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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대끼는 삶 Sep 10. 2024

인간에게 부대끼는 삶

힘들게 취직을 한 조카에게 “어떠냐? 회사 생활은 재미있냐?”라고 가볍게 인사치레로 물었는데 “일은 힘들지 않은데 사람이 힘들다.”는 무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살아온 과정에서 사람에 치이고 고생했던 일이 순간적으로 주마등처럼 지나갔지만 이내 평정심을 유지하고, 씻나락 까먹는 흰소리를 했다. “조직이란 다 그런 거니, 그만둘 생각 말고 삼 년은 고생해라.” 조카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삼촌 말에 감동하여 삼 년을 버틸 자세를 가다듬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자연은 먹고살라고 짓누르고, 사회는 싸워서 이겨라고 몰아붙이는데, 옆에 있는 사람조차 위로나 힘이 되기는커녕 못 잡아먹어서 안달을 부리면,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다. 자연과 사회는 소위 룰(rule)이라는 것이 있어서 헤쳐 나갈 길이 보이기도 하지만, 사람에 치일 때는 자유의지란 것을 가진 사람의 속성 때문에 어디로 어떻게 들어올지 몰라 더욱 힘들다. 인륜이나 사회규범에는 도망갈 길이라도 있지만, 개인으로부터는 달아날 길이 없어 속수무책 당하기 일쑤다. 특히 안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서 있으면서, 밖으로는 온화한 얼굴에 따뜻한 말로 비수를 찔러오면 피할 길이 없다. 또는 “예! 예!” 하였는데, 어느 순간 돌아서서 칼을 들이미는 개인을 만나면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는 관계가 된다. 


사람에 부대끼는 관계를 보면 대부분 동등하지 않다. 어느 한쪽이 우월한 위치에 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가족사회도 그렇고, 목적을 같이하며 선택한 회사도 엄연히 지배•피지배 관계가 작동한다. 협동사회라고 해서 지배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게 더 강하게 작동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의 키부츠나 옛날 소련의 콜로즈, 우리나라 안에 있는 여러 종교 공동체 마을 등에서 협동 사회의 절대적 지배 관계를 잘 볼 수 있다.      


사람에 부대끼는 경우는 대부분 올바른 자리에 머물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발생한다. 국가 권력자는 국민이 위임해 준 권력으로 자신과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 진심이고, 다른 국민이 해를 입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장은 직원이 제공한 노동은 못 본 체하고 월급 주는 것만 앞에 내세우며, 속으로 자신의 공적에 만족한다. 가장은 설익은 권력으로 말과 힘으로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자신은 항상 옳다고 주장한다.


우리말은 존칭이 다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언어생활 속에서도 지배관계를 체득하면서 지낸다. 아줌마나 아저씨라고 부르면 혼나고, 여사란 말을 빼면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몰리기도 한다. 서양 문화에선 젊은이와 노인네가 평어로 동등하게 대화하는 것이 낯설지 않다.         


사람 관계가 모두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숨을 쉬면서 살아갈 수 있다.  

    

신입 사원이 상사를 잘 만나서 평생의 경력을 좋게 가꾸는 기반을 만들기도 한다. 한 명의 스승이 많은 인재를 길러서 나라를 구하기도 한다. 국가지도자는 모든 국민의 삶을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하지는 못해도, 정서적으로 편안하게 덜 부대끼게 만들 수는 있다. 그러면 풍요롭게 살지는 못해도 평온하게 살 수는 있다.      

국경을 가리지 않고 힘든 환경에서 진료하는 의사도 있고, 가진 돈을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데 사용하도록 모두 내어놓는 부자도 있다.      

자신이 가진 전문지식과 시간을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기꺼이 내어놓는 무료 상담가나 공익봉사자도 있고, 국민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는 공무 의식이 충실한 공무원도 있다.         

낯 모르는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같이 마음 아파하는 사람도 있고,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의 큰 수고를 들어주기 위해 자신이 조금 수고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      

백지장을 맞드는 가족이나 동료도 있고, 강남까지 같이 가는 친구도 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궂은일도 마다치 않는 부모도 있고, 갖은 어려움을 같이 헤쳐 나가며 서로 버팀목이 되어 주는 동반자도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소시오패스의 기질도 없고, 그렇다고 가진 것을 베푸는 여유와 아량도 없는 평범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덜 부대끼면서 살 수 있을까? 소시오패스와 봉사자는 진심이기 때문에 애는 쓰지만 부대끼지는 않을 것 같다.      

윤리와 도덕은 자신이 선택하여 피할 수 있는 항목이니, 몸에 밴 사항은 힘들지 않게 따르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가능하면 자리를 만들지 않거나 피하는 것이 좋다. 웃어른을 공경하지도 않는데, 힘들게 자리를 같이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여러 명이 의논하여 선택하여야 하는 사항은 굳이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더라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부대끼지 않고 마음고생을 덜 하는 길이다. 마! 대세에 지장이 없으면 무조건 양보하는 것이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데, 중식이면 어떻고 한식이면 어떠랴? 하지만 중식 알레르기가 있으면 한식을 관철하여야 하겠지만,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 서로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면 더 좋고.      

그리고 자신이 경제적이든 어떤 면에서든 조금이라도 나은 상태에 있다면, 사소한 것이라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좋다. 가성비 좋은 식당에서는 카드 대신에 현금으로 결제하고, 다른 사람이 이룬 성취나 좋은 물품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칭찬하는 것이 좋다. 그만큼 나는 마음의 여유가 있으니까. 상대가 자신이 겪은 억울함을 호소할 때도 끝까지 들어주는 배려가 말을 끊는 것보다 덜 부대끼게 한다. 그만큼 나는 여유가 있으니까.

     

성현의 반열에 드는 공자는 50세에 하늘의 뜻까지 알았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지경에 이르는 데는 20년이나 더 걸렸다고 한다. 그러니 필부가 부대끼지 않는 살이를 죽기 전에 하루라도 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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