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빨간 벙어리 장갑
첫인상은 사람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는다.
광주 고적 답사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깔끔하게 정리된 짧은 머리와 오똑한 코, 그리고 턱까지 길게 기른 구렛나루는 마치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남자 주인공 같았다. 다른 선배나 동기 남자친구들의 후줄그레한 모습을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깎은 밤톨 같이 흠잡을 데 없는 매끈한 그의 외모는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당연히 눈에 띄었다. 그렇게 완벽해 보이는 그에게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아우라가 있었다. 그런 그에게 말을 거는 것은 왠지 부담스러웠다.
그는 후배들 사이에서 ‘장비’라 불렸다. 삼국지의 장비처럼 털이 많고, 힘이 세 보인다는 이유였다. 그의 진한 구렛나루와 날카로운 눈빛은 쉽게 타협하지 않는 강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처음에는 외모로만 그를 판단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외모와는 전혀 다른 따뜻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후배들에게도 늘 친절했고, 밥 잘 사주는 선배로도 소문이 나 있었다. 학과 행사에는 두 팔 걷어붙이고 앞장서서 일했고 교수님 연구실을 꿰차고 공부할 만큼 교수님의 신망도 두터운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내가 처음에 가졌던 인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강한 외모 뒤에 숨겨진 따뜻한 마음을 알게 되면서, 나는 점점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
우리 학년에는 유난히 예쁜 여자애들이 많았다. 얼굴도 예쁘고 키도 크고 날씬해서 미스코리아에 출전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매력적인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옷도 세련되게 입었고 액세서리 하나만 걸쳐도 빛이 나는 친구들이었다. 매일 청바지만 입고 다니는 나랑은 비교 자체가 안 되었다.
그런데 그 많은 여자 애들 중에 그는 유독 나를 찍었다. 내가 생각해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감히 범접하지 못할 것 같은 그에게 내가 눈에 띌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3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천안으로 교생실습 갔던 그에게서 편지가 왔다. 어떻게 우리집 주소를 알았는지 의아했다. 왜 나한테 편지를 보냈는지 이해가 안되었다. 편지에는 자취하는 고충과 교생실습 하는 경험담, 그리고 3학년이 되었으니 청바지 그만 입고 치마 좀 입고 다니라는 내용이었다. 그에게 받은 최초의 편지였다. 이 편지를 받고 나는 황당했다. 아무 사이도 아닌 나한테 왜 청바지를 입으라 마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그는 나한테 이미 마음을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후로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되었고, 나는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더 행복해졌다. 그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앞으로도 함께 걸어가고 싶다. 첫인상이 아무리 강렬해도, 진정한 사랑은 그 너머에 있다는 것을, 나는 그와 함께하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가 사귀기 시작하던 1984년에 나는 대학 3학년, 그는 졸업 한 학기를 남겨두고 있었다. ‘2말 3초’, 즉 2학년 말이나 3학년 초에 연애를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 우리는 ‘3말’이라는 조금 늦은 시기에 만남을 시작했다.
그를 만나기 전부터 나와 친구들은 수업이 끝나면 늘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에서 과제도 하고 수다도 떨면서 매일 도서관 도장 찍기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지은 별명이 ‘골빈당’과 ‘도서관 주변학파’였다. 도서관에는 매일 가지만 머리는 늘 비어 있다는 뜻의 골빈당과 도서관 주변을 항상 맴돈다고 해서 스스로 붙인 이름이었다. 이처럼 도서관은 공부하는 공간을 넘어, 우리의 일상이자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도서관 4층 자유열람실에서 늘 마주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않아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도서관에서 데이트를 할 수 있었다.
그 해는 유난히 첫눈이 늦게 내렸다.
12월이 한창 깊어가던 그 날도 역시 첫눈은 내리지 않았다. 첫눈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설레던 그 시절, 우리는 첫눈이 왜 그리도 기다려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첫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겨울이 왔음을 실감하며 기뻐하던 순수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보다도 그는 더 간절히 첫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르고 그해의 첫눈은 왜 그리 더디 오던지. 기다리다 지친 그가 어느 날 도서관에서 나를 불러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선물을 건네주었다. 포장을 뜯어보니 빨간 벙어리장갑과 가죽 장갑이 들어있었다.
“첫눈 오는 날 주려고 했는데 첫눈이 안 오네.”
라며 그는 멋쩍게 웃었다.
좋아하던 빨간 벙어리장갑을 잃어버렸다고 얼마 전에 얘기했던 것 같다. 그가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장갑을 살까 봐 첫눈을 기다리지 않고 주는 것이라고 했다. 참 따뜻한 남자다. 내 말 한마디 한마디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감동이었다. 나는 이 장갑을 구멍이 날 때까지 끼고 다녔다. 장갑을 끼고 있으면 언제나 그의 마음이 느껴졌고, 그래서 더 애착이 갔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해 겨울의 첫눈이 언제 내렸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그가 내게 건넸던 따뜻한 장갑과 그 순간의 설렘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겨울이 되면 문득 그때의 우리가 떠오르고, 그해의 늦은 첫눈과 그의 따뜻하고 섬세한 마음이 나를 미소 짓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