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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글샘 Nov 08. 2024

말랑말랑, 어린이

아직은 말랑하고 유연해서 참 다행이다



물질의 상태에서 마음의 상태까지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과학 시간에는 '물질의 상태'라는 단원을 배운다. 고체, 액체, 기체와 같은 상태의 특징을 알고, 각각에 해당하는 사례를 구체적으로 배우는 단원이다. 단원을 도입하며 '물질의 상태'라는 단원명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은 '특징'이라는 말이었다. '어떤 물질이 가지는 특징이요!', '물질이 가진 특징 같은 것을 말하는 것 같아요.' 등등. 물질이 가진 '특징'과 '상태'는 엄연히 다른 개념으로 구분하여 지도해야 하기에 나는 '상태'라는 말의 의미를 먼저 짚을 필요성을 느꼈다.


    아이들이 이해하기 쉬운 예시가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마음'을 예로 들었다. 너무 피상적인 설명이 아닐까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각자가 타고난 고유의 '성격'과 비슷한 말이 '특징'이고,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은 '상태'라는 말의 의미와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상황이나 때에 따라 변하듯, 상황에 따라 변하기도, 변하지 않기도 하는 상황이 '상태'라고 설명한 후 아이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자 뭔가 알았다는 듯, 환해지는 아이들의 얼굴. 좋은 예시는 아니어도 '상태'의 의미를 비슷하게 짚어줬으니 된 걸까? 왠지 안도가 되었다. 그때 갑자기 태호(가명이다.)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내게 물었다. "선생님, 그럼 기분은 마음의 상태라는 말과 똑같다고 할 수 있네요?" 태호의 말에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역시, 태호야. 선생님이 예를 잘 들은 건지 사실 조금 자신이 없었는데, 태호가 선생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네!" 하고 답했다. 태호는 멋쩍은 표정으로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태호에 대한 이야기


    내가 태호에게 다소 과장된 반응을 보인 데에는 사실 이유가 있었다. 태호는 올 해 내게 주어진 풀기 어려운 숙제와도 같은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도 왠지 모르게 성숙한 태호에게는 아픔이 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한 아픔이다. 태호를 홀로 기르는 아버지께서는 태호에게 최대한 관심을 주고, 최선을 다 하려 노력하신다. 학기 초 상담 주간에 태호의 아버지가 내게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도 그것이었다. 홀로 태호를 기르고 있고, 최선을 다 하고는 있지만 혹여나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띈다면 언제든 연락 주시길 부탁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더욱 태호를 살피곤 했다.


    1학기 중순부터였나, 학교 생활에 임하는 태호의 태도에 변화가 보였다. 긴장이 풀린 탓이었을까? 태호가 친구들에게 던지는 농담도, 쉬는 시간에 하는 놀이도 3학년에 어울리지 않게 거칠고 과격했다.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는 학습을 방해하는 분위기를 주도하며 수업에 끼어들기도 했다. 엄하게 지도를 해 보아도 태호는 그 순간에만 얼굴을 붉히고 작게 '네.' 하고 대답할 뿐, 태호의 수업 방해 행동은 지속되었다. 그런 태호 때문에 안 그래도 산만하고 집중력이 부족한 어린이들까지 괜히 들썩이고 있었다. 태호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어느 날엔가 나는 드디어 큰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태호의 아버지께 전화를 드릴 결단이었다.


    학부모와 전화로 소통하며 아이의 학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고민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평소 태호가 쓰는 글이나 표현 등에서 태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이며 동시에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아버지'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기에, 혹여나 태호가 아버지께 혼이 나거나 학교 생활을 더 엉망으로 하게 될 여지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러 날에 걸쳐 고민을 해 보아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나의 걱정 어린 전화를 받은 태호 아버지께서는 태호가 학교에서 그렇게 생활하는 줄은 몰랐다며 한숨을 쉬셨다. 가정사 때문에 어려운 점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은 했지만, 그런 식으로 불만과 불안해소하는 줄은 몰랐다며 미안해하셨다. 그리고는 내게 아주 무섭게 지도를 하셔도 좋으니 부디 태호가 잘못된 행동을 때면 최대한 엄하게 지도해 주시면 좋겠다는 당부를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에 마음이 놓인 것은 물론, 나는 왠지 모를 해답의 실마리를 찾은 것만 같아 기뻐졌다. 그래서 학기 초에 내가 보았던 태호의 의젓하고 멋진 모습과, 아버지에 대한 깊고도 넓은 사랑의 증거를 함께 전하며 아버지만이 태호의 변화를 이끌어낼 있을 거란 판단에 전화를 드렸단 사실을 밝혔다. 태호를 혼내지 말고 요즘 학교 생활에 대해 물어본 학교에서 지내야 하는 이유를 차분히 설명해 주시길, 그리고 선생님이 태호를 많이 믿고 의지하고 있다더란 이야기를 전해주시 부탁하상담을 마쳤다.


어린이라는 존재의 경이


    태호 아버지는 태호에게 어떤 마법을 부리신 걸까? 그 일 이후로 태호의 행동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예상보다 몇 배는 더 나아진 태도의 태호가 낯설기까지 했다. 아이들이 전담실에 간 사이에 비워두고는 일을 하다가 버리는 걸 깜빡했던 교실 구석의 쓰레기봉투를 본 태호는 '선생님, 이거 버리는 거 맞죠? 제가 버리고 올게요.' 하며 생색도 내지 않고 선뜻 쓰레기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뿐일까? 귀여움에 비례하여 나를 힘들게 하는 몇 어린이들의 행동에 하도 기가 차서 웃던 어느 날엔가는 허탈하게 웃는 나를 보며 미소 짓는 태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태호가 내게 던진 말, '선생님, 애들이 참 그렇죠?'. 그런 태호 때문에 놀라는 순간이 점점 많아졌다. 수업에 참여하는 태도는 물론, 친구들 사이에서도 많이 참고 양보하며 노력하는 태호. 태호 때문에 나는 새롭고도 신선한 종류의 충격을 느꼈다.


    정신없이 수업을 마무리하고, 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빈 교실에서 하루를 가만히 상기하던 중 나는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몸이 커도, 또래보다 다소 성숙한 모습을 보여도 태호가 아직은 어린이기에 이런 변화가 가능했다는 걸. 아버지의 당부와, 아버지께서 전했을지, 전하지 않았을지 모르는 태호에 대한 나의 마음도 물론 중요했겠지만 태호가 어린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는 걸. 이렇게 어린 태호를 속단하고,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마음으로 버거워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말랑말랑, 고마운 너희들


    아이들이 좋은 이유는 수 백, 수 천 가지도 더 만들 수 있지만, 태호 덕분에 나는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중 제일가는 이유는 바로 아이들이 가진 '회복탄력성'이라는 사실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상처받아도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용감해질 수 있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내게 기쁨 슬픔은 물론, 깨달음까지 준다는 사실은 그저 미덥고 감사한 명제이다.


    오늘도 여러 번 실패하고, 여러 번 헤매고, 여러 번 갈등하는 아이들을 보는 내 머릿속엔 왠지 모르게 세상 가장 말랑말랑하고 통통 튀는 스펀지볼이 떠오른다. 우리 교실엔 각양각색으로 통통 튀는 21개의 스펀지볼이 있다. 비유하자면 태호는, 가장 아래로 침잠했다가도 얼마든지 높게도 떠오를 수 있는 '슈퍼 통통 스펀지볼'일 거다. 태호가 아버지의 사랑과 믿음으로 더 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튀어 오르며 저만의 말랑말랑한 특성을 마음껏 뽐냈으면 좋겠다. 아무리 바빠도 다음 주에는 꼭 태호의 아버지에게 이토록 멋진 태호에 대한 이야기와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전화기를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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