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산다는 건
하루의 미팅이 모두 다 끝나고 창 밖을 바라보니 날씨가 쾌청하다.
“뛸까?”
조금 더울 수도 있겠지만, 그땐 뭐, 상의를 벗으면 되겠지. 완충된 애플워치를 왼손에 차고 암밴드에는 핸드폰을 집어넣은 후 Brooks 사에서 나온 Glycerin 20 운동화를 신는다.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을 준다는, (아니 인간 누가 구름 위를 걸은 사람이 있던가?) 구매 당시에는 신기술의 집합체였던 러닝화를 신고 집 밖을 나선다. 아직 준비가 다 끝난 건 아니다. 오늘은 어떤 노래를 듣지? 얼마나 뛰지? 어떤 속도로 뛰지? 어디를 뛰지? 스스로 정해야 할 많은 것들이 남아있다. 오늘은 Linkin Park의 새로운 여자 보컬 Emily Armstrong의 첫번째 앨범 From Zero를 처음부터 들어야겠다 - 그럼 전체 앨범을 들어야 하니까 한 60분정도 뛰어야 겠군 - 60분 정도면 집에서 Fort Mason을 찍고 오면 되겠다 - 속도는 천천히 가야지. 일련의 결정을 내리는 데는 채 30초가 걸리지 않는다. 이제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지 거진 1년이 되어가는 로컬이니까 말이다. 처음엔 어디로 뛰어야 할지도 몰랐었는데 이제는 언제는 어디로 가는게 좋은지 감이 온다. 오라클 파크에 자이언츠의 야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Fort Mason으로 - 주말 오전이고 날씨가 좋으면 Fisherman’s wharf에는 사람이 많을 것이기에 Oracle Park 쪽으로 - 주중에 오늘은 좀 길게 뛰고 싶다면 Palace of Fine Arts로 - 선택지가 다양하다. Embarcadero에 도착하여 이제 나는 애플워치에 Strava 어플리케이션을 켜서 Record를 시작하고 그제서야 나는 달리기 시작한다. 천천히, 천천히.
오늘은 날씨가 맑아 Pier 39에 가면 금문교가 보일 것 같아 - 라는 생각이 든다. 오케이 그럼 계획변경, 오늘은 Pier 39를 거쳐서 Fort Mason을 달린다. 마리나에 정착되있는 보트들과 요트를 지나 조금 달리다 보면 Alcatraz 섬이, 그리고 해가 걸린 금문교가 보인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인가, 나는 이곳에 뼈를 묻어야 겠다, 를 다짐하며 Pier 39를 지나 Fisherman’s wharf를 달린다. 빵굽는 냄새가 듬뿍 나는 Boudin Bakery를 지나 게살을 발라주는 Cioppino(한국식으로는 해물찜) 를 파는 Cioppino를 지나면 Aquatic Cove가 금방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인가,
"너는 연봉이 얼마야?
인천에서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를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시 만난 건 최근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에게 수학의 정석 고1과정을 가르치는 엄청난 학원에 다니고 있었던 우리였다. 그 중에서도 A는 시험을 보면 평균 이상은 하는 - 초등학교 6학년이지만 2차방정식 정도는 인수분해로 쉽게 풀 수 있는 - 학생이었고 나는 인수분해를 할 줄 몰라 달달 외우는 정도의 평균 저 아래의 학생이었다. 대한민국의 미친 선행학습을 탭댄스를 추며 따라가는 듯한 A와 온몸을 비틀어가며 따라가던 나였다. 그렇게 같은 시대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던 우리가 우연히 대학교 때 연락이 닿아 SNS로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직접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제는 유수의 대기업 과장이 되어 실리콘벨리로 주재원을 온 A였다.
날씨 좋은 오후, Cioppino를 함께 즐기며 A는 나의 재정 상태를 조심스레 물었다. 멀리서 온 친구를 본 만큼 즐거운 일이 어디있겠느냐는 공자님의 말씀을 배운 우리가, 이런 반가운 날에, A의 질문—나의 재정 상태에 대한 물음—은 오랜만에 만난 기쁨과 적당히 취한 기분 속에서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꽂혔다. 그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확인하려는 일종의 시험처럼 느껴졌다. 내가 너무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했던 걸까? 출장으로 일요일 오후부터 일해야 하는 친구에게 내 일상은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깃거리였을까? 서울의 집값을 걱정하며 경제적 자유를 고민하는 친구에게 나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는 네가 어떤 책을 읽는지, 주말을 어떻게 보내는지, 어떤 노래를 듣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하지만 어쩌면 나는 너에게 그저 시덥잖은 소리를 늘어놓는 사회초년생에 불과했을게다.
“난 xxx 정도 벌어. 그럼 너 연봉은 얼마인데?”
나는 친구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을 건넸다. 그리고 너의 괘씸함을 알리기 위해 똑같은 질문을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경제적 자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결혼을 준비 중이라는 너, 갭투자로 수원에 신혼집을 마련하려 한다는 너의 말. 최대한 공감하려 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그곳을 떠나고 있었다. 이렇게 달라진 너와 나라니.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다르게 만든 걸까? 한 명은 내일의 날씨가 궁금하고, 다른 한 명은 내일의 부동산이 궁금한 사람으로...
아마 미국에서 산다는 건, 그런 경쟁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서울에 살지 못하면, 아파트에 살지 않으면, SKY 대학에 다니지 않으면, 대기업에 다니지 않으면, 결혼을 하지 않으면, 키가 180cm가 넘지 않으면 루저라는 끊임없는 도전에서 벗어나 내가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정의할 수 있는 기회. 남들이 정한 행복이 아닌, 내가 스스로 행복을 정의내리고 이를 이루어가며 사는 삶이 가능한 것이다.
철석-철석 파도가 밀려오고, 사람들은 웻수트를 입고 수영을 하고, 누군가는 감상에 잠겨 금문교를 바라보며 앉아있고, 아이들은 모래사장에서 꺄르르 웃는, 불행한 사람이 없는 이곳을 심장 박동수 140 정도로 달려나간다. 이제 오르막 길만 달려나가면 된다. 한 10도-20도 정도의 경사가 있는 구간을 보폭을 줄이고 상체를 기울여 달려간다. 끝이 보인다. 후우-후우. 숨이 찬다. 심장 박동수는 150을 넘어가고, 숨이 막힐때 쯤 오르막을 넘어선다. 다 왔다. 저 멀리로 금문교가 다시 보인다. 감탄 포인트. 오늘은 운이 좋게도 금문교를 지나가는 컨테이너를 잔뜩 실은 화물선이 보인다. 이 순간을 찍어야겠다, 잠시 암밴드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어 비디오를 촬영한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해질녘 금문교를 바라보며 숨을 고른다. 그동안 살기위한 노력도, 치열하게 경쟁하던 오늘도 잠시 멈춰본다. 끝이없는 회사일도, 떨어지는 주식가격도, 1 갤런당 5달러가 넘어가는 기름값도 이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는 별거 아닌 것들이 되어버린다.
“30억, 50억, 120억, 60억, …”
Fort Mason을 지나 Marina를 달리다 보면, Bay를 마주한 아름답고 우아한 하우스들이 눈에 들어온다. 베네치안 스타일, 영국식, 일본식, 빅토리안 스타일 등 다양한 건축 양식이 경연을 벌이는 듯한 거리. 이 하우스들을 옆에 끼고 달리는 순간이 이 코스의 백미다. 마치 내가 이 멋진 집들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과 바닷가, 새하얀 요트와 푸릇푸릇한 잔디,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나. 하지만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려면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필요하겠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고, 건강한 신체도 필요할 것이다. 물론 경제적 자유가 있어야만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고,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닐 것이다.The best things in life are free. 이 맑은 날씨, 이 공간, 그리고 나의 시간과 건강한 몸은 돈이 없어도 누릴 수 있으니까.
돌아갈까? 아니면 마리나까지 갈까? 고민의 순간 현재 시간은 5시 30분, 만약 마리나까지 달린다면 난 아마 저녁을 일곱시쯤 먹게 될거고 그건 내가 원하지 않는다. 돌아가자. 내리막을 천천히 걸으며 숨을 다시한번 고른다. 이때쯤 되면 달리기보다는 저녁을 뭐 먹지라는 생각을 더 하게 된다. 파스타를 먹을까 - 그럼 재료가 없는데 - 그럼 중간에 Trader Joe를 들릴까 - 그건 귀찮은데 - 그럼 라면을 끓여먹을까 - 단백질이 부족할 듯 한데 - 그럼 라면에 계란을 네 개를 넣어야겠다 - 찬밥도 좀 남은게 있는데 그것도 먹어 치워야겠다. 어디로-어떻게 뛸까를 고민할 때는 30초가 채 걸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저녁을 뭘 먹을지를 고민하는 건 꽤 시간이 걸린다. 평생 산 정상으로 돌을 굴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매일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나의 형벌은 언제쯤 사라질지. 요리 잘하는 아내를 맞아야 겠다-라는 여느때와 같은 다짐을 하며 왔던 길을 달려간다. 사워도우 굽는 냄새가 가득한 Boudin Bakery를 통과하여 물개상이 있는 Pier 39의 초입을 지나 크루즈가 정박해있는 Pier 27애 도착한다. 후우-후우. Strava 어플리케이션을 다시 켜서 나의 달리기는 끝이 났음을 알린다. 하늘은 아직 맑고, 날씨는 선선하며 life 는 good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