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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워킹맘 May 18. 2024

부부가 함께 차를 마십니다

차 한 잔 할까? 마실 수 있어?


이른 아침, 잠에서 깬 남편이 묻는다. 우리 부부에게는 '술 한 잔 하자'라는 말보다 '차 한 잔 하자'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다. 남편과 나는 타고나길 술에 약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다 두드러기성 혈관염이 생기고 나서 나는 술을 끊었다. 피부 질환에 가장 나쁜 게 술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에는, 퇴근 후 시원한 맥주 한 캔을 사이좋게 나눠마신 적도 있었지만 옛 말이 돼버렸다. 이제 우리 부부는 아침저녁으로 차를 마신다. 아주 제대로 차려놓고 말이다.  


우리 부부이 차 살림. 매일 이곳에서 남편이 차를 우려낸다.


처음에 차를 마신 건 나였다. 어렸을 때부터 위가 약했고, 소화제가 없으면 불안했을 만큼 속병을 오래 앓았다. 차를 마시면 소화가 잘 된다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잘 익은 보이차를 구해 마셨다. 남편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니 차와 쉽게 친해졌다. 남편과는 내가 즐겨 찾는 보이찻집에 함께 다니면서 차를 많이 마셨다.


차를 마시면 말이 없어진다. 이상하게도 커피를 마시면 우리 둘 다 수다스러워지는데 말이다. 오로지 차 맛에 집중하고, 차를 마시면 달라지는 몸과 기분을 느끼려 했다. 좋은 차를 골라내는 미각도 함께 키웠다. 이젠 조악하게 만들어진 차,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차, 오래 숙성되어 편안한 차 정도는 구분해 낸다.  


이 차호에 차를 우려내면 힘이 좋아. 차가 아주 잘 우려 져. 느껴져?


차를 마시면 다구 욕심이 생긴다. 이왕이면 제대로 차 맛을 느끼고 싶어서다. 함께 하나씩 차호와 찻잔을 사 모으며 좋아한다. 최근에 남편이 사 온 묵직한 자사호에 매일 차를 우려낸다. 이번에 마련한 차호는 크기도 크고, 색감도 가장 어두워 중후한 느낌을 준다. 차호가 뭐 그리 중요하냐 하겠지만, 와인을 종이컵에 부어 마실 때의 낯선 느낌을 경험한 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어떤 차호에 차를 우려내느냐가 맛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래전에 내가 장만한 차호와 남편이 들인 차호의 차이를 느끼고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 부부의 대화는 차를 함께 마실 때 가장 길어지고, 깊어진다. 이게 참 좋다.


왜 골프 안 배워? 너희 부부랑 같이 공치고 싶다. 좀 배워봐.

친정 부모님은 하루라도 빨리 골프를 시작하라고 성화다. 큰 딸 부부와 '공 치러 가고 싶다.'라는 부모님의 바람을 외면할 수밖에 없어 죄송스럽다. 부부가 중년 이후에 함께 할 수 있는 취미는 골프뿐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우리 부부는 골프를 시작할 생각도 없다. 언젠간 골프를 배울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같이 보이차를 마시면서 고요함을 즐기고 싶다. 보이차 한 잔에 잡생각도 사라지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을 느낄 수 있으니 우리 부부의 행복은 찻상 앞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부부는 함께 차를 마신다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한 사람이 억지로 따라 하는 게 아니라, 둘 다 좋아하는 일을 함께 즐길 수 있어서다. 남편이 차 우릴 준비를 할 때, 나는 찻물을 끓인다. 서로 손발을 맞춰 맛있는 차 한 잔을 만들기 위해 몰입하는 이 시간이 좋다. 오늘은 차 한 잔을 나누면서 주말에 할 일들을 얘기 나눠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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