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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쉬코쉬 Jul 03. 2024

남해여행과 노르웨이의 숲

2020년 12월에 돌이켜본 2년 전 여행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2018년 12월 말 남해 여행 중 들렀던 '아마도 책방'이라는 곳에서 구입했습니다.


당시의 남해 여행은 온갖 스트레스로 내 심신을 지치게 한 서울을 뒤로한 채 도망치듯이 떠났던 여행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현실에 대한 스트레스로 가득했던 도시에서 매 주말의 리프레쉬로는 더 이상 건강한 생활을 이어가기 어려웠죠. 그래서 연말이기도 해서 지난해를 확실히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에 떠났던 여행이 남해 여행이었습니다. 그 당시 겨울철 남해의 모습은 내게 동화처럼 남아있습니다(2년 후에 다시 찾았을 때는 그 느낌이 나질 않더군요). 처량하리만큼 공허한 남해의 모습은 내게 '멈춤'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특히, 남해의 밤은 여느 시골의 밤이 그렇듯 조금 이른 듯, 조금 더 깊은 모습으로 찾아왔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헤드라이트를 켜도 운전하기 무서웠던 그날의 밤들은, 분명 의식이 깨어있음에도 깊은 명상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무려 최고급 패딩을 뚫어내고 깊이 파고든 칼바람은 찌들었던 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습니다. 그 느낌이 꽤나 생소하고 재미있었는지 낄낄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마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 여행에서 내게 필요했던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남해 여행은 완벽했습니다.


이 책은 그 완벽한 여행 중에 구입한 책이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한국에서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이 흥행하지 않아 '상실의 시대(원작: 노르웨이의 숲)'로 제목만 변경해서 출판하면서 소위 대박이 났던 그 책입니다. 읽는다 읽는다 하다가 최근 퇴사를 하고 나서야 읽게 된 책,  그 감상평을 써 보고자 합니다.


일단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든 생각은 '축축하고 쓸쓸한' 느낌이었다는 점인데 그 후 밀려오는 허무함은 꽤나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주인공 와타나베를 둘러싼 인물들의 연쇄적인 죽음들, 초반에는 좀 충격적이었습니다. 당시 나에게 있어 죽음은 삶과는 너무도 ‘이질적’이고, ‘허무’하며, ‘두려운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될수록 '죽음'에 대한 제 인식이 변해갔습니다. 작중 인물들의 죽음이 여전히 불편하고 당황스러웠으나 점점 무뎌져 간다거나, 익숙해져가고 있음을 느꼈죠. 그렇게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인식이 '충격'적인 것에서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순응'의 대상으로 변해갔다는 점이 인상적이더군요. 때마침 소설 후반부, 등장인물들의 대화에서 죽음은 삶과 다른 차원의 개념이 아니라 ‘이미 삶에 내재된 것’이라는 취지의 내용이 나오면서 죽음에 대한 제 인식이 공감받는 것 같았습니다.


소설 속 '죽음'이라는 장치는 아무래도 이야기를 다소 무겁고 우울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묘한 긴장감과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또 다른 기능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흥미로웠습니다. 덕분에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고요(엥... 또 죽는 거 아니지? 그만 죽어...!).


삶과 죽음,

나와 너,

살아서 나오코 곁을 지키려 하는 와타나베와 이미 죽어버린 열일곱의 기즈키를 잊지 못하는 나오코,

생기 넘치게 와타나베 곁에 다가온 '살아 숨 쉬는 존재' 미도리와 '이미 죽어버린' 나오코,

죽음 그리고 섹스.


이렇게 작중 극명하게 대비되는 요소들이 때로는 균형감 있게, 때로는 입체감이 넘치는 느낌을 줍니다. 특히, 이 작품은 '섹스'에 대한 잦고 상세한 묘사가 특징입니다. 그 묘사가 여느 야동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인데(다만 부디 저를 '그런' 전문가로 봐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자는 외설적인 내용 자체에 어떤 의미를 두는 것 같습니다. 불필요하게 남발하는 거 아니냐고요. 제 개인적으로는 소설 속 '섹스의 상당한 묘사'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 생각됩니다. 섹스는 '살아 숨 쉬는 인간들만이 전유할 수 있는 것'으로의 상징이며, 인생의 허무함 속에서 '생(生)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상징'이기도 하다는 점, 나아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더욱 뚜렷하게 생각해 보게 만드는 장치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소설을 읽으며 하나 궁금했던 점은,

소설 후반부에 나가사와가 와타나베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던 충고에 대한 것입니다.


"와타나베, 자기를 동정하지 마. 스스로를 동정하는 행위는 저속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야."


나가사와는 외무성 시험 합격 축하 기념으로 와타나베 그리고 자신의 여자친구인 히츠미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히츠미에게 와타나베에 관해 몇 가지 언급을 합니다.


와타나베는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다,

와타나베는 본인에 대한 얘기를 하는 데 있어서 입이 굉장히 무겁고,

와타나베는 나가사와 자신처럼 자기 외에는 관심이 없다,

마지막으로 작중 초반 소위 '천재'로 묘사되는 나가사와는 웬만해선 곁을 내어주지 않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와타나베에게만큼은 곁을 내어줄 뿐만 아니라 자신과 비슷하다는 나름의 후한 평까지 내린 인물입니다.


그런 나가사와가 구체적으로 와타나베의 어떤 점을 두고 그런 충고를 했던 건지 궁금합니다. 와타나베가 자기를 동정하는 행위는 적어도 나가사와와 '이별'하기 전까지는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또한, 소설은 그런 '거만한' 충고를 했던 나가사와의 '완벽함'을 재물 삼아 인간의 불완전함과 나약함을 여실 없이 드러냈습니다. 작중 히츠미의 죽음으로 절대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완벽한' 나가사와는 히츠미의 죽음에 관하여 와타나베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그동안 굳건하게 지켜온 정체성과 가치관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줬었죠. 개인적으로는 나가사와의 무책임한 중2병이 히츠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생각했던 와타나베가 더 이상 그에게 답장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되는 부분에서는 왠지 모를 통쾌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우울증을 유발하기 위한 소설은 아닙니다. 여전히 희망은 있었죠.


먼저 세렝게티 초원에 지금 막 태어난 새끼 기린을 연상하게 하는 레이코, 그녀가 결국 요양원을 떠나 세상으로 나왔다는 점, 주인공 와타나베가 마지막에 미도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미도리, 너와 함께 하고 싶어'라고 말했던 점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계-즉 '삶의 세계'-에서 살아가겠다는 와타나베의 처절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지금 어디냐는 미도리의 물음에 '내가 지금 어디지?'라고 했던 와타나베의 독백 장면은 레이코와 같은 모습의, 새로운 삶의 탄생 내지는 새로운 시작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이 소설은 희망을 말하고 있지 않나 생각됐습니다.


처음에는 이 소설이 우울하게 내가 사는 현실 세계까지 무겁게 만드는 책이라고 느껴서 부담스러웠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제가 느낀 바들을 글로 써 내려가다 보니 저 역시 이 소설을 '희망'의 소설로 보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네요.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난 희망을 보고 있구나. 난 그런 사람이구나' 하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다행입니다.

코쉬 “다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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