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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성의 생각 Sep 23. 2024

6.2 - 넘쳐나는 ‘넘’ 이야기

6 - ‘나’ 빼앗는 이야기 투쟁



나는 이 신화들이 시대를 휘어잡는 권력을 다소 잃어버리긴 했으나,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이 ‘넘’의 이야기들은 파편화된 상태로 각축을 벌이며 현존하고 있다. 내 존재와 의미를 규정하는 이야기들의 패권 다툼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개인들은 여전히 ‘저 이야기들 속 어딘가에 진정한 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는 형편이다. 영원히 반복되는 허무의 신화들이다.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 대신 성별과 인종이 새로운 진영으로 등장했다. 자세히 파고들수록 이 외에도 수많은 ‘진영’들이 발견된다. 게다가 자본주의 체제는 패권을 차지한 대신, 기존의 기술을 극대화한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켜 기성의 부조리를 빈틈없이 확대해 나가고 있다. 매체의 등장은 대중을 생산했고, 매체의 진보는 대중을 세분하고 ‘개인’이 존재할 만한 조금의 틈새조차 허용되지 않도록 팽창하고 있다. 이야기들은 더욱 치열하게 ‘나’를 제압하고 ‘내가 아닌 것’을 ‘나’인 것처럼 꾸며내도록 유도하며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의 발전은 내가 속한 ‘종’에 대한 회의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다.


누군가는 ChatGPT 같은 생성형 AI가 아직 챗봇 수준밖에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기술이 야기하는 변화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GPT-4의 API 공개 이후, 이미 각 업계 최전선에서는 ‘OpenAI의 플러그인을 도입할 것인가(편입될 것인가) 아니면 도태될 것인가’의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발 빠른 업계는 이미 작업을 끝내고도 남았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 노동을 이미 AI가 더 잘 수행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자동화 생산을 끝판왕인 로봇 기술 역시 특이점에 근접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인공지능이 탑재된 휴머노이드가 웬만한 대한민국 청년들의 초봉에 가까운 가격으로 노동 시장에 진입하려 하는 형국이다. 인공지능과 인간형 로봇의 등장은 이 자본주의가 패권을 장악한 시대 속에서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세기말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사진: Unsplash의 Andrea De Santis



세계대전 이후 다시는 뜨거운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 역시 착각으로 드러났다. 대한민국에 사는 나에게 그게 뭘 그리 대수냐는 생각 또한 가능하기에 굳이 언급하자면, 아직 우리나라도 엄밀히 따지면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한국 남성들은 여전히 심신에 문제없는 ‘개체’들은 1년이 넘는 젊음을 이 전쟁이라는 현상 때문에 빼앗겨야 한다. 여차하면, 한국 남성들만의 문제가 아닌 상황도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과거에는 이런 ‘넘’의 이야기들이 큼지막한 덩이로 하나둘 쯤 유행하며 요란법석을 떨었는데, 이제는 이 모든 것들이 파편화된 방식으로 각축을 벌이며 심지어 서로 섞여 들며 혼란을 가중하고 있다. 그 속에서 개인은 ‘대체 나는 어떤 이야기 속에 있는 것인지’, 헷갈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세상은 더욱더 이해하기 힘든 곳이 되어 있다. ‘무엇이 꿈인지’, ‘무엇이 현실인지’ 알 수 없고, 이런 말들의 의미조차 점점 흐릿해져 간다.


그러나 이런 세기말적인 퇴색도 문제의 심화일 뿐, 문제의 근본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를 규정하려는 ‘넘’들의 이야기가 넘쳐나고, 그 속에서는 도저히 ‘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일 뿐이다. 결국 저 ‘넘의 이야기’들은 다 몰아적인 환원주의를 표방하는 장르다. ‘나’라는 존재는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될 수밖에 없다. 나를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뿐이다. ‘나’를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나의 신화’다. ‘나’를 얻기 위해 쓰러뜨려야 할 신 역시 나 자신 이외에 존재할 수 없고, 내가 획득해야 할 신성은 오로지 단단한 ‘아성’ 일 따름이다.



사진: Unsplash의 Vladimir Solomianyi



개인적인 생각으로 우리 시대에 넘쳐나는 이 어지러운 신화들을 다 요약하고 정리해 버리고 싶다. 이 신화들도 내 존재를 요약하려 드는데, 감히 내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일까? 나는 이 시대의 신화들이 결국 돈과 타인으로 축소되려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속에서 타인도 결국 돈으로 축소되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돈’이라는 신을 비신화화하면, 그곳에 있는 것은 ‘나-너’ 구분이 무너진 채 존재하는 ‘정신적인’ 결합쌍생아들이다. 신체적인 장애로서의 결합쌍생아들조차 정신이 온전하다면, ‘내가 나라는 것’, ‘네가 너라는 것’을 착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돈’이라는 ‘장치적 신’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몸을 가진 채 몰아적인 흙덩이로 전락한다. 참으로 심대한 아이러니는 이 ‘정신적인 결합쌍생아’들의 몰아적인 특성 때문에 우리가 앓게 되는 마음의 병은 오히려 ‘해리성 인격 장애’에 근접하게 된다.


돈이 이 ‘나-너 복합체’를 신화화하는 구조가 그리 치밀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조악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정신만 차리고 보면, 누구라도 그 구조를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나는 타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타인이 원하는-내가 원치 않는 행동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타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타인은 그 대가로 나에게 돈을 지불하고, 나는 그 돈을 통해서 타인에게 내 니즈를 충족시켜 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사실 인간은 태생적으로 타인에 대한 의존을 통해 생존하기 때문에, ‘나’와 ‘너’의 관계는 그 자체로 경쟁적인 것도, 대립적인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협조적인 관계에 가깝다. ‘돈’이란 결국 이 ‘협조 관계’에 ‘금’과 ‘종이’와 ‘기름’과 ‘숫자’라는 매개변수와 기호를 덮어씌운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협조 관계가 순순히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폭력 때문에, 타‘인’은 결국 수치화된 물성 이외의 성격을 상실하게 된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타인이기에 나 역시 숫자로 표현되는 상품성 말고는 무의미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이야기와 이야기로 환원될 수 있다. 그리고 이 타자는 곧 축소되기도 하고 확대되기도 하는 ‘나 이외의 세상’이다. 세상은 ‘나’를 풍화시켜 자신의 이야기가 진실의 전부인 양 담아 내려할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기는 ‘나’는 오로지 발목까지도 안 되는 극히 ‘일부분’ 일뿐이다. 단지 첨벙거리는 것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따로 있을까. 결국엔 ‘나라는 존재’의 코어는 ‘나라는 그릇’이 아니면 담아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는 타인’ 역시 돈이든, 뭐든, 내가 아닌 것들을 품을 때, 그것들을 극히 일부분으로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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