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으로 족하다.
할머니 71년생, 딸 92년생, 손녀 13년생
딸이 21살에 미혼모인 상태에서 엄마의 집에서 딸을 출산하였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출하였고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42살의 할머니는 소식마저 끊겨버린 자신의 딸이 낳은 딸을 손녀가 아닌 자신의 딸로 키웠다.
손녀도 할머니가 엄마인 줄 알고 자라났다.
하늘 아래 의지할 곳이라곤 서로밖에 없었던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며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았다.
아이가 학교를 들어가면서 엄마가 없으니 어려운 점이 하나 둘 생기긴 했지만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아이가 6학년이 되어 학교에서 추천하는 어느 장학재단에 장학금을 신청하니, 아이 명의의 통장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친권자가 아니어서 통장을 만들 수가 없었고, 결국 장학금을 신청하지 못하게 되었다.
12년 동안 홀로 애지중지 키웠는데 할머니는 그 아이의 통장하나 만들 수 없다 하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곤 손녀이자 딸이 된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아이의 엄마이자 자신의 딸을 아이의 인생에서 지워주어야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법률구조공단의 도움을 받아 법원에 친권상실심판청구를 하였다.
할머니는 친권상실 소송을 진행하면서 자신의 딸의 주소를 알게 되었고 연락도 닿게 되었다.
놀랍게도 딸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왜 그동안 한 번도 연락이 없었는지, 찾아오지도 않았는지 하는 원망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딸에게 네가 낳은 딸을 내 딸로 잘 키우고 있고 앞으로도 우리 둘이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싶으니 친권포기를 해달라는 말만 전했다.
딸이 답변서를 제출했다.
딸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답답함에 엄마와 지수를 두고 가출한 뒤 10여 년 만에 법원 문제로 엄마와 연락이 되었습니다.
엄마와 대화를 해보니 지수는 엄마를 자신의 엄마로 알고 있다 하고,
엄마도 지금처럼 살고 싶다 하셨는데 법적으로 할머니라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후견인이 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엄마는 그냥 지금처럼 서로 행복하게 살고 싶다 하셨습니다.
저는 현재 결혼하여 11살 딸과 13개월 딸아이를 키우고 있어요.
그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저만의 자유만을 위해 도망쳤는데...
지금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철없고 무책임한 행동을 하여 엄마한테도 지수한테도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미안해요.
판사님, 지수가 할머니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저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 그 아이의 인생에서 깨끗하게 지워주세요.
저는 마음속으로나마 죽을 때까지 지수의 행복을 빌고 용서를 빌겠습니다.
PS: 시부모님은 지수의 존재를 모르셔요. 빠른 판결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친권상실이란 것은 아이의 복리를 심각하게 해칠 우려가 있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인정되는 제도이다.
따라서 조심스럽고도 신중하게 접근하여야 한다. 그래서 아이와 친부모, 그리고 관련자들의 면접조사가 필수적으로 선행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엄마의 답변서를 보고 고민이 더 깊어졌다.
어떡하나... 친권상실사건이니 면접조사를 하긴 해야 할 텐데...
그러다 이제 겨우 자리 잡고 살고 있는 젊은 엄마의 숨겨진 과거가 시댁에 들켜버리면 어떡하지...?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일단 재판기일에 할머니를 좀 심문해 본 이후에 조사여부를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어려운 고민의 해결은 미래의 나에게 미뤄두고 기록을 덮었다.
재판기일.
사건을 호명하니 중년의 여성이 나와 앉는데 그 옆으로 초등학생 여자아이도 슬그머니 따라 앉는다.
설마... 지수...?
그랬다. 아이가 함께 법정에 나온 것이다.
너무 놀라 "지수니?"라고 묻는 나의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럽게 옆에 앉아있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지수가 어떤 사건 때문에 나온 지 알고 있나요?"
그녀는 "네"라고 대답했고, "지수에게 이야기를 하셨나요?"란 나의 물음에 그렇다고 답했다.
정말 너무 놀랬다.
보통 이런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경우 일반적으로 아이에게는 비밀에 부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너무 놀라 진정되지 않았지만 애써 감추며 태연한 척 지수에게 물었다.
"지수야, 할머니한테서 이야기 듣고 너무 놀라지 않았어?"
"놀랬어요"
"그랬지? 판사님이라도 정말 놀랐을 것 같아. 근데 지수는 이제 엄마가 할머니가 되었는데 괜찮아?"
"네 괜찮아요"
아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약간의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흔들림이 없었다.
너무 놀라웠다.
이제 12살의 여자아이가 어쩜 저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지?
할머니에게 물었다.
도대체 아이에게 어떻게 이야기했길래 아이가 저렇게 의연할 수 있는 것인지 정말 궁금했다.
할머니는 자신도 정신이 없어서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저 엄마가 아닌 할머니가 되었다고 해서 지수에 대한 사랑이 달라지는 것은 전혀 없고 우리는 이대로 똑같이 살아가면 된다고 이야기한 것 같다고 쑥스럽게 웃었다.
다시 지수에게 물었다.
"지수야, 지수 낳아준 엄마가 따로 있다는 이야기 듣고 지수의 마음은 어땠어? 막 밉거나 원망스럽진 않았어?"
"네 괜찮았어요. 엄마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그때부터였다. 마음에 심한 진동이 일기 시작한 것이.
"지수야. 넌 정말 멋진 아이구나. 어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판사님이 너라면 절대 지수처럼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너 정말 멋지다"
나도 모르게 아이를 향한 진심 어린 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아이는 쑥스러운지 옅은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보았다.
"지수야,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같은데서나 보던 출생의 비밀을 네가 가지고 있잖아. 그건 정말 특별한 거야. 넌 정말 특별한 아이란 거지.
그리고 판사님 생각에 지수엄마가 지수를 낳았을 때는 너무 어려서 집을 나가긴 했지만 지수를 버린 것이 아닌 건 분명한 거 같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저한테는 할머니가 있어서 괜찮아요."
"판사님은 우리 지수가 어떤 어른으로 자랄지 정말 너무 기대가 된다. 지수야... 나중에 사춘기가 오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에 지수는 참 멋지고 특별한 아이이고 어떤 어른으로 자랄지 기대하는 판사님이 있다는 것도 꼭 기억해 줘."
도저히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방청석에 있던 저 어느 이들도 나처럼 감당 못할 눈물의 무게에 고개를 떨구었다.
한 사람으로 족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사연 앞에서도 아이를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은, 보석처럼 빛나게 하는 것은, 세상을 향해 미소를 가지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말이다.
그 사람이 할머니인지 엄마인지는 중요치않았다.
한 사람 어른의 절대적인 사랑이 아이의 슬프디 슬픈 과거마저도 특별한 무기가 되게 만들어준다.
정말이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