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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글샘 Jul 30. 2024

열심히 벌 받는 중입니다

새로운 시대, 학교의 쓸모에 관한 고찰



평생 학교 다니게 될 줄이야


    평생 학교를 벗어나지 못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뒤늦은 사춘기로 한창 학교가 싫어 마음이 힘들었던 고등학생 때, 내 눈에 학교는 정말 '이상한 곳' 그 자체였다. 성적이 곧 명함이었던 인문계 고등학교. 지독한 사춘기의 늪에 빠져 한창 삐딱했던 내게 어떤 선생님도 따끔한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성적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혹시나 내가 잘못될까, 하는 우려도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싫어 더 삐딱했다. 차라리 호되게 혼내주지, 선생이라면서 성적만으로 학생을 평가하다니! 어차피 성적만 잘 나오면 될 거, 학교가 꼭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 건가? 기출문제만 열심히 풀고, 수능만 잘 보면 된다면서 쓸데없이 가르치는 교과는 왜 이리 많은지. 삶에 별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은 함수며 방정식, 허수에 대해서는 왜 배워야 하는지. 당시 내 머리론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들이 참 많았다.


그 당시 내 심정을 꼭 닮은(?) 싸이월드에서 유명했던 짤. 졸업만 하면 학교는 끝일 줄 알았지.


    돌아보니 알 수 있었다. 선생님들께 너무 큰 무례를 저질렀다. 나는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그저 읽고 싶은 책이나 때로는 신문을 펼쳐두고 세상 시니컬한척하는 불량 학생이었다. 학교가 너무 싫다면서 차마 학교를 그만두진 못하고, 제 자리에 앉아 잠을 자거나 멍을 때리거나 때론 우는 찌질이였다. 그래서 평생 학교를 벗어나지 못하는 벌을 받은 걸까? 사실이건 아니건, 나는 과거 나를 가르치신 선생님들께 얼마간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난다. 천방지축 말썽꾸러기를 만나 애를 먹기도 하지만, 이 자리를 빌려 영업 기밀(?)을 하나 풀자면 과거의 나보다는 그래도 네가 낫다, 생각하면 상대하지 못할 아이는 거의 없다. 정말 그렇다.


학교의 의미 되짚어보기


    배우는 입장이 아닌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 보니 오히려 학교의 존재 이유를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교육과정에 대해 배우고 나니, 왜 그렇게 많은 교과목을 가르쳐야만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끝도 없지만, 학교의 태초를 떠올려 보면 학교의 존재 의미는 명백해진다. 상류층만의 전유물이었던 '지식'을 모두에게 보다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두고 가르치는 곳. 따라서 '학교'의 핵심은 '공동의 학습 공간'에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L 선배님('친애하는 선배님들께'에서 내가 언급한 바 있는)도 학교가 '사회적 학습 공간'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하시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전례 없었던 코로나 사태로 학교가 문을 닫았던 시절을 떠올려 본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교사라면 아마 코로나를 평생 잊지 못하리라. 새 학기를 시작해야 하는 3월을 앞두고, 새 교과서도 아직 받아가지 못한 아이들과 어떻게 수업을 해야 할지 모든 게 막막하기만 했던 그때. 아이들을 홀, 짝으로 나누어 하루씩 교차 등교를 시켰다가, 코로나 상황이 심해지며 다시 전면 원격 수업으로 전환을 했다가, 저학년에게 등교 기회를 더 많이 부여해야 한단 사회적 합의에 따라 학년 별 등교 요일을 정했다가...  돌아보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중대본의 발표에 따라 심지어 어떤 날은 하루에 세 번 회의를 하기도 했다. 답이 없는 회의를 하며 겪지 않아도 되었을 갈등도 참 많이 겪었다.


    코로나를 핑계로 합법적으로 등교를 하지 않아도 된단 사실을 과연 아이들은 좋아했을까? 답은 '아니요'다. 당시 내가 맡았던 4학년은 일주일에 많으면 두 번, 적으면 한 번 등교를 했다. 그 얼마 되지도 않는 등교 수업일을 아이들은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던가. 아이들의 가장 큰 소망은 '매일 학교 나오기'였다. 실시간 쌍방향 원격 수업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때, 아이들과 쌍방향 원격 수업을 시도만 해 보기로 하고 접속 방법을 알려주었다. 절반이나 접속할 수 있을까, 했던 내 예상을 깨고 약속된 시간에 우리 반 모두가 각자 카메라 앞에 앉아 신나고 설레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순간. 나는 왠지 모를 감정에 압도되어 하염없이 슬퍼졌다. 아이들의 열의에 찬 눈망울에서 '교육'의 의미를, '학교'의 의미를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학교 무용론, 과연 그럴까?


    아이들이 어릴수록 학교가 갖는 의미는 더욱 커진다. 가정환경이나 타고난 성향 등과 관계없이 모든 아이들이 공평한 학습 기회를 보장받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의미 있는 일이다. 학교에 입학해서 배우는 지식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 약속을 지키는 법, 여럿이 배려하며 지내는 법, 실수를 했을 때 바르게 대처하는 법, 등등.


    학교가 쓸모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점이 있다. 세상에는 아이가 필요로 하는 교육을 충분히 제공할 수 없는 가정도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제대로 된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부모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꼭 경제적 여유나 부모의 교육 수준, 사회적 지위에 국한한 문제가 아니다. 부유한 집의 아이들이 모두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늘 사회성이 좋은 것도 아니다. 인간사 그러하듯, 성장 과정에 있는 모든 아이들에게도 나름의 '결핍'이 있다.


    각각의 가정에서는 자칫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간과할 수도 있는 부분이 있기에 아이들은 학교에 와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행동과 약속, 규범 등을 더욱 깊이 배운다. 교육사회학에서는 이를 학교의 '문화적 재생산 기능'이라 한다. 학교가 아이들을 교육시키며 동시에, 이미 오래전 학교를 졸업한 학부모에게까지 변화된 사회적 약속과 규범을 전파하는 것 역시 문화적 재생산에 속한다.


    개인적으로 '학교 무용론'의 오류는 지식이 범람하는 시대, 그 지식을 꼭 학교에서 배워야만 하냐는 가정에 있다고 느낀다. 지식이 범람한다고 그 모든 지식이 다 내 것이 되는가? 이를 '책 읽기'에 비유해 보면 '책을 읽는 ' 자체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게 필요한 책을 고르는 방법,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법, 나아가 삶과 연관 짓는 방법을 아는 것이 '책 읽기'라는 행위보다 중요하다. 또한 책을 읽음으로써 내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이 중요하다. 책에 대한 소감을 나누고, 나와 다른 소감을 인지할 수 있는 '기회' 그 자체가 중요하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사회적 소통 능력사회적 자아를 가꿔가며 성장하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다면, 학교의 의미를 쉽게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숭고한 성장의 공간, 학교 이야기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 가 보면 '지금 무슨 시간이에요?' 묻는 아이들부터 '집에 언제 가요?', '밥은 언제 먹어요?'와 같은 질문을 서슴지 않는, 본능에 충실한 어린이들이 한 데 모여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 순진함에 웃음이 절로 나기도 하지만 본래 모든 일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법.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는 마음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살피고, 앞으로의 원활한 학교 생활을 위해 기본 틀을 잘 만드는 것이 1학년 교사의 의무이기에 특히 '1학년 담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 역시도 아직까지 1학년 담임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아무것도 몰랐던 아이들이 6학년이 되어 세상 의젓해진 모습으로 초등학교를 떠나고, 중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외가 아닌가?


    내겐 아이들이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날 수밖에 없는 '학교의 구조'위안이 때가 있다. 작년 선생님께서 열심히 지도하신 흔적은 절대 사라지지 않고 아이들에게 남아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아주 오래, 멀리를 보고 진행해야 하는 장기 프로젝트라면 내게 주어진 시간은 1년. 짧은 시간이지만 눈에 보이는 부분, 내잘할 있는 부분을 열심히 메꾸면 된다. 내년 선생님께서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곳을 채워주실 것이다. 물론 아이들에게도 자성의 힘이 있고, 가정에는 보호자가 있다. 그러니 아이들의 성장은 많은 사람들의 '팀플'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팀플'은 학교가 배경일 때 비로소 제 빛을 발한다.


    학교를 그토록 싫어했던 내가 자라 학교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글을 쓰는 교사가 됐다. 깨달음이 늦어 한평생 학교에 다녀야 하는 벌을 받았지만, 나 역시도 학교에 다니며 많이 성장했으니 괜찮다. 내가 생활하는 교실에서 그간 얼마나 많은 영혼이 얼마나 많은 성장을 경험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학교는 정말 그 자체로 '숭고한 공간'이 맞다. 이 '숭고한 공간'을 지나는 아이들이 더욱 마음껏, 끝없이 성장해 가면 좋겠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내 눈에 포착되는 반짝반짝 빛나는 성장의 순간들을 더욱 소중히 여기기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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