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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글샘 Jul 19. 2024

잊을 수 없는 실패의 기억

이제는 둥지를 벗어나야 할 때



어서 와, 이런 실패는 처음이지?


    지난 글(친애하는 선배님들께)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교직 생활에도 희로애락은 존재한다. 아이들과 생활하다 보면 즐겁고 웃기고, 행복하고 찡한 경험을 주로 하게 된다.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은 존재 자체로 '힐링'일 때가 많다. 매 년 새로운 만남이 이어지는 학기 초에 꼭 해야 하는 일 중 하나가 있는데, 그건 바로 '관계 설정'이다. 아이들 사이의 관계는 물론이고, 아이들과 교사의 관계도 잘 설정해 두면 일 년이 수월하게 흘러간다.


    교사에게 있어 아이들과의 관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더 있으니, 바로 '학부모'와의 관계이다. '폭주 기관차도 멈추게 하는 것'에 등장했던 '민후' 어머니처럼, 아이의 성장을 진정으로 원하고 아이를 잘 키워내려 노력하는 학부모를 만나면 손발이 척척 맞는 파트너를 만난 것처럼 든든해진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아무리 열심히 지도를 해도 '역부족'이라고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 주로 가정과의 연계가 잘 되지 않는 경우이다. 특히 초등학생은 특성상, '돌봄'과 '교육'을 동시에 필요로 하기에 학교와 가정의 연계 지도가 필수적이다.


    가정과의 연계 부재로 벌어지는 안타까운 상황이 많지만, 그중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아이에게는 변화와 성장의 가능성이 너무 다분함에도 불구하고 부모에게 변화의 여지가 없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할 때이다. 교사라면 비슷한 경험을 한 번쯤은 해 봤을 것이다. 오늘은 경력이 얼마 쌓이지 않은 시절에 내가 겪은 '실패의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선생님, 부탁이 있어요.


    '호연이'는(가명이다.) 극도로 내향적인 성격의 학생이었다. 학교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친 아이들이 모인 6학년 교실에서도 유독 돋보일 정도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늘 어두웠다. 시업식 날 담임교사 인사 편지를 학생 편에 배부하자마자 호연이 어머니께 연락이 왔다. 아이의 생활과 관련하여 꼭 상담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 학교에 방문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온종일 어두운 얼굴로 어색하게 생활하다 하교한 호연이를 떠올리니, 어머니와의 상담이 필요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다음날이었나 아이들이 하교한 어느 오후, 호연이 어머니가 교실을 방문했다. 호연이와 똑 닮은 얼굴을 하고 들어오는 어머니를 보니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가볍게 인사말을 나누고 상담신청하게 된 계기를 물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호연이가 1학년 때부터 학교 생활을 힘들어했고, 마음을 나눌 친구를 만나지 못해 매일 학교에 가기 싫단 말을 달고 산다고 했다. 워낙 내향적인 성격에 신체 활동에도 소질이 없어, 아이가 친구 사귀기를 더욱 힘들어하는 것 같아 도움을 요청한다고.


    아이의 원활한 학교생활을 돕는 것은 나의 일이기도 하기에, 어머니께 어떤 도움을 원하는지 물었다. 아이가 선생님의 칭찬을 받고 자신감을 기르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는데 학교에서 특별히 잘하는 행동이 없어 다른 친구들 앞에서 칭찬하기 어려울 테니,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아이에게 칭찬의 내용을 담은 문자 메시지를 때마다 보내주면 좋겠단 답 돌아왔다.


이토록 어려운 거절


    상상도 못 한 요구에 나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지만 내가 호연이만의 담임교사가 아니기에 그런 부탁은 들어드리기 어렵겠다고 정중히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대신 학교에서 호연이의 생활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고, 장점을 발굴하여 칭찬을 하는 경험을 늘려볼 수는 있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의 정중하지만 단호한 거절에 호연 어머니는 다소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교실 안에 교사-학생의 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과연 나의 간헐적이고 비밀스러운(?) 칭찬이 호연이의 학교 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 들었다. 심지어 그 배경이 한창 또래에 관심이 많은 6학년 아이들의 교실이라면? 오히려 다른 학생들과 호연이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호연이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이 무엇인지 힌트를 얻고자 어머니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다.


  '호연이는 집에서는 어떤 아이인지?',

  '이제껏 호연이가 학교에 대해 긍정적인 표현을 한 적은 없는지?',

  '6학년이 되어 등교를 한 후, 호연이는 주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아이가 올해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하길 희망하는지?'까지.


    어머니의 답변에 따르면 호연이는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책 읽기를 즐기며 집에서는 그저 평범하고 귀여운 아들이었다. 다만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친구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유독 힘들어했고, 주변에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남학생(조용하고, 내향적이고, 독서를 즐기는)이 없어 '친구'를 만드는 데에 더욱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고학년에 접어들며 학교에 가기 싫다는 말을 더 자주하여 혹여나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받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고. 아이가 그냥 평범하게 지내기만을 바란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대답을 들을수록 호연이의 학교생활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이 됐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호연이의 등교 거부에 명백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기에, 우선은 학교에 꾸준히 등교하도록 지도하는 .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니 어머니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한 가지 고백을 덧붙였다. 학교에 가기 싫겠지만 아직은 학기 초이기에 꾹 참고 등교를 해 보되, 만일 학기 초가 지나도 등교하는 것이 싫으면 현장체험학습 신청서를 내고 등교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돕겠다는 약속을 아이와 했다고.


어머니, 저도 부탁하겠습니다.


    초등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생활습관''학습태도'를 만드는 것이기에, 내 생각에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어떤 행동이나 생각의 명확하고 일관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매일 억지로 학교에 보내던 엄마가 '이렇게 해 보고, 그래도 힘들면 학교에 안 가게 해줄게.'라고 말하는 것은 명확한 기준에 의하는 행동이 아니다. 안 그래도 학교를 싫어하는 호연이에게 '학교에 꼭 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에 잘못된 방법이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그런 약속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체험학습을 신청해 주겠다는 약속은 철회하면 좋겠다는 교사로서의 처방을 드렸다. 내년이면 호연이도 중학교에 올라가야 하므로, '다니기 싫어도 학교에는 꼭 가야 한다.'에서 시작하여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라고 단호하게 아이를 지도하기를. 나아가 호연이의 기본생활습관과 교우관계를 함께 살펴보기 위해, 그것부터 우리 함께 해 보자고 어머니께 당부했다.


위기의 호연이


    그날 이후 내게 숙제가 하나 생겼다. 호연이를 더욱 자세히 관찰해 보니 같은 내향인으로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스스로 노력해서 개선해야 할 부분도 분명 보였다. 예를 들어 수업 중 모둠 활동을 할 때, 모둠원들과 역할을 나누어 과제를 함께 수행하는 것은 호연이가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체육 시간에 팀 경기를 하거나, 학급체육대회 출전 종목을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하, 함께 연습하는 것도 호연이가 해야 할 일이었다. '협력'을 통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고, 그 과정에서 '성실'과 '노력'의 가치를 깨닫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교육이기 때문이다. 공동의 일에 참여하려 노력하고, 자신의 능력치를 떠나 무엇이라도 한 번 해 보려 도전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 꼭 갖추어야 할 역량이기에 중요했다.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아이들과의 관계에 특히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잘은 못해도 노력해 보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에겐 '못하는 친구'와 '안 하는 친구'를 귀신같이 구별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연이에겐 그러한 태도도 없었다. 온순한 성격의 아이들과 모둠 활동을 있도록 자리를 배치하고, 호연이와 아이들 사이 상호작용을 늘려보려 노력을 보아도 모두 헛일이었다. 모둠 활동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불편하게 앉아있거나 본인이 준비한 책을 읽는 호연이를 답답해하는 아이들이 생겼다. 체육을 못한다고 어느 경기에도 참여하지 않으려는 호연이에게 불만을 표하는 아이들이 늘어갔다.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호연이를 따로 불러 상담을 보았지만 호연이를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아이들이 호연이와 같은 모둠이 되는 것을 꺼리고, 호연이에게 짜증을 낼수록 호연이는 자신만의 땅굴파고 깊이, 깊이 침잠했다. 부탁도, 진심 어린 조언도, 심지어 꾸지람도 통하지 않았다. 호연이는 그저 깊고 깊은 절망의 감정에 젖어 더욱 어두워질 뿐이었다.


문제, 그 원초를 찾아서


    시간이 흐를수록 호연 어머니와 나의 전화 상담 횟수도 늘어만 갔다. 특히 호연이가 친구들과 갈등을 겪고 하교한 날이면 어김없이 어머니의 상담 요청 전화와 문자가 왔다. 대개 '아이한테 들으니 이런 일이 있었다던데, 친구들이 우리 아이를 일방적으로 괴롭힌 것이 아니냐', 는 식의 문의였다. 호연이와 아이들 사이의 갈등은 거의 매일 발생했고, 나는 그때마다 반드시 아이들을 따로 불러 지도했다. 아이들 사이의 갈등은 대개 쌍방 모두에게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문의가 있을 때면 나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정리하여 전달하고, 호연이와 아이들이 각자 개선해야 할 점을 지도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나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친구들과 함께 지도했음에도 호연이는 집에 가면 자신이 잘못한 점은 빼놓고, 속상했던 점이나 힘들었던 점만을 전달했다. 이미 호연 어머니의 머릿속 우리 반 친구들은 '착하고 순진한 호연이를 의도적으로 괴롭히는 나쁜 학생들'이었다. 아이들이 호연이를 괴롭히는 게 명백한데 선생님이 아이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고 느끼는 것 같았다. 호연이의 말만 듣지 말고 그러한 일이 발생하게 된 원인과 앞뒤 상황을 모두 묻고, 아이의 개선점을 함께 지도하자고 강조했지만 그뿐이었다. 상담이 늘어갈수록 내게 '막막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호연이와 어머니의 '방어 기제'였다.


실패, 아프기에 더 강렬한


    결국 방학을 앞둔 7월, 호연이는 일주일간 '현장체험학습 신청서'를 제출했다. 표면적인 사유는 '가족여행'이었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학기 초에 어머니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체험학습을 허가하는 것이 맞는 일인지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허가서를 보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에도 호연이는 크게 달라진 점 없이 생활하다가 결국 졸업했다.



    호연이가 학교에 정을 붙이지 못한 원인에 분명 아이의 타고난 성향과 기질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약속이, 과한 우려가 호연이를 '학교를 싫어하는 아이'로 기른 것은 아닌지 곱씹게 되었다. 아이가 가정에 머무르는 시간이 학교에 머무르는 시간보다 길기에, 학교에서의 지도만으로는 분명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호연이와의 일은 내게 '교사 홀지도하는 것의 한계'알게 해 준, 아프기에 더욱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애지중지 기른 아기 새가 둥지를 나설 때가 되면, 어미는 부러 더욱 모질게 아기 새를 쪼고 떨어뜨리며 내쫓는다. 아무리 소중하고 귀한 자식이어도 결국 홀로서기를 시켜야만 잘 살아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나는 호연이가 문득문득 궁금하다. 호연이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서는 잘 지냈을까? 초등학교에서는 그러지 못했지만, 상급학교에서는 생활 속 아주 작은 의미라도 발견했길. 거기서는 마음을 나눌 친구 한 명이라도 곁에 두었길, 이제는 자기만의 동굴을 나와 세상과 잘 지내고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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