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柳花과 금와金蛙 (1/4)
해모수가 벌이는 일들은, 그 뒤 해모수가 하-백을 통해 얻어내어 오고가려 하던 길 반대편에 있던 부여의 왕 금와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때문에 금와 또한 해모수가 벌일 일들에 대비하기 위하여 여러 일들을 하였습니다. 금와가 그런 일들을 하게 된 시작, 해모수의 일들이 금와에게 알려진 것은 유화가 금와에게 한 이야기들을 통해서였으니, 여기서부터 다시 자료들을 살펴보지요.
해모수가 그렇게 유화를 두고 떠난 뒤, 동명왕편 주석은 하-백이 유화가 자신의 가르침을 듣지 않고 가문을 부끄럽도록 한 것을 꾸짖었다고 적었습니다. 이어 하-백이 가까운 사람들을 시켜 무엇인가를 딸에게 묶고 그것에 묶인 딸을 잡아당기도록 하니 입술 같은 것 - 딸의 입술에 묶은 것 - 의 길이가 길어져서는 3장이나 되었다[B-13-(1):①-⑦]고 적었습니다.
B-13-(1) 동명왕편 주석: <● (하-백이) 말하기를 "① 너는 ② 내 가르침[訓]을 따르지 않았고 ● 마침내 ③ 우리 가문[門]을 부끄럽도록 하였다."라고 하고 ④ 가까운 사람들[左右]에게 명령하니 ● (가까운 사람들이) ⑤ (무엇인가를) 묶고 (하-백의) 딸을 잡아당겼다. ● (그리하여) ⑥ 그(= 딸의) 입술 같은 것[唇]의 가장자리[吻]가 ⑦ 길이가 3자[尺]가 되자 ● (하-백은) 다만 ⑧ (남을) 따르는 남자[奴], (남을) 따르는 여자[婢] 2명[人]을 주고[與] ⑨ (딸을) 우발-수[優渤-水] 가운데에 떨어뜨렸다[貶].> <曰①汝②不從我訓●終③辱我門④令左右●⑤絞挽女口●⑥其唇吻⑦長三尺●唯⑧與奴婢二人⑨貶於優渤水中>
이 물건은 가문을 부끄럽게 하였다는 딸 유화에게 씌운 것이니, 유화를 보고 그 가문을 떠올리지 못하도록 하려던 곧 얼굴을 감추려 쓴 도구입니다. 비슷한 모양, 같은 목적을 가진 도구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 삼국유사 기이편이 알영의 입술에 있었던 닭[雞]의 부리[觜] 같은 것[3장 2편 #9 B-22:⑩]이라는 구절들을 통해, 소-벌-도리가 얼굴을 감춰 알영을 데려오며 썼던 도구를 적은 것임을 이미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3장 2편 #9 B-22 삼국유사 기이편: ① 이 날 ② (뒤의) 사량(-부)의 마을[里]의(= 사량-부의 마을 가운데) ③ 알영-정[閼英-井] 가[邊]에 ④ 닭 같은 사람[雞], 용 같은 사람[龍]이 있어 ● (그 사람이) ⑤ 나타나서는 ⑥ 가랑이[脇] 옆[左]에 ⑦ 아이인 여자[童女](= 여자아이)를 낳아놓았다[誕生]. ⑧ (여자아이의) 생김새[姿容]가 ⑨ 뛰어나고 고왔는데 ● 그리하였지만 ⑩ 입술에 ⑪ 닭[雞]의 부리[觜]와 비슷한 것[似]이 있었는데 ● (사람들이) ⑫ 데려와 (여자아이를) 월-성[月-城] 북-천[北-川]에서 씻기자 ⑬ 그(= 나이어린 여자 입술의) 부리 같은 것[觜]이 ⑭ 끊어지고[撥] 떨어졌다[落]. ①是日②沙梁里③閼英井邊④有雞龍●⑤現⑥而左脇⑦誕生童女⑧姿容●⑨殊麗●然⑩而唇⑪似雞觜●將⑫浴於月城北川⑬其觜⑭撥落
이러한 신라와 부여의 연결고리를 특히 진-국의 후손 소-벌-도리가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무리와, 금와가 다스리던 부여 무리 곧 흘승-골-성에서 머물다가 옮겨갔던 무리에서 같은 도구가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뒤에 동명 가운데 같은 도구를 하나 더 본 뒤에 그 답을 이야기하지요.
그렇게 얼굴을 감추어 보고 다가올 사람이 없도록 하고서, 이어 동명왕편 주석은 하-백이 유화에게 따르는 남자 1명과 여자 1명을 주고서는 유화를 우발-수에 떼어놓았다[B-13-(1):⑧-⑨]고 적었습니다. 이미 살핀 바, 우발-수는 태백-산을 사이에 두고 그 북쪽에 있던 장소 곧 해모수가 다가왔던 웅심-산과는 반대편에 있는 곳이었으니, 이것은 하-백은 해모수가 다시 찾아와 유화를 데려가지 못하도록 한 일이었습니다.
이 일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앞서 살핀 뱌 있는 구절들에 이어지는 구절들이 유화의 말을 인용하여 간단히 적었습니다. 하-백과 그 아내가 꾸짖고 중매하는 사람이 없이 다른 사람 - 해모수 - 를 따랐다 - 예를 갖추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따르지 말라는 하-백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 고 하였다[A-3-(3):①-④]고 적고, 이어 하-백과 그 아내가 벌주어 유화가 지금 우발-수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였다[A-3-(3):⑤-⑥]고 적었습니다.
A-3-(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여자가 말하기를 ")① 아버지(= 하-백), 어머니가 ② 나를 꾸짖었으며 ● (말하기를) '(너에게) ③ 중매하는 사람[媒]이 없는데 ● (네가) ④ 다른 사람[人]을 따랐다.'라고 하고 ● 이윽고 ⑤ (나를) 벌주니[謫] ● (내가) ⑥ 우발-수[優渤-水]에 머물렀다."라고 하였다. (女子曰)①父母②責我●③無媒④而從人●遂⑤謫●⑥居優渤水
이 구절들은 동명왕편 주석의 내용을 관점을 조금 달리하여, 때문에 서로 다른 부분들을 보다 자세히 또는 간단히 적었습니다. 그런데 두 자료들 모두 유화가 있었던 우발-수를 태백-산의 남쪽이라고 적었는데, 이곳은 해모수가 있던 흘승-골-성에서 시작하여 태백-산 가까운 평양을 지나 예에 이르는 길에 있었고, 때문에 해모수는 이를 수 없었지만 길의 반대편, 부여가 다스리던 북쪽 예의 땅에 있던 금와는 이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유화와 금와의 만남을, 다음 동명왕편 주석은, 먼저 어-사[漁-師]가 힘을 보태어 추鄒라는 사람을 도왔다[B-14:①-③]고 적었습니다. 여기서 어-사는, 물고기를 잡는 일[漁]을 잘 하는 사람[師]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어-사[魚-師][B-14:①-⑨]라고 달리 적은 구절을 통해 보면 앞서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마찬가지로 물고기의 이름을 벼슬 이름으로 삼은 군대, 그 군대의 군사입니다.
B-14 동명왕편 주석: <① 어-사[漁-師]가 ② 힘을 보태어[强力] ③ 추鄒를 돕는데[扶] ● (추가) ④ (왕에게) 알려 ● 말하기를 "⑤ 가까운 곳[近](= 우발-수)에 ⑥ 고기잡이[梁] 가운데의 물고기들을 도둑질하여 가지고 가버리는 것이 있다. ⑦ 아직 어떤 들짐승[獸]인지 알고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⑧ 왕이 ● 이어 ⑨ 어-사[魚-師]에게 시키니 ● (어-사가) ⑩ 그물이 ⑪ 그것(= 고기잡이 가운데의 물고기들을 도둑질하여 가지고 가버리는 것)을 끌어내도록 하였다. ⑫ 그(= 어-사의) 그물이 ⑬ 깨트려지고 찢어지니 ● (어-사가) 다시 ⑭ 철 그물을 만들었으며 ● (만든 철 그물이) ⑮ 그것을 끌어내었다. ⑯ 처음 ● (어-사가) ⑰ 1(명) 여자를 얻었는데 ● (여자는) ⑱ 돌에 앉아서 ⑲ 나왔다. ⑳ 그(= 돌에 앉아서 나온) 여자의 ㉑ 입술 같은 것이 ㉓ 길어 ● (여자가) ㉔ 이야기할 수 없었다. ● (왕이) ㉕ 명령하니 ● (사람들이) ㉖ 3(번) ㉗ 그 입술 같은 것을 잘랐다. ● 이에 (여자가) ㉘ 이야기하였다.> <①漁師②强力③扶鄒●④告●曰⑤近⑥有盜梁中魚而將去者⑦未知何獸也⑧王●乃⑨使魚師●⑩以網⑪引之⑫其網⑬破裂●更⑭造鐵網●⑮引之⑯始●⑰得一女●⑱坐石⑲而出⑳其女㉑唇㉓長●㉔不能言●㉕令●㉖三㉗截其唇●乃㉘言>
때문에, 동명왕편 주석은 이어 추가 가까운 곳에 고기잡이로 잡은 물고기들을 가지고 가버리는 것이 있는데 어떤 들짐승인지는 아직 알지 못하겠다고 누군가에게 알렸다[B-14:④-⑦]고 하여, 군사가 우두머리에게 그리하듯이 어-사가 누군가에게 알린 일을 적었습니다. 이 때 어-사가 알린 상대는 이어지는 구절들에 나오는 왕입니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동명왕편 주석이 어-사에게 왕이 시켰다[B-14:⑧-⑨]고 적은 일들로 다시 이어집니다. 먼저 어-사는 그물로 물고기들을 도적질해 가는 것을 끌어내려고 하였는데, 그러한 그물이 망가지자 다시 철 그물을 만들어 그것으로 끌어내었다[B-14:⑩-⑮]고 적었습니다. 이어 돌 같은 것에 타고 있으며 얼굴의 입술 같은 것이 길어 말하지 못하는 여자를 얻었다[B-14:⑯-㉔]고 적고, 입술 같은 것을 3번 잘라주자 - 도구를 벗기자 - 여자가 이야기를 하였다[B-14:㉕-㉘]고 적었습니다.
동명왕편 주석은 여자가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이어 적지 않았습니다만, 그 이야기는 사실 앞서 이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통해 살핀 바 있는 그것입니다. 곧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해모수가 부여의 옛 도읍, 다시 말해 흘승-골-성에 이르러 도읍한 일을 적은 뒤에 이어, 해부루가 죽고 금와가 왕의 자리를 이었고 그 때 금와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여자를 만나 물었다[A-7:①-⑥]고 적었는데, 그 뒤에 적혀있던 여자가 한 이야기가 바로 앞서 살핀 A-3-(1), (2), (3)입니다.
A-7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이윽고 ① 해부루가 ② 죽자[薨]③ 금와가 ④ (왕의) 자리를 이었다[嗣]. ④ 이 때에(= 금와가 왕의 자리에 있을 때) ● (금와가) ⑤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여자를 얻어 ⑥ 그(= 여자)에게 물었다. ●及①解夫婁②薨③金蛙④嗣位④於是時●⑤得女子於太白山南優渤水⑥問之
그 내용은 이제까지 살핀 바 앞서 동명왕편 주석이 적은 바 해모수와 유화가 만나고 헤어진 일들이며, 삼국사기는 그 내용이 유화의 말과 겹친다고 여겨 간단히 유화의 말만을 적고 앞의 긴 이야기는 빼고 적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 가운데에는 아버지가 주어 보낸 남자, 여자가 모두 유화를 떠난 뒤에, 홀로 남아 물재주로 남이 잡은 물고기를 빼돌려서 먹고 살던 유화의 모습은 적혀있지 않았습니다.
유화가 하였던 이야기를 적은 뒤에, 이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금와가 유화의 이야기를 남다르다고 여기고 유화를 데려가서는 숨겨 방[室] 가운데에 두었다[A-8-(1):①-③]고 적었습니다. 앞서 살핀 것들 다음의 동명왕편 주석도 같은 일을 달리, 금와가 유화가 천-제의 아들 - 해모수 - 의 아내임 - 유화가 한 말 - 을 알았고 그리하여 따로 궁에 유화를 두었다[B-15-(1):①-④]고 적었습니다.
A-8-(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① 금와가 ② 그것(= 여자의 말)을 남다르다고 여기고 ③ 숨겨 (여자를) 방 가운데에 두었다[閉]. ①金蛙②異之③幽閉於室中
B-15-(1) 동명왕편 주석: <① 왕은 ② (여자가) 천-제의 아들(= 해모수)의 (왕)비妃임을 알고 ③ 따로 궁宮에 ④ 그(= 여자)를 두었다.> <①王②知天帝子妃③以別宮④置之>
곧 금와는 유화에게 하-백과 해모수, 유화 사이의 일들을 듣고서 유화가 해모수의 아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적지 않은 이 점을 동명왕편 주석은 다행히 그대로 적었으며, 뒤에 그것을 통해,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석이 어떤 기록을 인용하여 백제 시조 비류-왕의 아버지라고 적은 우태[G-2:①-④] 곧 이 구절들에 이어 어떤 기록의 그 뒤 구절들이 해부루의 남다를 것 없는 손자라 적었던 우태[G-1:①]가 졸본에 보내진 까닭을 미루어 살필 수 있게 되었습니다.
G-2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석 인용 어떤 기록: <① (백제百濟의) 첫始 조상[祖]이 ② 비류-왕[沸流-王]이었다. ③ 그(= 비류-왕의) 아버지는 ④ 우태優台였다.> <一云①始祖②沸流王③其父④優台>
그렇지만 우태의 일들은 금와가 유화를 만나고서도 10년 남짓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일어난 것이기에 일단은 그렇게 만났던 유화가 금와의 곁에서 겪은 일들을 먼저 이어 살펴보겠습니다. 해모수의 아들, 주몽이라 또한 일컬어지던 동명東明의 탄생은 그 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때문에 다음 글부터는 앞서 자료들에 더해서 다른 앞선 자료들이 적고 있는 이야기들, 곧 동명이 세운 고구려가 아니라 부여를 통해서 한漢에 간략하게 전해졌던 동명의 이야기들을 모두 함께 살피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