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 앞에 선 남자가 커다란 화면 앞에서 음료 주문을 시작한지 한참 지났다. 이 커피숍은 나같이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게 딱 맞는 곳이다. 아니 그랬던 곳이었다. 적어도 주문용 키오스크 기계가 들어서기 전에는 그랬다. 이 골목은 아파트 단지 뒤편을 둘러싸고 오래된 세탁소와 나이든 아줌마들이 주로 찾는 미용실, 주민들에게 여전히 점방으로 불리는 작은 가게, 그리고 이 커피숍이 모두인 공간이다. 낮에는 햇살이 정면으로 내리는 남향이고, 차량 통행은 드물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며 새로운 4차선 도로가 생긴 탓에 이 골목은 가끔 주차할 공간을 찾는 차량들이 두리번거리며 들어왔다가 투덜대며 빠져나가는 장소일 뿐이다.
앞에 선 남자는 아직도 연신 화면을 누르고 있다. 뭔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웅얼거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기색은 없어 보인다.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던 카운터 안쪽 젊은 여자아이가 흘낏 쳐다보기 시작했다. 못 보던 얼굴인거 보니, 김사장이 아르바이생을 구한 모양이다.
“손님, 제가 주문 도와드릴게요.” 스마트폰을 카운터에 내려놓으며, 여자아이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냐. 나 카드 있어.” 왜소한 체형에 비해 굵은 목소리를 가진 남자는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인다. “이런거 갖다놨으면 이걸로 하란 얘기잖아. 그러니 해야지.”
다소 높은 톤의 볼멘 목소리에 커피숍 내부에서 모두 들어보라는 의지가 보인다. 그래봐야 뒤에서 기다리는 나 빼고는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월요일 오후 2시. 커피숍 내부는 물론 골목까지, 재래식 주택 마당에 널려 바람에 흔들리는 빨래 빼고는 분주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카운터로 발길을 돌렸다. 여자아이에게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며, 천원짜리 세 장을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왜 반말이야 정말.” 여자아이는 키오스크 앞의 남자에게 눈을 흘기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시고 가실 거죠?” 내게 물어보지만, 손은 선반 위의 머그컵에 이미 닿아있다. 왜 가져갈 거라는 생각은 안했을까 모르겠다.
“예. 마시고 갈겁니다.” 최대한 정중히 대답했다. 대답이 끝나자마자 커피머신은 이미 요란한 소음을 내며 원두를 갈아내고 있었다.
돌아서서 앉을 테이블을 찾았다. 이렇게 햇빛이 좋은 날에 내가 즐겨 찾는 테이블이 있기 때문이다. 내부를 두리번거리는 사이 커피는 자판기 버튼을 누른 것처럼 빠른 속도로 나왔다. 아르바이트생은 나이는 어려보이지만, 커피를 내리는 일은 능숙해보였다. 쟁반은 사양하고, 여기저기 긁힌 자국들이 많은 머그컵을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남자는 아직도 화면을 누르고 있다. 측면에서 보니 하얗고 숱은 없지만 제법 단정한 머리와 구김이 덜한 회색 면바지, 때 묻지 않은 흰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입 꼬리가 쳐지고 앙다문 모양새였다. 그을리지 않은 피부와 엉거주춤하게 살짝 휜 허리는 그가 실내에서 평생 일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제기랄. 커피 한잔 마시기 더럽게 힘드네.” 남자의 눈에 살짝 핏발이 선 것으로 보였다. 화면을 누르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는지 벽에 고정된 키오스크가 살짝 흔들리기도 했다. 지금쯤 화면에 표시된 친절한 안내 문구들은 이미 소용이 없어졌을 게 분명하다. 그래도 남자는 멈추지 않는다. 무언가를 반복해서 계속 누르고 있다. 힘이 들어간 손가락 놀림이 더 분주해지고 있었다.
“손님. 그렇게 하시면 그거 고장 나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심드렁했던 여자아이 표정에 긴장감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바쁘게 만지며 시선은 반복해서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저 기계가 생긴 후 이 커피숍을 찾는 노인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키오스크 사용에 성공한 부류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 커피숍 김사장은 페인트가 다 벗겨지고 군데군데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이 건물주인 박노인의 첫째 며느리이다. 박노인이 지난해 세상을 뜨고 난 후 김사장은 간판을 바꿨고, 키오스크 기계를 들였으며, 다음 달엔 무슨 이유에선지 테이블마다 전원 콘센트를 설치하는 공사를 하겠다고 했다.
여자아이의 배려는 이미 뒤늦은 친절이 되었다. 남자의 오른손은 화면 위에서 여전히 망설임과 확신과 주저함을 반복하고 있었다. 남자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듯싶더니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왼손을 꺼냈다. 손 안에는 신용카드가 끼워져 있었다. 신용카드를 쥔 손등에는 핏줄이 두드러져 올라와있었다. 마침내 성공한건가 싶었다. 하지만 남자는 오른 팔에 힘이 빠졌는지 손을 천천히 내리더니 계산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화면 쪽으로 천천히 돌렸다. 화면을 바라보는 남자의 입 꼬리가 더 처져보여서 얼핏 보면 울음을 참는 어린 아이 같아 보였다. 신용카드를 쥔 손가락들을 힘주어 오므려서 카드가 휘어질 것 같았다.
남자를 바라보는 나, 반대쪽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여자아이. 그리고 다시 화면을 응시하는 남자. 모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어색하고 거추장스러운 정적을 깨버린건 종소리였다. 날카로운 종소리와 함께 커피숍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어머 손님. 그러시면 안돼요. 이쪽으로 나와서 잠깐만 계세요. 제가 눌러드릴게요.” 김사장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곧장 남자에게로 향한걸 보면, 여자아이가 문자로 상황을 알린 모양이었다. 지난해 시아버지 상을 치른 김사장은 유독 얼굴이 밝아졌다. 재개발된 반대편 신시가지에 새로운 가게를 열거라고 얘기한 기억이 난다.
“어려우시죠? 처음에만 그래요. 어떤거 드시겠어요. 제가 누르면서 알려드릴게요.” 김사장의 목소리가 평상시보다 커진걸 보면, 다급하게 달려온 것 같았다.
남자는 김사장의 억지웃음과 키오스크 화면의 커피잔 사진을 번갈아 쳐다볼 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다시 내려앉은 정적. 여자아이는 김사장이 등장한 뒤로 다시 스마트폰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김사장의 표정은 어색한 웃음을 띤 상태로 멈추었고, 한손은 언제든 시키는 대로 움직이겠다는 듯이 들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시선은 남자의 신용카드를 쥔 손에 고정해두었다. 분홍색 카드가 남자의 손 안에서 점차 둥글게 말려 중간에 하얀색 선들이 그어지고 있었다.
“됐소. 다음에 오리다.” 긴장감으로 올라가 있던 남자의 어깨가 조금씩 제자리로 내려오고 있었다. 손안에서 꺾여버린 신용카드는 주머니로 돌아갔다. 천천히 입구로 걸어가는 남자의 흰 운동화가 왁스칠한 바닥에서 삑삑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문이 열리며 아까와 달리 종소리는 간결하게 울리고 다시 정적을 유지했다. 김사장은 에휴 하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양쪽으로 흔들며 계산대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는 분이세요? 여기 오는 나이 드신 분들 대부분 사장님이 아시는 분이라면서요.”
“아니, 저분은 처음 봐. 최근에 이사 오셨나?”
“요즘 주민센터에서 노인들에게 무인기계 사용법 교육도 해준다는데. 그나저나 저거 화면 좀 닦아야겠다.”
커피가 아직 절반이나 남았지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누르던 키오스크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화면엔 고동색 원두 콩들이 흩어진 테이블 위에 커피잔이 놓여진 사진이 떠있었다. 창으로 들어온 5월 햇살이 화면에 반사되고 있었다. 그곳에 남자의 손가락 흔적들이 안개처럼 자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