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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4편 부여夫餘 (2) #11

금와金蛙와 동명東明 (2/4)

by 잡동산이 Mar 10. 2025

금와에 대해 아들 우태를 졸본으로 보내던 시기와 양아버지 부루가 금와를 찾던 시기의 일들을 살펴 이야기를 끝냈으니, 다시 동명이 태어나던 시기로 돌아가 우태가 졸본으로 보내지던 시기까지의 일들을 살펴 이야기이어가지요. 이 시기는 위의 두 시기 사이에 해당합니다.




MC-57/04, 유화가 동명을 태어난 지 3달이 지났을 때 앞서 살핀 동명왕편 주석은 그가 말을 시작하였다고 적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 다른 동명왕편 주석은 명이 그 어머니에게 파리들이 눈을 깨물어 잘 수 없으니 활, 화살을 만들어달라고 하였다[B-18:①-⑦]고 적었으며, 그리하여 유화가 문을 만든 풀줄기를 가지고 활, 화살을 만들 주었다[B-18:-]고 적었습니다.


B-18 동명왕편 주석: <(남자아이가) ① 어머니에게 일러 ● 말하기를 "② 여러 파리들[蠅]이 ③ (나의) 눈을 깨물어[噆] ● (내가) ④ 잘 수 없다. ⑤ 어머니는 ⑥ 나를 위해 ⑦ 활, 화살을 만들라."라고 하였다. ⑧ 그(= 남자아이의) 어머니가 ⑨ 문을 만든 풀줄기[蓽]이(= 풀줄기로) ⑩ 활, 화살들을 만들도록(= 되도록) 하고 ⑪ 그것들을 (남자아이에게) 주었다. ● (남자아이가) 스스로 ⑫ 물레[紡車] 위의 파리들에게 (활을) 쏘아[射] ⑬ 화살들을 날리니 ● (화살들이) 곧 ⑭ (파리들을) 맞추었다[中]. ● (그리하여) ⑮ 부여扶余가(= 부여 사람들이) ⑯ (활을) 잘 쏘는 것을 일러 ● 말하기를 ⑰ 주몽朱蒙(= 동명)이라고 하였다(= 하게 되었다).> <①謂母●曰②群蠅③噆目●④不能睡⑤母⑥爲我⑦作弓矢⑧其母⑨以蓽⑩作弓矢⑪與之●自⑫射紡車上蠅⑬發矢●卽⑭中●⑮扶余⑯謂善射●曰⑰朱蒙>


그리고서 동명왕편 주석은, 바로 동명이 활을 쏘게 된 듯이, 이어 동명이 유화가 만든 활, 화살들로 물레 위의 파리들에게 활을 쏘니 화살들이 파리를 맞추었다[B-18:-]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나이가 7세를 채우고서 동명이 스스로 활, 화살들을 만들어서 활을 쏘았고 그리하여 만화살들이 100번 날아가면 100번  맞추었다[A-8-(6):-⑥] 적어, 동명왕편 주석이 빠트린 시간 간격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A-8-(6)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① 나이가 ② 7세를 채우니 ● (남자아이는) 스스로 ③ 활, 화살들을 만들었는데, ④ 그것(= 활)을 쏘아 ● 100(번) ⑤ (화살들을) 날리면 ● 100(번) (화살들이) ⑥ 맞추었다. ● (그리하여) ⑦ 부여扶餘 사람들[俗]이 ⑧ (활을) 잘 쏘는 것[善射]을 이야기하여[語] ● (말하기를) ⑨ 주몽朱蒙(= 동명)이라고 하였다(= 하게 되었다). ● 그리하여 ⑩ (남자아이의) 이름이 ⑪ (활을 잘 쏘는 것을) 이르도록 하였다.  ①年②甫七歲●自③作弓矢④射之●百⑤發●百⑥中●⑦扶餘俗⑧語善射●⑨爲朱蒙●故⑩以名⑪云


이어 동명왕편 주석,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 앞서 이야기한 바 동명이 활을 잘 쏘았 - 부 사람들이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르며 주몽이라는 단어를 [B-18:- = A-8-(6):-]고 적었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또한 여기에 더해서는 달리, 아이의 이름 - 명을 달리 적은 주몽朱蒙 -  부여 사람들이 활 잘 쏘는 것을 이르도록 하였다[A-8-(6):-]고 적었습니다.


주몽 곧 붉은색[朱] 두움[蒙](= 흐릿한 빛) 동명東明이 뜻하는 동쪽[東]의 밝음[明]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황을 풀어적은 것이, 바로 동명을 달리 이르는 이름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주석이 인용한 어떤 기록은 주몽이 해解 - 해모수의 성인 해解라는 소리를 뜻으로 가지는 해[日] - 를 본땄다[象][Q-2:②] 또한 적은 것은 그 때문이며, 또한 주몽을 추모라고 하였다[Q-2:]도 마찬가지입니다.


Q-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주석 인용 어떤 기록: <① (주몽을) 추모鄒牟라고 하였다. ● (주몽은) ② 해解(= 해[日]를 본땄다[象].> (朱蒙)<一云①鄒牟②象解>


세간에서 몽蒙을 쓴 것을 가지고 추모의 牟를 굳이 좋지 않은 뜻의 글자로 낮추어 쓴 것이라 여기기합니다. 그러나, 한자가 깊이 자리잡아 널리 쓰이던 조선 시기, 박세당이라는 사람이 지어 아직 배움을 시작하지 않은 아이가 익히도록  동몽선습童蒙先習이라는 책의 제목이서 보이듯이, 몽蒙 어릴 때 세상 일에 어두운 것 - 밝지 않음 - 을  글자일 뿐이지, 낮추 쓰인 글자가 아니다.


동명을 이르는 주몽, 그리고 그것을 고구려에서 이르던 추모를 그 소리를 가지고 뒤에  열도에서는 都牟라고 적기도 니다만, 모두 동명이라는 같은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미 앞서의 글들 가운데 몇몇 글에서 자세히 살펴 이야기하였던 바와 같이 추모와 동명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위에서 동명왕편 주석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흘 통해 살핀 일 - 동명이 활을 잘 쏘았던 일 -  앞서 살핀 료들 - 논형 길험편, 삼국지 위서 동이전 주석이 인용한 위략이 다시 인용하여 적은  옛 기록 동명이 활 쏘기를 잘하였다[L-(5):-④ = M(5):④-]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절들을 적기에  두 기록들은, 왕이 동명에게 명령하여 동명이 소들, 말들을 키웠다[L-(5):- = M(5):-]고 또한 적었습니다.


L-(5) 논형 길험편: (왕이) ① (동명에게) 명령하니 ● (동명이) ② 소들[牛], 말들[馬]을 키웠다. ③ 동명은 ④ (활) 쏘기[射]를 잘하였다[善]. ①令●②牧牛馬③東明④善射
M-(5)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편 주석 인용 위략 인용 옛 기록: <● (왕이) ① 언제나 ② (동명에게) 명령하니 ● (동명이) ③ 소들[牛], 말들[馬]을 키웠다. ④ 동명은 ⑤ (활) 쏘기[射]를 잘하였다[善]. <●①常②令●③牧馬④東明⑤善射>


동명이 활 쏘기를 잘하였는 것은,  이름을 달리 이르 '주몽'이라는 단어를 다른 사람들이 활 쏘기를 잘하는 것을 이르며 쓰도록 할 정도였으니, 한순간 잠시 인 것 아니라 그 뒤로 동명을 이르며 계속하여 쓰인 것이니다. 렇기에, 논형 길험편과 옛 기록이 동명이 활을 잘 쏘았다고 적은 구절들은 보다  시기의 일들을 은 것이며, 보다 앞 자리에 일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 그러할까요?  흐름을 먼저 살펴보면, 어지는 동명왕편 주석은 동명과 금와 아들들 사이에서 일어난 다툼[B-19]을 적, 이어 다른 동명왕편 주석 큰 아들 대소가 금와에게 동명을 꾀하여야 한다고 하였다[B-20]고 적는데, 그리고서야 또다른 동명왕편 주석이 동명이 말을 키[B-21-(1)]적었습니다. 러니, 논형 길험편과 옛 기록 가운데 동명이 활을 잘 쏘았다 구절들 앞의 구절들의 처음[L-(4)와 L-(5) 사이, M-(4)와 M-(5)]놓일 수 있니다.


B-19 동명왕편 주석: <(주몽이) ① 나이들어 ② 크게 자라기에 이르자, ③ 재주들[才]이 가지런하여[竝] 할 수 있는 것들[能]이 갖추어졌다[備]. ④ 금와에게 ⑤ 아들들 7명[人]이 있어 ● (그들이) ⑥ 언제나(= 언제나처럼) ⑦ 주몽朱蒙과 함께 ⑧ 노닐며 사냥하는데 ⑨ 왕자들[王子](= 금와의 아들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 40명[人] 남짓이 ● 오직 ⑩ 1(마리) 사슴을 얻었지만 ⑪ 주몽은 ● (혼자) ⑫ 활로 사슴들을 쏘아 ● (얻은 사슴들이) ⑬ 많기에 이르렀다. ⑭ 왕의 아들들이 ⑮ 그를(= 주몽을) 시샘하고[妬] ● 이어 ⑯ 주몽을 잡아 ⑰ 나무에 매고 ⑱ (주몽이 얻은) 사슴들을 빼앗아 ⑲ (돌아)갔다. ⑳ 주몽은 ㉑ (매인) 나무를 뽑아 ㉒ (돌아)갔다.> <①年②至長大②才能竝備④金蛙⑤有子七人●⑥常⑦共朱蒙⑧遊獵⑨王子及從者四十餘人●唯⑩獲一鹿⑪朱蒙●⑫射鹿●⑬至多⑭王子⑮妬之●乃⑯執朱蒙⑰縛樹⑱奪鹿⑲而去⑳朱蒙㉑拔樹㉒而去>
B-20 동명왕편 주석: <① (왕)태자太子 대소帶素가 ② (대소가) 왕(= 금와)에게 이야기하여 ● 말하기를 "③ 주몽이라는 이는(= 활 잘 쏘는 사람은) ④ 신 같고 사나운[勇] 장사[士]가 되어 ⑤ 담력[瞻], 살핌[視]이 ⑥ 보통이 아니다. ● 만약 ⑦ 꾀하는 일[圖]을 서두르지[早] 않으면 ● 반드시 ⑧ 뒤에 걱정할 일[患]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①太子帶素②言於王●曰③朱蒙者神勇之士⑤瞻視⑥非常●若⑦不早圖●必⑧有後患>
B-21-(1) 동명왕편 주석: <① 왕이 ② 주몽(= 동명)에게 시키니 ● (주몽이) ③ 말을 길렀다[牧]. ● (왕이) 바라기를, ④ 그 뜻을 시험하였으면, 하였다. ⑤ 주몽이 몰래[內] 스스로[自] ⑥ 미워함[恨]을 품었다.> <①王使朱蒙牧馬●欲④試其意③朱蒙內自⑥懷恨>


곧 동명은 활 쏘는 재주가 갖추어진 뒤에 소들을 키우게 - 우-가 있게 - 되었니다. 그리고서 그 뒤 금와의 아들들과의 노닐던 가운데 그 재주를 보이자 금와 동명의 마음을 시험하고자 동명이 말들을 키 - 마-가에 있게 - 니다. 런데, 동명왕편 주석이어 - 이 일 말미암아 - 동명이 미워함을 품었다[B-21-(1):⑤-]고 적었습니다. 어째서였을까요?


일들이 일어난 큰 흐름은 이해하였으니,  질문에 대한 답을 포함하여 앞서 살핀 여러 가지 일들 - 우태를 보낸 일들을 비롯한 일들 -에 대 자료들이 고 있는 바를, 다시 돌아가 하나씩 살펴 이해해보지요.




먼저, 동명왕편 주석 동명이 나이들어 크게 자라 재주가 갖추어졌다[B-19:①-③]고 적었으며, 다시 이어 명이 와의 7명 아들들과 노닐며 사냥하였[B-19:-]고 적었습니다. 곧 동명은 활을 스스로 만들어 쏘아 백발백중으로 맞추는 재주가 먼저 갖추어진 7세 뒤의 어느 시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적은 대로 금와의 7명 아들들과 노닐었습니다[A-8-(7):-].


A-8-(7)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① 금와에게 ② 7(명) 아들들이 있어 ● (그들이) ③ 언제나(= 언제나처럼) ④ 주몽朱蒙과 더불어 ⑤ 노닐며 노는데 ⑥ 그(= 금와의 아들들의) 재주들[伎], 할 수 있는 것들[能]이 ⑦ 모두 ⑧ 주몽에게 이르지 않았다[不及]. ①金蛙②有七子●③常④與朱蒙⑤遊戱⑥其伎能⑦皆⑧不及朱蒙


이어 동명왕편 주석은 왕의 아들들 7명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40명 남짓이었지만 1마리 사슴을 잡았을 뿐이지만 동명은 혼자 많은 사슴들을 쏘잡은 사슴들 많기에 이르렀[B-19:-]고 적었습니다.  일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왕의 7명 아들들의 재주들, 할 수 있는 것들이 동명에게 이르기 - 미치지 - 않았다[A-8-(7):①-⑤]고 간단하게 적었습니다.


다시 이어 동명왕편 주석은 왕의 아들들이 동명을 시샘하여 나무에 묶고 그가 잡은 사슴들을 가지고 돌아갔고 동명은 그 - 묶인 - 나무를 뽑아 가지고 돌아갔다[B-19:-]고 적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이 일을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서 이어 동명왕편 주석은 왕의 왕태자 - 자리를 이을 아들 - 인 대소가 아버지 금와에게 주몽이라고 불리는 이가 - 동명이 - 사나우니 꾀하는 일을 서두르지 않으면 걱정할 일이 뒤에 생길 것이 두렵다고 하였다[B-19:⑭-㉒]고 적었습니다. 같은 일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거의 같지만 달리, 대소가 금와에게 동명을 죽이기를 바랬지만 금와는 대소의 바램을 들어주지 않았다[A-8-(8):-⑪]고 달리 적었습니다.


A-8-(8)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① 그(= 금와의) 맏아들[長子] 대소帶素가 ② 왕(= 금와)에게 이야기하여 ● 말하기를 "③ 주몽은 ④ 사람이 낳은 바가 아니며, ⑤ 그(= 주몽의) 사람됨[爲人]이 ⑥ 사납다[勇]. ● 만약 ⑦ 꾀하는 일을 서두르지 않으면 ● 두렵게도 ⑧ 뒤에 걱정할 일이 있을까, 한다. ● 바라기를[請] ⑨ 그를(= 주몽을) 없앴으면[除], 한다."라고 하였다. ⑩ 왕은 ⑪ (대소의 바램을) 들어주지 않았다. ①其長子帶素②言於王●曰③朱蒙④非人所生⑤其爲人也⑥勇●若⑦不早圖●恐⑧有後患●請⑨除之⑪王不聽


그리고서 이어 동명왕편 주석은 금와가 동명에게 시켜 동명이 말을 키우게 되었고 금와는 동명의 뜻을 시험하였으면, 하였다[B-21-(1):-]고 적고, 이어 동명이 스스로 - 금와가 뜻한 바와는 다르게 - 미워함을 품었다[B-21-(1):⑤-⑥]고  적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다만 금와가 동명에게 시켜 동명이 말을 돌보도록 하였다[A-8-(9):-②]고 간단히 적었습니다.


A-8-(9)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① (왕이) 그(= 주몽)에게 시키니 ● (주몽이) ② 말을 돌보았다[養]. ①使之●②養馬


그리하여 시기에 비로소 동명이 마-가에 있게 되니, 우-가에 있던 시기는 보다 앞선 시기입니다. 곧 논형 길험편과 어떤 기록에 대해 살핀 바를 통해 보면, 동명은 7세를 지나 재주가 갖추어진 어느 시부터 우-가[牛-加]에 있었니다. 하지만, 마-가에 있었을 때와 달리 미워함을 품었으니 어떤 식으로든 자리가 낮아진 것이며, 대소가 바라던 바를 - 동명을 죽이는 것을 - 금와는 간접적으로 들어주어 달래면서 동명의 반응을 살핀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다 앞서 대소의 바램도 없는데, 동명은 어째서 우-가에 있게 되었을까요? 보다 앞서 동명은 어떤 무리에 있었을까요? 동명이 말을 키우도록 하였을 때 동명을 시험고자 하였다고 한 것과 달리 소를 키우도록 하였을 때 그 이유를 적지 않은 것은 그것이 동명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니, 그럼에도 동명이 우-가로 옮긴 것은 더이상 동명이 그 무리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앞서 있던 무리가 그 즈음 더이상 부여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 무리를 살핀 바 있 바로 새들의 이름을 벼슬 이름으로 하 무리니다. 명은  무리에 해당하는 사람들 본래 함께 하였으나, 이 기에 그 사람들이 우태 따라 졸본으로 가게 되면서, 금와는  가까워 그를 맡을 사람들이 적어진 그 무리에서 옮겨 대신 우-가에 있도록 였던 것입니다.




이 시기는 언제였을까요? 금와가 우태를 졸본에 보낸 것은 졸본과 손잡기 위한 것이었으나 우태는 앞서 살핀 바 그곳의 풍속에 따르면 아이를 낳아 커서야 돌아올 수 있었기에[O-1:-㉓] 볼모에 가까웠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들들 가운데 어리고 남다를 것 없는 아들[庶子]을 보냈지만, 그래도 아이를 빨리 낳아 돌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점을 통해 혼인이 이루어진 시기 - 우태가 졸본으로 가고, 동명이 우-가로 옮겨 머물게 된 시기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앞서 우태가 졸본으로 가게 된 일에 대해서 졸본이 있던 고구려의 풍속을 적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편을 살폈는데, 이제 반대로 우태를 졸본으로 보내는 부여가 이 즈음 있던 곳, 뒤에 옥저가 되는 곳의 풍속에 대해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을 살펴보지요.


앞서 해모수와 하-백의 일을 살피면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은 여자 나이 10살이 되면 서로 장소를 만든다[K:②-④]고 적었다고 하였니다. 곧, 뒤의 일은 졸본의 풍속에 따르기로 하고 부여가 우태와 소서노의 혼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던 시기, 소서노의 나이는 10살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진辰의 일로 살펴본 바 있는 황제내경 소문 상고천진론편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남자와 여자 나이를 각각 16, 14[2장 4편 #17:-㉑, -⑪]라고 적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시간이 지나 최대한 빨리 아이를 낳도록 하고자 하 우태 소서노보다 2살보다 같거나 많아야 니다.


2장 4편 #17 AF 황제내경 소문 상고천진론편: (기백歧伯이 말하기를 ")● (여자는) ① (나이가) 14[二七]면 ② 천계가 ③ 이르러 ④ 임맥이 ⑤ 오고가며 ⑥ 태충맥이 ⑦ 일어나서 ⑧ 월사[月事]가 ⑨ 때마다 ⑩ 내려가도록 하니 ● 그리하여 ⑪ 아이를 가진다. ... ● (남자는) ⑫ (나이가) 16[二八]이면 ⑬ 신腎의 기운이 ⑭ 일어나 ⑮ 천계가 ⑯ 이르니 ⑰ 정의 기가 ⑱ 넘쳐 나와서 ⑲ 음, 양이 ⑳ 어울리니 ● 그리하여 ㉑ 아이를 가질 수 있다.("라고 하였다.) (歧伯曰)●①二七②而天癸③至④任脈⑤通⑥太衝脈⑦盛⑧月事⑨以時⑩下●故⑪有子...●⑫二八⑬腎氣⑭盛⑮天癸⑯至⑰精氣⑱溢寫⑲陰陽⑳和●故㉑能有子


그런데 앞서 동명과 우태에 대해, 우태가 죽은 뒤 우태의 아내 소서노를 동명이 아내로 맞고 우태의 아들들을 자신의 아들로 여긴 것은 우태가 동명의 형으로 여겨졌기 때문 - 곧 나이가 같거나 많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우태가 졸본에 보내진 시기는 동명의 나이가 12살인 시기, 다시 말해 MC-57에서 11해가 지난 MC-46 또는 보다 뒤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서 살핀 바 있는 낙랑군 호구부 목간은 초원 04년에 낙랑-군 현들 가운데 부조-현[2장 4편 #23 AQ:] 적었는데, 또한 앞선 해를 기준으로 호들, 구들이 많아지고 적어진 바[2장 4편 #23 AQ:]를 적었습니다. 그러니, 늦어도 MC-45에 해당하는 초원 03년에는 이미 부여가 있던 장소가 부여에게 등돌리고 漢을 따랐으며, 때문에 부여는 서북쪽으로 하-백이 다스리는 곳을 지나 졸본에 지나는 길을 잃었으니 졸본과의 일은 MC-45보다 앞서 이루어졌습니다.


2장 4편 #23 AQ 낙랑군 호구부 목간: ① 낙랑-군[樂浪-郡]의 ② 초원初元 04년 ③ 현들[縣]마다의 호들[戶], 구들[口]의 많고 적음에 대한 기록: ④ 조선(-현)[朝鮮], ... ⑤ 염감(-현)[䛁邯], ... ⑥ 증지(-현)[增地], ... ⑦ 점제(-현)[占蟬], ... ⑧ 사망(-현)[駟望], ... ⑨ 둔유(-현)[屯有], ... ⑩ 대방(-현)[帶方], ... ⑪ 열구(-현)[列口], ... ⑫ 장잠(-현)[長岑], ... ⑬ 해명(-현)[海冥], ... ⑭ 소명(-현)[昭明], ... ⑮ 제해(-현)[提奚], ... ⑯ 함자(-현)[含資], ... ⑰ 수성(-현)[遂成], ... ⑱ 누방(-현)[鏤方], ... ⑲ 혼미(-현)[渾彌], ... ⑳ 패-수(-현)[浿-水], ... ㉑ 탄열(-현)[呑列], ... ㉒ 동이(-현)[東暆], ... ㉓ 잠태(-현)[蠶台], ... ㉔ 불이(-현)[不而], ... ㉕ 화려(-현)[華麗], ... ㉖ 사두매(-현)[邪頭昧], ... ㉗ 전막(-현)[前莫], ... ㉘ 부조(-현)[夫租], ...(후략) ①樂浪郡②初元四年③縣別戶口多少■簿④朝鮮...⑤䛁邯...⑥增地...⑦占蟬...⑧駟望...⑨屯有...⑩帶方...⑪列口...⑫長岑...⑬海冥...⑭昭明...⑮提奚...⑯含資...⑰遂成...⑱鏤方...⑲渾彌...⑳浿水...㉑呑列...㉒東暆...㉓蠶台...㉔不而...㉕華麗...㉖邪頭昧...㉗前莫...㉘夫租...(후략)


그렇기에, 우태가 졸본으로 간 시기 그리고 이어 동명이 우-가에 있게 된 시기 MC-46[+2)에 해당합니다. 그 일이 일어난 뒤, MC-46 또는 MC-45에 부여는 갈라졌고 본래 부여가 들어와 다스리던 북쪽 예의 무리들 - 5개 현들 해당하는 무리들 -  한을 따르게 되었니다. 부여는 보다 북쪽으로 옮겨 자리하게 되는데, 이곳은 뒤에 일어나는 고구려보다 북쪽에 자리하, 때문에 뒤에 북-부여라고 하였 니다.




갑작스럽게 어난 듯한 부여의 변화는 사실 앞서 살핀 자료들이 적은 일들 가운데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앞서 동명을 두고 5개 가이 그 왕인 금와와 달리 움직기로 하였던  그것이니, 그리하여 금와를 따르지 않기로 한 부여 무리들은 한漢의 낙랑-군 동-부를 맡은 도위를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이 일들에 대해 이미 언급하였지만 이제야 비로소 살필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이미 길어졌으니 일단 여기서 끊고, 다음 글들에서는 이 때의 상황을 다른 자료들을 통해서 더욱 자세히 살펴보지요. 그리하여 이러한 상황의 변화가 마침내 금와에게 그리고 동명에게 어떤 영향을 주어서는, 금와와 동명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갔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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