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연 Sep 05. 2024

냉장고 고쳐주는(?) 남편

어때요?

밤 9시 30분!

우리 부부가 퇴근하고 집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이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먼저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선다. 그런 남편을 따라 들어오며 내가 말한다.

"날씨가 뭐 이래 미쳤어 땀이 줄줄 흐르네, 빨리 에어컨 켜"

걸어서 퇴근하는 나는 이 밤에도 푹푹 찌는 날씨 탓에 땀으로 범벅이 된다.

"또, 명령이네. 좀 예쁘게 말하면 안 되냐?"

순간 아차 하는 마음에 찡그린 얼굴을 바로 풀고 부드럽게 다시 말한다.

"에어컨 좀 빨리 켜 주세요, 남편님"

자가용으로 퇴근하는 남편은 나보다 덜 더운지 느긋하게 에어컨을 켜며 내 말투를 흠잡는다.


견디기 힘든 더위가 계속되니 체력이 잘 회복되지 않는다.

에어컨을 켜고 자면 서늘한 공기 때문에, 끄고 자면 더위 때문에 잠을 설치기 일쑤다. 누적된 피로에 일찍 씻고 누워야지 생각하며, 시원한 물이나 한잔 마실 요량으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내 눈앞에 보이는 어둠. 냉장고 안이 캄캄하다.

"어?  자기야. 우리 오늘 일찍 자긴 틀렸다."

"왜? 뭔데? 무슨 사고 쳤어?

"냉장고가 고장 났어. 냉동실 음식 정리 해야겠어"

반은 울먹이고, 반은 짜증 내며 말한다.


13년 된 냉장고는 갈 때가 되었다는 듯 얼마 전부터 가끔 이상한 소리를 내며 힘들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학대시킨 결과가 오늘 나타난 것이다.


여느 부부 같아도 우리와 같은 행동을 했을까?

전기 전자를 전공한 남편은 바로 창고로 가 전기 검침기를 가지고 온다. 우리 집 창고엔 어지간한 전기 관련 용품들이 자리 잡고 있다. 몇 해 전엔 '오실로스코프'를 중고시장에서 꽤 괜찮은 값에 판 적도 있다.  아마 남편의 창고를 뒤져보면 팔 만한 것들이 더 나올 수도 있다.  

"아휴, 이 밤에 이거 뭐 하는 짓이냐"

투덜대며 의자를 밟고 올라가 냉장고 위 철판으로 덮어놓은 부분을 뜯어낸다. 이럴 때, 남편의 모습은 좀 멋있지만, 내가 말로 표현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여러 색의 전선이 엮여 있는 곳 하나하나 검침기를 대보고 전류의 흐름을 확인한다. 전류의 흐름이 이상 없음을 확인한 남편은 냉장고를 끄집어내고, 이번엔 뒷면 하단에 붙어 있는 판을 해체시킨다.

"으악, 자기야. 와서 이거 좀 봐"

냉장고 뒷면은 말 그대로 먼지 무덤이었다.

풀칠을 해 정성스레 덧 발라 붙여놓은 것 같은 먼지 더미는 한 올 한 올 실로 어도 될 듯 보인다.

"어쩜, 이렇게 될 때까지 놔뒀냐? 고장 날 만했네"

나를 나무라는 말투다

"세상에, 이거 터지는 거 아니야?"

나는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남편의 핀잔을 뒤로하고 주섬주섬 청소 준비를 한다. 냉장고 뒷면 청소가 오롯이 내 몫이라면 저건 나의 잘못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건 분명 공동의 몫이지 않을까?  청소란 것은 해도 티 안 나고, 안 하면 더 티 나는 것  참, 나랑 안 맞는 골칫거리다.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직면한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서둘러 냉장고 하단부의 족히 5센티미터는 쌓여 있는 먼지를 걷어내고 냉장고 뒷면의 열기를 젖은 물수건으로 식혔다. 먼지로 덮여 숨이 멎은 냉장고에 부지런히 응급 처지를 했다.

"전기적으론 문제없는 것 같으니까, 여기 청소해 보고 안되면 낼 기사 불러"


냉장고 고장이라니 염두에 두지 않은 일에 돈이 들어가야  된다는 생각에 잠시 멍 해진다.

귀찮음도 함께.


잠시 후, 남편은 냉장고 코드를 다시 꽂는다.

띠리링!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감동이다. 냉장고 안 불이 훤하게 켜졌다.

"와!, 내 남편 멋지다. 못 하는 게 뭐야? 돈 굳었네. 자기 은퇴하면 우리 전파상 하나 차려서 노후 생활비 조금씩 벌면 되겠다."

하며 입에 발린 칭찬을 잔뜩 퍼부어 준다.

"돈 아껴줬으니까 나한테 잘해, 아~~ 피곤해 죽겠네"

너스레를 떨며 씻으러 들어간다.  이런 너스레는 남편의 주특기다.

'청소는 내가 했는데, 왜 저래?'

나는 속으로 웅얼댈 뿐, 잔뜩 올라가 있는 남편의 어깨를 내리는 말을 하진 않는다.


남편은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다. 가전제품, 자동차, 전기 관련 모든 것, 심지어 욕실 누수문제까지 척척 해결한다. 단종이 되어 부품을 구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청소하고 문제점 찾아 헤매느라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 오늘도 일직 잠들기는 실패했지만, 남편의 손길에 우리 집 냉장고의 생명이 당분간은 연장되었으니, 칭찬받아 마땅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몸으로 때우는 며느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