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지성의 생각 Sep 23. 2024

6.3 - 니체적인 회귀물

6 - ‘나’ 빼앗는 이야기 투쟁



이렇게 보면, 세상 이야기도 내 이야기도 절반은 내가 쓰는 이야기다. 앞서 나열했던 영원히 반복되는 실패의 역사는 결국, 세상과 내가 서로 ‘전부 해석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다투는 윤회의 이야기인 것이다. 내가 이 번뇌의 멍에를 벗어던진다고 하여도, 세상은 나를 향한 해석의 투쟁으로 계속 도전해 올 것이다. 따라서 나는 부단히도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굳은 결의로 저항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다. 니체는 ‘신’과 ‘저세상’의 이야기 속에서 ‘나의 현생’을 환원시키는 모든 시도를 과감히 부정했던 사상가다. 그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란 결국 ‘나에의 의지’다. ‘현생의 나’를 압살 하려는 모든 의지에 저항하는 힘, 결국 나 자신으로 존재하겠다는 의지, 이 제한된 삶 속에서 나의 의미를 나만의 것으로 경외하겠다는 굳건한 신앙이다. 남들이 말하는 ‘인간의 상’을 끊임없이 뛰어넘고, 어제보다 오늘 더 나답게 살 수 있도록 몸부림치기 위한 힘과 의지다.


니체는 이 ‘힘에의 의지’야 말로 세상 모든 존재의 처지를 이해하는 단서라고 생각했다. 식물의 생애마저 이 ‘힘에의 의지’로 이해할 수 있다. 식물은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껍데기를 뚫고 싹을 틔워 내야 한다. 나를 방해하는 이 씨앗 껍데기의 저항을 이겨내고서 ‘나 자신’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씨앗을 극복하고 나니, 씨앗을 둘러싼 토양이 새롭게 저항하는 의지를 부딪혀 온다. 식물은 또다시 ‘나’로 존재하기 위해, 그 토양을 극복해야 한다. 토양을 극복하고 나면, 가까스로 틔워 낸 싹은 짐승들의 발자국과 아가리를 견뎌 내며, 꽃과 열매를 피워야 하는 것이다. 저항과 극복과 새로운 저항과 새로운 극복이 ‘내’가 도착하기만을 영원히 기다리는 것이다.


니체가 말년에 마부의 채찍질 때문에 울부짖는 말을 부둥켜안고 그 자리에서 통곡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에피소드의 함의를 읽는 코드 역시 ‘힘에의 의지’에 있다. 니체가 울부짖는 말을 보며 느꼈던 연민의 정체는 아마, 착취자와 착취 대상의 동일성이었을 것이다. 말을 때리는 마부도, 그것을 견디며 일하는 말도, 그저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수많은 ‘나’들 일뿐이다. 이 이야기에서 고삐 속에 갇혀 있는 말은 니체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개인의 운명일 따름이다. 결국 나를 억누르는 들도, 저항하는 도 같은 처치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비극적인 이야기처럼 들린다. 서로가 서로에게 지옥일 수밖에 없다는 말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씁쓸한 이야기다. 하지만 니체는 모든 ‘말’들에게 이러한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주문한다. 그 운명이 나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만이 내가 있을 수 있고, 그 속에 있는 것만이 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 내는 이야기만이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진: Unsplash의 Josephine Amalie Paysen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웹소설 장르 중에 회귀물이라는 장르가 있다. 다소 오락적인 장르이지만 그 속에도 나름 소설로서의 실험적인 기능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회귀물’은 마치 실존주의 철학처럼 ‘한계 상황’과 ‘죽음의 선취’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회귀물’ 장르에 속하는 소설들은 아예 시작부터 느닷없이 죽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들이다. 죽음 이후의 회귀 시점은 다양하다. 처음부터 삶을 시작한다거나, 아예 다른 사람의 삶 속에 들어간다거나, 죽기 며칠 전, 몇 달 전, 몇 년 전으로 돌아가 삶을 다시 시작한다. 하지만 이렇게 얻은 삶을 과연 연장된 삶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생각하기 나름이다. 결국엔 죽음으로 내 이야기가 한 번 끝났기 때문이다. 확정된 하나의 결말을 앞두고, 다른 결말은 어땠을지 상상해 보는 이야기다.


작가마다 이 ‘회귀물’이라는 장르를 빌어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다양하다. 하지만 결국 죽음을 한계로 인식하고,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한다는 전개는 거의 공식에 가깝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나는 이런 ‘회귀물’의 원조 역시 니체라고 생각한다. 니체가 ‘회귀’ 장르의 소설을 쓴 것은 아니지만, 니체는 사상에는 영원 회귀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그것은 내 이야기가 끝없이 연장되는 커다란 이야기의 일부는 아닐지언정, 죽음으로 끝나는 ‘숏폼’ 같은 한정된 생애 속에서 나에게 가능성으로 주어진 최선의 의미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다. 어떤 운명 속에서도 결국에는 나다웠던 삶의 이야기, 그것을 긍정하기 위한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 회귀’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명령과도 연결되는 개념이다. 죽음 너머에 있는 삶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회귀의 생애’라고 생각해 보자.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반복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삶일지언정, 그 속에서 의미를 느끼며 다시 한번 살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니체의 질문인 것이다. 영원히 똑같이 반복되더라도 다시 그 삶을 긍정하며, 오케이, 렛츠 두 잇 어게인.”하며 살법한 그런 삶을 바로 지금부터 살자는 것이다.


결국 죽음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 어렵더라도 내가 사는 지금 ‘이 순간’, 죽음 이후 회귀라도 한번 해야 비로소 되찾을 것만 같은 ‘나다운 나 자신’으로, 매 순간 ‘나답게 살라’는 것이다. 이는 한동안 유행했던 ‘욜로족’의 라이프스타일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카르페 디엠’이다. 통념상 ‘욜로족’들 역시 삶의 일회성을 강조하며, 현재를 낭비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통하는 면도 있다. 하지만 ‘욜로’의 삶은 내일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태도가 부족하다. 여기서 ‘내일’이란,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말 내 이야기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 ‘영원한 회귀물’이라는 장르는 오히려 제한적인 인생을 전체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매 순간의 책임감 있는 선택을 촉구하는 이야기다.


사진: Unsplash의 Céline Haeberly


결론적으로 ‘나’는 내 바깥 세계 속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 내 밖에서 발견되는 ‘나 자신’은 극히 표층적인 일부이고, 나의 ‘조각’ 일뿐이다. 나라는 존재의 저자는 결국 자신이며, 내 이야기는 끊임없이 ‘내가 되기로 한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부딪혀 오는 온갖 저항들을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다. 그리고 내 속에 담길 세상과 타인들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타인들이 나에게 ‘돈’으로 부딪치든지, ‘조롱’이나 ‘질투’로 부딪치든지 말이다. 이것은 ‘나’와 ‘너’를 구분하는 일이며, 동시에 ‘너’ 또한 또 한 명의 ‘나’ 일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하는 일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의 이야기와 같은 것이며, 모든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의 이념과 그렇기에 모든 구분이 동등하게 가치 있다는 유식의 이념과도 같은 것이다.


세상은 지금도 ‘나’의 의미를 빼앗기 위해, 변형된 혼종 신화를 제시하며 도전해 오고 있다. 파편화된  신화들은 이전보다 더 강력한 위세로 ‘나라는 존재’를 혼비백산하도록 만들 것이다.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신기술 역시 전례 없는 방식으로 ‘나’를 궁지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의 이야기다. 내 존재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어야 한다. 내가 아닌 것들은 끊임없이 ‘나’를 규명하고 해석하려들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내 이야기’ 속에서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향해’ 꿈틀대야 한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시점에 내 이야기가 막을 내린다고 하여도, 바로 그 순간 완성된 나의 의미를 영원토록 음미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_ <숫따니빠따> 13, 무소뿔의 경

매거진의 이전글 6.2 - 넘쳐나는 ‘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