 받는 꼴이다. 별 것도 아닌 나의 남자친구 사진을 내 스마트폰 잠금화면에 담는 일이 한국에서는 왜 이렇게 두려운 걸까?


이곳에서의 나의 삶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해방’이다. 나는 이곳에서 나를 향한 수많은 편견과 차별의 시선으로부터 비로소 해방될 수 있다. 내가 나임을 그대로 드러내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받는 일. 내가 30년간 느껴왔던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는 이곳이 나에게는 이미 모두가 찾아 헤매던 천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본인들도 모르게 이미 천국에 살고 있는 수많은 헤테로섹슈얼의 삶은 이리도 자유로운 것이었구나. 평범하고도 당연하지만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그들만의 사랑하고 사랑받을 특권이 괜스레 밉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이제 남자친구 나라에서의 삶이 제법 익숙해졌다. 아침에 일어나 덜 깬 잠을 물리치기 위해 따뜻한 햇살을 즐기며 걸어가는 동네 카페가 생겼다. 정신없는 아파트 앞 거리를 따라 3분 정도 걷다 보면 동네 뒷골목에 위치한 작은 카페가 날 기다리고 있다. 정신없는 큰길과는 다르게 고요하고 Chill한 분위기의 이 카페는 나의 아침에 편안한 미소를 가져다 해준다. 특히 상큼한 아침맛의 라떼는 내가 마셔본 라떼 중 가장 맛있는 라떼들 중 하나다. 이곳에서만 즐길 수 있는 소울푸드도 생겼다. 소울푸드를 먹으러 갈 때면 가게 주인과 항상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말은 통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친근함을 느끼며 미소를 주고받는다. 이곳에서의 나의 취미도 생겼다. 체육관에서, 댄스 스튜디오에서 나의 자유시간을 즐기며 함께하는 현지인들과 친구가 되었다. 이제 나는 점점 이곳에서의 나의 미래를 그리게 된다. 머지않아 찾아올 해방. 그 해방을 꿈꾸며 나는 오늘도 이국에서의 삶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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