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워킹맘 Sep 08. 2024

타이베이에 다녀오다


우리, 차 사러 대만 다녀올까?



퇴근할 때만 되면 머리에서 열이 났다. 하루 업무를 말끔하게 마무리하고 퇴근하면 좋은데 그게 잘 안되었다. 남편과 같이 퇴근할 때면 내 낯빛은 흙빛이 되었다. 남편은 그때마다 정말 괜찮냐고 물었다. 제발 열심히 하지 말라고 내게 브레이크를 걸려고 애썼다. 이렇게 머리에 열이 나면 머리가 터지지 않을까? 웃지 못할 농담도 나누면서 퇴근길에 오르곤 했다. 


그러다 남편이 결혼 15주년 기념을 맞아 대만에 가자고 했다. 그것도 차(茶)를 사러 가자고 말이다. 머리를 뜨겁게 하던 열이 식는 기분이 들었다. 가지 않을 수 있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차를 사러 가자니. 어떻게든 이틀 휴가만 낼 수 있다면 주말과 엮어 갈 수 있었다. 콜! 마침 딱 이틀 여유가 생겼다. 천운이었다. 떠나기 5일 전 비행기표를 샀다. 시어른들께 아이들을 부탁드렸다.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반드시 대만에 가야 했다. 가서 내가 좋아하는 차를 사고, 차를 마시고, 멍 때려야만 했다. 


타이베이 디화제 거리를 걷다 들른 차 전문점


벽면 한쪽을 가득 채운 자사호를 보는 순간, 남편과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 영롱할 수가 있을까. 명품백을 보고도 뛰지 않던 가슴이 이 벽 앞에서 터져나갈 듯 뛰어댔다. 하나씩 천천히 살펴보다 마음에 쏙 드는 것들을 점찍었다. 가격을 물었다. 

얼마예요? 뚜어샤오치엔? 
多少钱? duōshao qián? 


비슷한 품질의 차호를 한국보다 훨씬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것들은 상품 중에서도 최상품이라 200만 원을 호가했다. 잠깐 멈칫하고 남편을 바라봤다. 정말 마음에 들면 사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다음 기회에 구매하기로 하고, 두 눈에 실컷 담았다. 각양각색의 빛깔을 뽐내는 자사호 앞에서 스트레스가 소멸되는 순간이었다. 물건을 꼭 소유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자사호 대신 데려온 찻잔. 타이베이 느낌이 물씬 풍긴다.


대신 우리 돈 8천 원 정도 하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디자인의 잔이었다. 중국 스럽기도 했다. 여행 가면 쇼핑하는 데 소극적인 내가 고민도 없이 골라 계산했다. 차 대신 찻잔이라. 인생은 예측할 수 없다. 차를 사러 왔다가 찻잔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참지 못하고, 차를 우려내 이 찻잔에 마셨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순간이었다. 차, 찻잔, 그리고 남편까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다 모여있는 곳, 타이베이였다. 


이번에 다녀와보니 타이베이는 대만의 가을이 찾아올 때쯤엔 아이들과 다시 찾고 싶은 도시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도 많은 것 같다. 그때는 이번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장소보다도 함께하는 사람들이라 믿는다. 다음엔 차 대신 아이들의 웃음을 잔뜩 담아와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