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eeding (4)
출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도, 지하철에 타면서도, 역에서 내려 회사까지 걸으면서도 다른 세계에 와있는 느낌이었다. 흡사 이인증이 있는 사람처럼 스스로가 이질적으로 느껴져 계속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이상한 기분은 어제 저녁부터 계속되고 있다.
컴컴한 옥상정원에서 사귀자는 말에 얼이 빠져있는 나에게 무언가 장황하게 덧붙이며 고백의 이유를 설명하던 김동현은 내가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자 나를 여러 번 부르는 것 같았다. 일터에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할 정도로 나를 우습게 보고 있었나 하는 모욕감과 늘 나를 무시해왔던 그의 태도에 대한 불쾌감, 게다가 외모도 능력도 재력도 아무것도 없이 자신만만한 멍청한 꼴이 황당해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뻔했던 욕지거리를 참느라 나는 이미 포화상태였다.
“조금 갑작스러웠나요? 시간을 조금 드릴…….”
“아뇨.”
“네?”
의외로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알아듣지 못한 김동현이 멍청하게 되묻는다. 나는 이제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됐다고요. 저는 김동현씨랑 사귈 생각 없다고요.”
“네? 아니 왜.......”
김동현은 내가 거절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왜 그렇게까지 자신감에 차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저는 김동현씨 좋아하지도 않고 여지 준 적도 없어요. 그리고 회사에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예의도 없는 고백은 불쾌하죠.”
사무적이고 딱딱한 말투로 칼같이 거절하는 나를 멍하니 쳐다보던 김동현은 당황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럼 제가 다시…….”
“아뇨..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잖아요. 앞으로 다시는 그런 말 꺼내지 말아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쌩하니 옥상정원을 벗어났다. 더러운 기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집에 도착해 친구와 통화하며 욕지거리를 지껄일 때도 꼭 구역질이 날 것처럼 불쾌하고 역겨운 기분이었다. 그나마 자기 전 샤워를 마친 후에야 겨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누가 봤으면 어떡하지? 나는 결국 김동현이 내게 사귀자고 하자마자 발아래 땅이 꺼지며 끝도 없이 암흑 속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어제처럼 주목하는 시선들을 여럿 느끼며 출근한 나는 내 의자에 주저앉듯 늘어졌다. 출근한 지 오 분도 안 됐는데 벌써 피곤하다.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쉰다. 썩어버린 내장의 냄새가 입 밖으로 나오는 것 같이 느껴진다. 나는 순간 검은 숨을 내뿜는 스스로를 상상했다.
힘없이 컴퓨터를 켜고 사내 메신저에 로그인하고 메일함을 확인했다. 메일함은 텅 비어있다. 어제 쓰다 만 기획서 파일을 열었다. 모니터 앞에 둔 노란 고양이 피규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는데 메신저 알림이 모니터에서 깜빡거린다. 알림 사인을 봤을 때부터 두근거리던 심장은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조금 누그러졌다. 김대리님. 지금 탕비실에서 잠깐 보자. 나만 따로 불러내는 게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무슨 일이 있나보다 하고 대각선에 있는 김대리님 자리를 흘끗 넘겨다보았다. 대리님은 벌써 자리를 벗어나 탕비실로 향하고 있었다.
“지현씨.”
평소답지 않게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대리님의 모습은 아주 낯설었다.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그나마 나를 챙겨주던 김대리님이었다. 늘 무뚝뚝한 말투지만 첫 출근날 업무를 설명해주었던 것도, 승진턱을 쏘겠다며 나를 데리고 스테이크를 먹으러 갔던 것도 그였다. 어제 회사에서 모두가 나를 보고 수군거릴 때도 평소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심 그를 믿을만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찌푸려진 그의 미간과 불만스럽게 내려간 입,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두드리는 구두소리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네. 대리님.”
내가 뭔가 잘못한 걸까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어제까지 아무 일 없었는데 갑자기 오늘 아침에 불러낼 이유가 있을리 만무했다.
“어제 저녁에 김동현씨랑 무슨 얘기 했어?”
아뿔싸. 누가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잠시 스쳤던 걱정이 현실로 다가오고 말았다. 하필 같은 팀 팀원에게 들키다니 재수가 없었다.
“별 얘기는 아니었는데…….”
“동현씨가 사귀자고 했다며?”
지나치게 정확한 정보였다. 그 출처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분명히 나와 김동현 말고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행실을 어떻게 했길래 그래?”
상상해본 적 없는 김대리의 신경질 섞인 날카로운 목소리가 비수처럼 귀에 꽂혔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출근하면서 느꼈던 이질감이 다시 강하게 밀려왔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꼬리를 어떻게 쳤길래 동현씨가 고백을 하냐고. 그래놓고 거절했다며?”
갑자기 귓가에 백색소음같은 자잘한 소리가 깔렸다. 그리고 곧 고막부터 귓바퀴까지 모두 공기방울에 싸인 것처럼 들리던 소리가 전부 빨려나가듯 사라졌다. 그리고 곧 귀를 찌르는 통증과 삑-하는 날카로운 소리. 나는 반사적으로 양쪽 귀를 꽉 틀어막았다. 흔들리는 시야로 짜증스러운 김대리의 얼굴이 보였다.
“꼬리친 적 없어요.”
귀의 통증은 성가시게 고막 한가운데를 쿡쿡 찔렀다. 양쪽 귀를 막은 손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효과가 있기를 바라면서 손끝에 더 힘을 주었다.
“그거 때문에 보자고 하신 거에요?
김대리는 화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꼭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왜 겨우 김동현 같이 내게는 별 가치도 없는 사람 때문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이것이 모두 꿈이기를 바랄뿐이었다.
“김동현씨 좋아하세요?”
김대리는 또다시 입을 꼭 다물었다. 다만 이번에는 내 눈을 살짝 피했다. 무언의 긍정이라는 게 이런 거겠지.
고막을 찢을 것 처럼 격렬하던 통증과 높은 피치의 소리가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이제야 조금 정신이 든다. 흐릿하던 머리가 조금씩 개는 것 같다. 눈앞의 김대리가 아까보다 더 또렷하게 보인다. 짜증과 화, 수치심이 뒤죽박죽 섞인 흥분한 얼굴.
“저는 김동현씨 싫어해요.”
나는 미련없이 휴게실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