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면이인을 찾아서
한동안 나는 대화창에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정적을 깬 것은, 자신의 ‘도플갱어’가 SNS에서 활동 중이라는 ‘돈나무숲속의왕자’-줄여서, 돈나무왕자-의 주장 때문이었다.
보험회사 직원이었던 그는 회사가 고객 맞춤형 보험 설계 서비스에 AI 최적화 모델을 도입하면서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그는 퇴직금과 기본 소득에 의존하며 생활해 온 모양이었다. 그는 얼마간 A.X.A의 매칭 기능을 활용한 단기적인 연애의 반복을 보람 삼아 지내 왔다고 했다. 그러던 중, A.X.A에서 자신과 똑같은 얼굴의 ‘도플갱어’를 목격한 것이다. 이 때문인지 그는 이 ‘괴 현상’을 규명하는 데 각별한 열의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풋살여제배정희’-줄여서, 풋살여제-도 채팅창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돈나무왕자 만큼 ‘괴 현상 규명’에 열정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른 참여자들에 비하면 그녀 역시 주기적으로 응답하며 성실히 대화에 참여하는 편이었다.
나는 ‘돈나무왕자와 비슷한 경험을 했노라’라는 말을 첫 마디로 대화를 시작했다. 돈나무왕자는 다소 흥분한 것처럼 반응했는데, 급기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 보자’는 공격적인 제안마저 서슴없이 해 온 것이었다. 나는 일이 커지는 듯한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소희가 ‘재밌겠다’며 ‘어려운 일도 아니니, 제발 한 번만 만나보면 안 되겠냐’ 보채는 바람에 결국 이 석연찮은 일에 발을 들이밀고 말았다.
그동안 ‘동면이인을 찾아서’-줄여서, 동면이인-가 오프라인에서 직접 모임을 가진 적은 없었다는 것 같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체 어떤 할 일 없는 성인들이 진지한 태도로 ‘도플갱어’를 파헤치는 일 따위에 체력과 시간을 낭비한단 말인가. 나는 이 또한 ‘자동화 혁신’이 불러온 사회적 병폐의 일환이겠거니 생각했다.
실제로 동면이인의 대화창에는 분명 이 세 사람-나, 돈나무왕자, 풋살여제 등- 이외에도 다른 참여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활발하게 대화를 나누는 참여자는 단 세 명뿐이었고, 자연스럽게 ‘모임’ 역시 세 사람만의 이벤트가 되었다.
모임의 장소를 선정한 것은 ‘풋살여제’였다. 그녀는 세 사람의 거주지의 지리적 중심에 위치한 한 카페를 지목했다. 그녀는 마침 그 카페가 나름 유명한 곳이라며, 언젠가 꼭 들러야겠다는 생각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것 같다. 아마 그녀는 평소에 ‘가 보고 싶은 장소’를 점 찍어두는 유형인 듯했다.
돈나무왕자는 가장 먼저 카페에 도착해 있었다. 내가 도착한 시점이 약속 시간을 기준으로 10여 분 전이었으니, 단순히 ‘부지런’하다고 치부하기에는 꽤 이른 시각부터 도착해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이른 도착’을 ‘부지런함’이나 ‘한가함’ 같은 가상의 ‘평소 모습’과 대조해 보는 일은 역시 과잉 해석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풋살여제가 제안한 드레스 코드-붉은 색 상의- 덕분에 크게 힘들이지 않고 서로를 식별할 수 있었다. 처음에 집을 나설 때에는 ‘파티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드레스 코드씩이나 필요한 걸까’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덕분에 이 사람 저 사람 우스꽝스러운 닉네임을 들먹이며 확인하는 수고를 덜게 되어 오히려 다행이었다.
돈나무왕자는 무엇이 그리도 수줍은지, 첫인사를 나눈 뒤로 몇 분 동안 아무런 대화도 시도하지 않았다. ‘과연 이 사람이 정말 반복적인 단기 연애를 즐길 만큼 사교적인 인물일까?’하는 의문을 들었지만, 이 또한 과도한 해석이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대화의 물꼬를 트는 역할이 결국 나에게 맡겨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도플갱어’를 보셨다는 거죠?”
나는 그가 흠칫하며 살짝 움츠러드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내가 눈치챘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태연한 자세로 돌아와 대답했다.
“에…. 그러니까…. 제가 직접 본 건 아닌데요….”
“A.X.A에서 보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죠, 그렇죠. 뭐….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SNS에서 도플갱어를 만나는 것도 뭐…. 당사자가 된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고….”
분명 처음 만나는 사람이고, 심지어 이름이나 나이조차 모르는 사이였지만, 나는 지금까지 이 사람과 기꺼이 대화를 나눠 왔을 모든 이웃들의 인류애를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보험 일’은 어떻게 해 왔으며, ‘반복적인 단기 연애’는 어떻게 해 왔던 것일까.
“네, 분명 저한테 그렇게 말씀 하셨죠.”
나는 이어서 말했다.
“돈나무왕자 님 맞죠? 채팅방에서 이야기하실 때는 조금 더 활발하셨던 것 같은데….”
“아, 그런가요…. 근데 제가 돈나무왕자가 아니라, 돈나무숲속의왕자인데….”
나는 요점을 벗어난 그의 집착을 가볍게 무시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실례가 안 된다면, SNS에서 발견했다는 ‘도플갱어’를 좀 확인해볼 수 있을까요?”
“혹시…. 지금 못 믿으시는 거….”
아무래도 답답한 성미에 비하면, 눈치를 많이 보는 남자인 듯했다.
“그렇다기보다는 아무래도 신기한 일이잖아요. 저도 똑같은 입장이지만, 어리둥절한 심경인걸요.”
그는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계정으로 접속 중인 A.X.A의 화면을 내밀어 보여주었다.
“이게 제 껀데요….”
그가 손가락을 몇 번 놀린 후, 또 다른 계정을 화면 위에 띄워주었다.
“이게 그 ‘도플갱어’거든요….”
“‘도플갱어’라….”
나는 짧은 시간이나마 눈앞에 있는 인물과 화면 속 인물들을 대조하며 유심히 관찰했다. 확실히 화면 속 인물은 처음 보여준 계정의 프로필과 똑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저기…. 제가 무슨 실수라도….”
돈나무왕자는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깊어진 의문 때문에 미간에 조금 힘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안심해도 좋다는 뜻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내 휴대폰 화면에도 ‘그놈’의 계정을 띄워 그에게 보여주었다.
“돈나무 님도 역시 저랑 똑같은 상황인가 보네요. 저도 며칠 전에 우연히 발견했는데…. 이게 정말 ‘도플갱어’란 걸까요?”
“이름이…. 더 줄어 들었는데….”
나는 ‘도플갱어’에 관한 그의 견해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는 이 상황에 진지하게 몰입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붉은 원피스를 입은 처음 보는 여자가 끼어들며 말했다.
“우와, 저도 볼래요!”
풋살여제였다. 약속된 시간에 딱 맞춘 아슬아슬한 도착이었다. 돈나무왕자와 독대하고 있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녀의 적당히 화려한 원피스를 보니, ‘드레스 코드 : 레드’는 올리브색 키 컬러로 꾸며진 카페 인테리어와 보색 대비를 맞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똑같이 생겼네요? 우와, 너무 신기해요. 이거 딥페이크 아니에요?”
내 휴대폰과 돈나무왕자의 휴대폰을 두리번거리며 그녀가 말했다.
“풋살여제 님이시죠? 저도 일단은 그쪽 가설에 무게를 두고 있기는 한데, 화질이 좋은 사진들까지도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점이 좀 걸리네요.”
“우와, 방금 좀 탐정 같았어요. 혹시 그런 쪽에 관심 있으세요?”
‘그런 쪽’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예전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서는 ‘관심 있느냐’보다는 ‘종사하고 있냐’는 질문이 더 잘 어울렸을 터였다. 하지만 요즘처럼 ‘직업’에 대한 관념이 ‘관심사’로 대체된 형국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어휘였다.
한편 그녀는 한마디 말을 내뱉을 때마다 꼭 감탄사를 끼워 넣을 만큼 사교적인 성격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돈나무왕자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나는 앞으로의 대화가 조금은 수월해질 것 같다는 안도감 덕분에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아니요, 저는 대학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어요. 직접 겪는 일이다 보니 조금 몰입하게 되네요. 붉은색으로 복장을 통일한 것은 카페 내부 설계 때문이었나요?”
“헉, 어떻게 아셨어요? 마음에 드는 장소에 오면 꼭 사진을 찍거든요. 근데 사서라니 조금 의외네요.”
한편 돈나무는 긴장했는지 쥐 죽은 듯 다시 침묵으로 일관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풋살여제 쪽에 화두를 던졌다.
“그나저나 풋살여제 님도 SNS에서 도플갱어를 발견하셨나요?”
내가 말하면서도 무슨 종교인이나 할 법한 대사였다는 생각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그녀가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보이며 대답했다.
“저는 SNS에서 도플갱어를 만나지는 않았는데, 사람들이 자꾸 저를 닮은 사람을 봤다는 말을 전해줘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A.X.A가 도플갱어를 찾는 모임이 있다고 추천해 주길래, 재밌어 보여서 한 번 들어와 봤어요.”
그녀는 덧붙여 말했다.
“제가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활동하는 것은 맞지만, 사람들이 언급하는 장소들이라는 게, 전부 가 본 적도 없고 딱히 가 보고 싶은 장소들도 아니어서, 그게 너무 이상했거든요. 그러던 중, 두 분이 SNS에서 도플갱어를 만났다는 얘기를 하시길래, 너무 신기해서 한 번 나와본 거죠. 그나저나 이쪽 분이 돈나무숲속의왕자 님이시죠?”
나는 SNS에서 도플갱어를 만났다는 공통 경험의 패턴이 무너진 것 같아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지금은 그저 새로운 정보를 획득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네…. 제가 돈나무숲속의왕자입니다.”
드디어 돈나무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니, 너무 말씀이 없으셔서 처음에는 이분이 돈나무 님인 줄 알았어요. 그러면, 이분은 진기명기 님이시겠네요?”
그녀가 내 쪽으로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네, 맞아요.”
나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 주며, 주머니에서 내가 도서관에서 작성한 ‘그놈’에 관한 메모와 볼펜을 꺼냈다. 그리고 대화의 흐름을 받아, 돈나무가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기로 했다.
“‘동면이인’이라는 타이틀은 돈나무 님이 직접 떠올리신 건가요? 두 분이 저보다 먼저 채팅방에 계셨으니까, 저보다 이 모임에 관해 유식하실 것 같은데….”
돈나무를 대화에 참여시킨다는 목적과는 별개로, 돈나무의 의도가-계획이- 정말 궁금하기도 했다. 돈나무는 도대체 어떻게 이 ‘도플갱어’를 찾으려 했던 걸까. 전략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아, 네…. 이게 ‘동명이인’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 경우는 이름이 같은 경우니깐…, 얼굴이 같은 경우는 ‘동면이인’…. 재밌지 않나요? 허허….”
“우와, 진짜 창의적이시다.”
“네, 그렇네요.”
분위기는 다시 고요해졌다. 아무래도 ‘창의적’이라는 칭찬은 돈나무가 원했던 반응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좀 전에 꺼냈던 펜과 메모장으로 지금까지 나눴던 대화를 요약하기 시작했다.
“정리하면, 돈나무 님은 저처럼 SNS에서 ‘도플갱어’로 추정되는 딥페이크 계정을 만난 거고, 풋살여제 님은 인플루언서 ‘활동중’에 사람들이 풋살여제 님을 자꾸 다른 곳에서 목격했다고 하는 바람에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참여하신 거네요. 그러면, 돈나무 님이 생각해 두신 계획은 뭔가요?”
나는 메모장 위에 나열된 항목들 맨 아래에 지금까지 나눈 대화를 요약해 적어 두었다.
“어…, 일단, 저는 이 ‘도플갱어’한테 말을 걸어보려고 했는데요….”
“근데요…. 아, 말 끊어서 죄송해요….”
갑자기 풋살여제가 급하게 순서를 가로채며 말했다.
“진기명기 님, 제가 인플루언서 활동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아무래도 본인이 ‘인플루언서’라고 언급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 걸렸던 모양이다. 하기야, 처음 만난 상대가 자신에 대하여 뭔가 알고 있다는 듯 말하면, 불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반대로 기분 좋을 수도 있나-. 나는 아무튼 불필요한 오해는 피하고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아까 말씀하실 때 ‘활동’이라는 말의 어감에서 묘하게 추상적인 느낌을 받았는데, ‘사람들’이라는 말에서는 뭔가 거리감 같은 게 느껴져서요…. 두 단어가 어울리는 맥락이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크리에이터나 인플루언서이신 것 같아서 제가 멋대로 추측했습니다.”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말했다.
“그렇게 보면 ‘풋살여제배정희’라는 별명도 조금 더 잘 이해되는 것 같구요. 제가 A.X.A에서 풋살여제 님 계정을 더 헤집어 봤다거나 풋살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구요. 그냥 제가 뭐든지 좀 과잉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다시 생각해 보니, 기분 나쁘셨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사의를 표한 뒤, 그녀의 반응을 확인했다.
다행히 그녀는 내 추론으로 인해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오히려 내가 ‘-그녀를 잘 아는-풋살 팬은 아니었을까’ 하는 기대감이라도 있었는지, 어렴풋이 표정에서 실망감이 엿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
“우와, 방금은 진짜 좀 탐정? 프로파일러? 그런 일 하는 사람 같았어요…. 기분 나쁘지는 않았어요. 그냥, 신기해서 여쭤본 거예요. 그런데 그건 또 뭔가요?”
그녀의 시선은 내 손에 들린 메모장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메모장을 건네주며 대답했다.
“도플갱어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랑 똑같이 생긴 ‘그놈’ 계정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해 두고 있어요.”
돈나무도 그녀의 손에 들린 메모장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관심을 보였다.
“물론, 저는 도플갱어 같은 걸 믿는 편은 아니고, 아까 풋살여제 님 말씀처럼, 제 사진을 딥페이크 기술로 도용해 만든 해킹 계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나 걸리는 점은 ‘이놈’이 5년 전부터 SNS에서 활동 중이었다는 점인데…. 다른 사람의 계정에 제 얼굴을 붙여 넣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풋살여제 님처럼 ‘메타버스’가 아니라, ‘리얼 월드’에서 발생하는 목격담에 관해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게시판 보니까 풋살여제 님 말고도 비슷한 사례가 많은 것 같던데 말이죠….”
“우와, 진기명기 님은 도플갱어 찾는 데 완전 진심이네요. 그런데, 저라도 이 정도로 똑같이 생긴 사람을 발견하면, 진기명기 님처럼 진지해질 것 같아요. 알고 보면, 제 경우도 ‘사람들이 봤다는 게’ 진짜 제 도플갱어였고, ‘그 사람’도 진기명기 님이나 돈나무 님 도플갱어처럼 온라인에서 발견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풋살여제도 내 기록을 보고, ‘딥페이크 가설만으로는 깔끔하게 설명되지 않는 묘한 측면’을 어렴풋이 눈치챈 듯했다. 그러나 곧장 ‘도플갱어가 정말로 있을 수 있다’는 가설로 비약했다는 점에서 나와는 생각이 달랐다.
“말을 걸어봅시다!”
말이 끊긴 뒤로 한동안 가만히 있던 돈나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을 걸어 보자고요?”
“네.”
돈나무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조금 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계속 말했다.
“사실, 제가 도플갱어 계정을 알게 된 뒤로, 지금까지 계속 말을 한번 걸어보고 싶었는데 용기가 조금 부족했어요. 그런데 여러분이랑 상황을 공유하면서 진행한다면, 확실히 뭔가 알아낼 수도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어요. 저도 이게 진짜 도플갱어인지 뭔지 확신은 없지만, 진기 님, 그리고 여제 님이랑 같이 조사하다 보면, 어떤 결론에든 결국 도달하지 않을까요?”
…….
처음이었다. 세 명이 다 모인 후 10여 분이 경과 된 지금, 돈나무가 드디어 더듬지 않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 태도가 어찌나 비장했던지, 지금이 역사적인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신비감마저 느껴졌다.
“근데, 저는 진기가 아닌데요.”
“그러면 명기….”
“아니요, 아니요…. 저는 진기성이에요.”
이후 우리는 서로 통성명의 시간을 나누며, ‘동면이인에 관한 조사계획’을 즉석에서 수립한 뒤 제 갈 길로 흩어졌다. 어쩌다 보니, 당면한 과제를 세분화하는 과정에서 내가 지휘봉을 잡게 되었는데, 선뜻 공감되지는 않지만, 두 사람은 내 관찰하고 분석하는 음침한 습관을 높이 사는 것 같았다.
나는 전길호 씨-돈나무숲속의 왕자-에게는 ‘동면이인’에게 SNS로 대화를 시도할 것을 제안하며, 나 역시 그렇게 할 것이라 일러주었다. 그리고 배정희 씨-풋살여제-에게는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그녀의 ‘동면이인’이 활동 중인지 확인할 것, 그리고 그녀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또 비슷한 종류의 ‘목격담’이 언급되면, ‘그 사람’이 배정희 씨 본인이라는 식으로 공지하여 지지자들 이용해 추적하거나, 처음부터 정공법으로 지지자들에게 ‘도플갱어’에 관한 ‘현상수배’식 이벤트를 제공하자고 제안했다. 또 나는 모임의 목적과 관련된 특이 사항을 식별할 시 채팅창에 공유하자는 간단한 규칙까지도 직접 수립하여 제안했다.
첫 모임이 끝난 후 귀가 길에서 나는, ‘과연, 이 일이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임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인지’ 자문해 보았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나에게 가능했던 최선의 결론은,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내가 이 현상을 규명하는 일에 끌린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간 살아 오면서 ‘가치’에 이끌려 결정하고 행동한 일은 그다지 없었던 것 같았다. 그저 답이 없는 질문들에 이끌려 여기까지 떠내려 온 것이나 다름었다.
귀가 후 소희와 나는 식사 자리에서 서로의 하루가 어땠는지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자신이 권유했던 일이기 때문인지, ‘동면이인’ 모임의 후기에 크게 흥미를 보이며 듣고 싶어 했다. 나는 카페에서 찍은 ‘첫 모임의 기념사진’을 소희에게 보여주며, 그 후기 역시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러던 중, 한동안 흥미롭게 경청하던 그녀가 손가락으로 사진 한 가운데를 가리키며 내 말을 끊었다.
“잠깐만….”
“왜?”
“좋아 보이네. 그리고, 왜 이렇게 신났어? 안 간다고 버티던 게 누구더라.”
그녀가 가리키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풋살여제 배정희 씨였다.
“아니…. 네가 가 보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