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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의미 3

엄마를 부탁해

by 정현숙

가사조사를 하던 날, 어김없이 남편은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조사실에 들어섰다.

조사관이 가사조사는 당사자를 조사하는 절차라고 설명하여도 본인도 당사자라며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한다.

아들에게 불리한 행동임을 고지하며 강하게 경고하자 그제야 한발 물러서며 조사실을 나간다.


아내와 남편의 조사를 마친 이후 할아버지는 조사관에게 할 말이 있다며 다시 눈을 치켜뜬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대를 잇기 위해서 우리 아들이 손자 키워야 해.

손자는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 사람과 살아야 하고 베트남 사람은 베트남 사람끼리 살아야지.

만약 엄마가 손자를 키운다면 대를 물러주지 못하게 되니 오히려 보상금을 받아야 하고 양육비를 한 푼도 줄 수 없으니 그런 줄 아쇼!!!!"


가사조사관은 남편에게 다음 기일은 아들을 만나는 면접조사기일이니 절대 아버지와 함께 오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그러나 역시 할아버지는 아들을 따라 법원에 왔다. 왜 아버지와 함께 왔냐는 조사관의 물음에 아무리 이야기해도 따라나서는데 어떻게 하느냐면서 눈을 피하며 볼멘 대답만 내뱉는다.



엄마와 면접교섭실에서 잘 놀던 동우는 오랜만에 만난 아빠 앞에서 얼음 상태가 되었다.

아빠가 면접교섭실로 들어오며 "많이 컸네. 아빠한테 왜 전화 안 하노? 엄마가 하지 말라 하제? 다 알고 있다"라며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놓았고, 동우는 어색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아빠는 "말할 거 없어?"라고 묻자 동우는 "네"라고 대답하며 또다시 한참의 침묵이 흐른다.

아빠는 다시 "오랜만에 봤는데 할 말 없어?"라고 묻고 동우는 없다고 대답한다.

보다 못한 조사관이 개입하여 아빠에게 아들한테 할 말이 없냐고 물어보자, "뭐 그냥 얼굴 보러 온 거지 별거 없어요..." 라며 얼버무린다.


자율적 면접교섭이 불가능할 것이라 여긴 조사관은 동우에게 아빠와 활쏘기 경기를 해 볼 것을 권유하며 점수 내기를 해보자고 했고 동우와 아빠는 어릴 적에 해본 거라며 웃음을 띠고 경기를 시작했다.

동우가 먼저 화살을 쏘고 아빠가 옆에서 훈수를 두었다. 아빠의 차례가 되자 이번에는 동우가 활을 주워주며 아빠에게 훈수를 두며 서로 대화가 이어졌다.

동우와 아빠 사이에 온기가 솔솔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의 따스함은 곧 사라져 버렸다.


"왜 자꾸 기다리라고만 하고 못 만나게 하냐고!!!!"


할아버지가 면접교섭실 문고리를 돌렸고, 조사관이 문을 열자 들어와서는 막무가내로 고함을 질러댔다.

"아버님, 오늘은 동우하고 아빠가 만나는 날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이 소송도 내가 주도하고 내가 하는 건데, 내가 왜 못 봐. 이런 우라질!!!!!

동우 너 이놈, 왜 엄마하고 있고 집에 안 오는 거야? 주말에 집에 와. 알겠지? 알겠냐고? 대답해!!"

"... 시간이 되면요..."


조사관이 할아버지에게 더는 말하지 말고 나가라고 하면서 남편에게 데리고 나갈 것을 재촉하였으나, 할아버지가 끝까지 버티며 나가지 않자 남편은 혼자 슬그머니 면접교섭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곧 신발을 벗고 올라와 동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깜짝 놀란 조사관이 아이를 데려가지 못한다며 팔을 벌려 동우 앞을 가로막자, 할아버지는 내 손자를 왜 못 데리고 가냐면서 조사관의 오른손을 꺾으며 오른쪽 턱을 때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가사조사관의 계속되는 비명에 처음에는 모른 척하던 남편이 사태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제야 조사실로 들어와 자신의 아버지를 데리고 나갔다. 나가면서도 할아버지는 조사관을 향하여 "네가 뭔데 왜 내 손자 못 데려가게 해. 동우야 가자"고 소리쳤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동우는 눈물을 흘리며 조사관에게 ”미안해요. “라며 사과를 했고, 엄마는 동우에게 "할아버지가 너무 무서워서 들어올 수가 없었어. 미안해 동우야"라며 아이를 안고 함께 서럽게 울었다.



가사조사보고서를 덮으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추기가 너무 힘들었다.

이길막 이 자가 정말...

그 자는 끝끝내 동우에게 다시 큰 상처를 주었고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그것도 어느 곳보다 안전해야 할 법원에서 말이다.

내가 그렇게까지 말도 안 되는 선처를 해주면서까지 지켜주고 싶었던 동우에게, 그깟 피가 섞여 있다는 명분으로 말 못 한 아픔과 부끄러움을 심어주었다.

도대체 어떤 대를 잇게 하고 싶다는 것인가.

나보다 약한 사람을 무시하고, 때리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모든 질서와 법을 무시하는 안하무인적 사고를 물려주고 싶다는 것인가.

같은 어른으로서 지켜주지 못한 동우에게 부끄럽고 미안한데, 그 아이가 어른을 대신하여 사과를 하고 있었다.


201호 이혼법정.

2025드단137689호.

사건번호를 호명하자, 10살 훤하게 생긴 소년이 베트남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자리에 함께 앉았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아이에게 "동우, 오늘 엄마랑 같이 오려고 학교에 안 간 거야?" 하고 웃으며 물었지만, 아이는 여전히 낯선 장소, 낯선 기운에 눌려 어색하게 앉아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동우, 오늘 하루 학교 땡땡이쳐서 좋겠네. 그치?"

나의 짓궂은 질문에 그제야 아이는 웃음을 띄우며 내 눈을 보며 "네"하고 대답한다.

그 맑은 웃음에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자신들이 면접교섭실에서 한 짓이 걸렸는지 피고 이만수와 그의 부 이길막은 출석하지 않았다.


"동우야, 지난번에 법원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많이 놀랬지?"

나의 물음에 동우는 잠시 멈칫하다가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네... 원래는 엄마가 아빠를 만나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해서 아빠를 만날까 생각도 했었지만, 할아버지가 무서워서 다시 아빠를 만나고 싶지 않아졌어요"


"그랬구나... 그날 할아버지가 법원에서 한 행동은 정말 잘못된 행동이야. 동우가 조사관 선생님한테 대신 사과했다는 말도 판사님이 전해 들었어. 동우는 사과할 줄 아는 정말 멋진 사나이구나 생각했어."


판사의 엄지척에 아이의 얼굴이 보석같이 빛났다.

"동우야~이제 오늘이 마지막 재판날이야. 판사님은 동우가 엄마랑 사는 것이 맞고 엄마는 비록 베트남 사람이지만 동우의 법적 보호자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판단했어. 그러니까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나의 말에 아이의 얼굴에 깊은 평안이 서려졌다.


"동우야~ 그런데 판사님이 동우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엄마는 머나먼 베트남에서 와서 동우를 낳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멋진 분이셔. 그렇지만 한국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힘든 점들도 있으실 거야. 엄마가 동우의 법적 보호자이긴 하지만, 동우는 씩씩한 대한의 아들이니까 엄마를 잘 지켜주어야 해. 할 수 있겠지?"

동우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판사님은 우리 동우가 얼마나 멋진 사나이로 자라날지 정말 기대가 된다"


옆에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던 베트남 엄마에게도 아들을 저렇게 잘 키우느라 고생 많았다고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주었다.


아들과 둘이서 거친 삶을 살아갈 베트남 엄마에게,

그리고 사과할 줄 아는 동우에게 더 이상 눈물 흘릴 일이 없기를...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를...


동우야~~ 엄마를 부탁해~~



국제결혼이 많아지면서 다문화가정의 이혼사건도 무척이나 많다. 대부분은 나이 많은 한국인 남편과 젊은 외국인 아내인 경우가 압도적이다


어떤 이들은 열심히 살고자 노력하는 어린 외국 신부들을 돈을 벌 목적으로 왔다며 색안경을 끼고 보기도 하고, 어떤 남성은 어린 신부를 지극히 사랑해 주고 아껴주었지만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국적이나 나이, 성별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에 대한 예의가 있고 없음의 차이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수단화하지 않고, 그의 처한 상황을 이해해 주며 그 사람을 존재 그 자체로 인정해 주는 것.

그것이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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