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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량 Jul 15. 2024

상일동 이야기 3

-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공간, 잊힌 시간과 그 가치에 관한 이야기

어떤 가치는 미래의 희망과 꿈을 반영한다.


 고등학생이 되었다. 현주와 재덕이는 한영외국어고등학교, 나는 한영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공부를 잘하는 딸을 가치의 조건으로 여기고 계시진 않았던 것 같다. 그랬다면 한 번쯤은 내 딸도 외국어고등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생각하셨을 테니까. 나는 한 번도 꿈꿔보지 못한 꿈을 이룬 친구들을 보면서 그것이 부럽다기보다는 우리 집도 꿈꾸게 만들고 싶다는 어떤 의무감에 사로 잡혔다.


 한영고등학교는 우리 아파트 단지를 조금 벗어난 곳이었고, 나의 세계도 동네를 조금 벗어났다. 고등학교 때 우리 집에 잠깐 들르자고 하면 친구들은 “안 돼. 너희 집은 시골이라 못가.”라며 놀렸다. 나는 “우리 동네가 얼마나 좋은데, 다들 안 살아봐서 하는 소리야. 공기가 좋다.”라고 받아쳤다. 실제로 그랬다. 택시기사들은 상일동에 가자고 하면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동네가 서울 시내보다 2~3도는 온도가 항상 낮아요. 정말 공기 좋죠.” 


 사실 친구들의 말도 다 맞았다. 변두리의 아파트는 이제 고장이 나도 아무도, 아무것도 보수를 하지 않는 곳이 되어 버렸다. 건물의 외벽은 갈라지고 페인트는 벗겨져 있다. 놀이터의 놀이기구들은 녹이 슨 채로, 고장 난 채로 몇 년째 그대로다. 우리 집 화장실도 이곳저곳 고장이 났지만 공사를 할 수는 없다. 언젠지는 모르지만 곧 재건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낡게 보여야 다시 지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새 아파트가 되길 무작정 기다리는 부모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희망고문 같은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새집에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이미 성장한 고등학생은 아기자기하게 방을 꾸미는 것도 귀찮아졌다.  

   

 나에게는 새집의 의미가 희미해졌지만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더 의미 있는 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집은 세월이 흐르고 낡아갈수록 그 가치가 올랐다. 정말 이제는 당장 내일 재건축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낡아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아파트에 기대하는 바는 점점 커져만 갔다. 집을 내놓지 않겠냐는 부동산의 전화를 심심하지 않게 받던 시절이었다. 


 낡아갈수록 가치를 인정받는 존재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물건의 가격에는 그것의 미래와 희망, 꿈같은 것들이 반영되어 있었다. 나라는 존재도 미래와 희망, 꿈같은 것들을 충분히 품을 수 있는 나이었기에 그 존재 자체로 빛이 나던 시절이었다.     



다시, 안전의 욕구.


 그렇게 대학생이 되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수능성적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재수를 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럴 형편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재수는 내 가치의 조건에는 부합하지 않는 옵션이었다. 열심히, 그리고 잘하는 것만이 나를 가치롭다고 느끼게 했다. 내가 대학생이 되자 우리는 형편상 집을 팔았기 때문에 정말로 재수할 형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2004년. 우리는 상일동의 집을 처분하고, 이사를 나왔다. 아빠는 2년 정도 전세를 살면 다른 새집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새로운 꿈을 꾸게 되는 것도 같았지만 어떤 상실감 같은 것이 크게 느껴졌다.


 대학 새내기 생활이 즐거웠기에 더 이상 집이 중요하진 않았다. 이사 간 동네는 변두리가 아니어서 서울 시내와 좀 더 가까웠기 때문에 학교를 오고 가기도, 20대가 즐기기에도 여러모로 훨씬 편리했다. 그렇게 상일동은 잊히는 것 같았다.


 하위욕구의 충족에 의해 상위욕구가 발전하여 행동에 영향을 미치더라도 하위욕구에 불만족이 생겨나면 우리의 행동은 하위욕구의 충족을 위해 퇴행된다. 나는 애정의 욕구, 또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만족하기 위해 애쓰는 20대의 청년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내면의 불안함이 일고 있었다. 그것은 낯선 곳에서 울음을 멈추지 못하던 예전 그 6살 아이의 불안함 같은 것이었다. 나는 상일동을 떠난 이후로 서서히 다시 안전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고 있었다. 


 IMF를 겪은 후, 교육대학교에 입학하는 열풍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한 시대의 흐름은 나의 안전의 욕구와도 일치했다. 교사가 되어서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상일동에 집 한 채 정도는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부모님이 그래오셨던 것처럼 소박하지만 열심히 살 수 있을 법한 미래를 그릴 수 있었다.


 선택의 순간에 나는 늘 생각한다. 조금 더 효율적인 일을 찾는다. 나에게는 길을 잃거나 돌아갈 만한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에게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길을 잃지 않는 유능한 첫째 딸은 어려운 집안의 희망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 집에서 내가 선택한 나의 가치의 조건이었다. 유학, 어학연수를 다니며 소위 ‘스펙’을 쌓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다시 수능시험을 준비해서 교대에 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해외로 가서 견문을 넓히는 친구들의 모습이 20대의 자기실현에 가까운 모습으로 보였고, 나의 선택은 후퇴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성장욕구보다는 결핍욕구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가치의 조건을 지니고 사는 일.     

 가치의 조건을 부과한 영역에서 실패가 발생하면개인은 더 많이 혼란하고 더 많은 동기를 잃게 된다자신에 대한 가치의 조건을 지니고 사는 일은 그 대가로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게 만든다

                                                                                                                            -Crock & Knight, 2005    


 나는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이 나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수능을 다시 본다고 하는 무모한 딸을 부모님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셨다. ‘장녀’로서 유능하게 살아가는 것은 부모님의 소망이었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딸을 사랑하는 조건은 아니었다. 부모님께서는 내게 무조건적인 존중을 쏟고 계셨지만 나 혼자만이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의 조건을 만들어 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수능을 다시 보고 싶어.”라는 욕구를 이야기했을 때, 그제야 비로소 ‘무조건 존중받는 존재‘였던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내가 늘 실패를 망설이고 두려워하여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없던 것은 가치의 조건을 지니고 사는 일에 대한 대가였다.


 그렇게 두 번째 대학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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