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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연 Aug 12. 2024

ep4. 수아의 피아노

수아야, 미안해!

"지영아 아니야 아니야  533,422,1234555.라고 몇 번을 말해  솔미미, 파레레, 도레미파솔솔솔  이라고"


마치 진짜 피아노 선생이라도 된 듯 수아는 빨간 색연필을 들어 건반 위를 방황하고 있는

지영이의  뭉툭한 손가락을 툭툭 치며 나무란다. 수아의 답답함 가득 담긴 목소리가 창문 너머까지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지영이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내 손가락인데 왜 내 말을 안 듣냐고?"

짧은 손가락만 탓할 뿐이다.




국민학교 3학년 봄과 여름 어느쯤, 동갑내기 수아가 동네에 나타났다.  수아는 엄마와 둘이 살았다.  

얼마 없는 이삿짐 사이에서 눈에 띈 건  바로 피아노였다. 길이는 지영이 키보다 조금 짧고, 폭은 좁다. 높이는 지영이가 서면 허리보다  높을 것 같다.  나무 뚜껑이 덮고 있는 피아노를 좁은 계단을 통해 아저씨들이 들고 나르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학교에서 본 풍금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수아 엄마는  입고 있는 옷, 머리스타일,  신고 있는 신발까지 이 동네 엄마들과는 그 모양새가 다르다.


화려한 꽃무늬가 있는 펄럭이는 고무줄치마 대신

종아리 중간까지 내려오는 폭이 좁지만 옆으로 살짝 트임이 있는 치마,

긴 생머리를 말아 올리거나 똑같은 모양으로 한  파마가 아닌 

찰랑거리는 단발 생머리,

발 앞부분은 둥글게  막혀있고 뒤는 트인  보라색, 파란색 슬리퍼와는 다른

뒷굽이 있는 반짝이구두를 신고 있다.

수아 엄마는 지영이가 본 이모들 중 제일 예쁜 아줌마다. 엄마를 닮아 수아도 예쁘다.

수아 옆에 있으면 지영이는  살찐 원숭이 같다.


지영이는 수아와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피아노를 만져볼 수 있을 테니까.

지영이의 바람대로 수아는  지영이가 다니는 국민학교로 전학을 왔고, 둘은 단짝이 되었다.


이사 온 지 한참이 지났지만 수아엄마는 동네 이모들과 친해지지 못했다.

수아엄마는 오후에 일을 나가는데 특히 토요일 밤엔 수아 혼자 자는 날이 많았고,

지영이는 그런 수아와 같이 자는 날이  많았다. 일요일 아침이면 수아 엄마가 해 놓은 된장찌개,

수아가 해주는 소시지 구이를 지영이는 내심 기다린다. 또, 눈치 없이 많이도 먹는다.

수아네는 먹는 음식의 종류도 달랐다.

"카레라고? 그게 뭔데?"

처음 카레를 봤을 때, '저게 먹는 거라고?' 먹고 싶지 않았다. 카레의 색이 주는 거부감이었다.

세상에 참 별 걸 다 먹는구나! 진정한 카레의 맛을 몰랐던 지영이다


밤에  일을 나가는 수아 엄마를 두고 수군거리는 입들이 많았다.

지영이는 그게 더 좋다. 그래야 수아네 집에서  잘 수 있으니까. 그럼 그 집 밥을 먹을 수 있으니까.

수아 아빠가 어쩌고. 수아 엄마가 어쩌고 , 지영이는 듣고 싶지 않았고, 수아가 들을까 봐 겁이 났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고 지영이가 그곳에서 이사 가는 날까지 아무도 수아 엄마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지영이도 수아에게 아빠에 관해서 또는 엄마가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 않는다. 그건 어른들의 궁금증일 뿐이다. 수아가 보여준 사진 속의 수아 아빠도 참 잘 생겼다.

사진을 보여주며 수아는

"아빠가 보고 싶은데 지금은 보러 갈 수가 없어, 나중에 나중에 엄마랑 같이 갈 거야"

묻지도 않은 말에 혼자 대답한다.




토요일 오전수업을 마치고 둘은 또 같이 잘 준비를 한다. 평소에 수아는 피아노를 잘 치지 않는다.

"피아노는 엄마 거야. 나보다 엄마가 훨씬 잘 쳐. 나도 엄마한테 배웠거든."

수아와 수아 엄마는 이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다. 어린 지영이도 이런 생각을 했는데, 말 많고 탈 많은 이모들의 모임에선 어떤 말들이 오고 갔을까.


그날, 지영이는 수아의 피아노 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양손을 동시에 사용하여 피아노 건반을 마음대로 누르고 다니는 수아의 모습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지영이의 뭉툭한 손가락과는 너무 다른 희고 가늘고 긴 손가락의 움직임이 신기하다.

손가락을 저렇게도 움직일 수 있구나!

음악의 '음' 자도 모르는 지영이지만 건반이 눌릴 때 나는 소리가 너무 좋았다

수아는 그날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곡을 연주해 주었다.

"수아야, 나 피아노 좀 가르쳐 주라."

그날부터다. 수아가 무서운 선생님  역할놀이를 시작한 건.


수아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지영이는 살찐 짧은 손가락에 1부터 5까지 번호를 붙여 수아의 호령대로 533,422,1234555를 반복연습한다.

겨우겨우 나비야! 한곡을 완성하는데 수아에게 먹은 욕은  교항곡을 배운 것 같은 양이다.

두 번째 곡은 솔솔라라 솔솔미-학교종이 땡땡땡이다. 세 번째 곡은 젓가락 행진곡, 그리고 네 번째 곡은 엘리제를 위하여 앞부문 오른손 연주만...


그렇게 아이들은 시간에 맡겨졌고, 지영이가 그곳을 떠나 이사했다.

수아는 아직 그곳에 있었지만, 지영이는 한 번도 수아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곳에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수아야,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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