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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아민 Jun 20. 2024

오늘 난 죽기로 결심했다

1. 향

내가 입은 옷에선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는데 내 어깨에선 타인의 집 냄새가 나서 그렇다. 내 머리카락에 베어있는 냄새는 내가 지나온 냄새들이다. 누군가가 편의점에서 먹던 라면 냄새. 구인광고 붙어있는 치킨집의 기름 냄새. 신호 안지키는 택시 기사의 무성의한 사과. 조수석에 앉아서 입술만 핥았다. 혀는 말라서 입천장에 붙고 입술은 텁텁한게 한숨도 제대로 안나올 지경이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죽어도 한숨은 푹푹 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도 네가 듣기 싫어할 거 같아서 눈치만 봤다. 난 쉬고 싶다. 그게 한숨이든 관계든, 난 쉬고 싶었다. 내 팔에서 나던, 내가 좋아하던 비린내와 쇠 냄새도 니가 자꾸 확인하는 바람에 없어졌다. 그것 마저 없어졌다. 이제는 내 팔에서도 좋은 향수 냄새가 난다. 그리고 그 냄새 때문에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 죽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부터는 죽어야겠다는 생각만을 해야겠다. 자다 깨서 맡은 베개 냄새는 아침에 퍼부은 샴푸냄새.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그 냄새 때문에 오늘은 그냥 잔다.

2. 적 (赤)

주변에 적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내 모든 적들은 사람이다. 고통은 적색이다. 적보다 중요한 것은 고통이다. 온몸을 붉게 물들이는 것은 의식이겠고 칼에 찔려 죽는 것이 고통이겠다. 적이 칠하는 색은 적색이다. 내가 칠하는 색은 적색이다. 고통은 적(敵)색이다. 의식은 적(赤)색이다. 그래서 내가 칠하는 의식은 고통이 없다. 적색피가 흐르다 말아도 고통이 없다. 몸 안의 적색이 몸 밖의 흉터가 되어도 고통이 없다. 눈 앞에 부엉이를 잡아다 눈알을 파내면 피가 흐른다. 부엉이가 죽지 않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인데 누구도 내 눈알을 파주지 않고 누구도 입을 찢어주지 않는다. 그저 내가 담겨있는 적색 페인트 통을 엎을 뿐이다. 내 가슴에 적색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다면 그렇게 해라. 적이 칠하는 색은 적색이다. 고통을 벽에 걸고 감상한다. 그림은 말이 없다. 작가는 더욱 말이 없다. 설명할 가치가 없다. 작가이자 관객인 적의 유흥이다.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림의 피는 여전히 흐르고 있어서 종이가 다 일어난다. 그대로 걸어 나갈 수도 있겠다. 마르지 않은 물감이 바닥에 떨어진다. 그 소리를 듣다보면 물감은 마르고 상처는 흉터가 된다. 물감이 말라도 그림의 가치는 변함 없다. 나는 멍청해서 그걸 모른다. 그래서 작가와 관객을 기다리다 오늘도 죽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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