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1. 책에 대한 간단한 후기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작품이다. 오래도록 꼭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어서 하루 만에 책을 몰아서 다 읽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한강의 작품인데, 한강 작가의 특유의 분위기는 읽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곤 한다. 작품들이 아픔을 직시하는 스타일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오랜 시간 이 책을 음미하지 못하고, 장면들이 계속 머리에 떠올라 책에 관해 글을 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며칠 만에 생각의 매듭을 이을 수 있었다.
2. 줄거리
이 책은 3부에 걸쳐 영혜의 주변인물들이 그녀에게서 일어나는 사건을 바라보는 소설이다. 1부는 어느 날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된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에서 사건이 진행되는데, 그는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까지 오로지 채식만 먹는 이유가 단지 꿈 때문이라는 아내의 말을 수긍하지 못한다. 그는 그녀의 가족들을 불러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장인이 영혜에게 강제로 고기를 먹히자, 그녀가 식칼로 자해하는 모습을 보곤 결국 이혼한다. 2부는 영혜의 형부의 시선에서 전개되며, 그는 영혜에게 몽고반점이 있다는 아내의 말을 듣곤, 갑자기 그녀에게 성적 욕망을 가지게 된다. 영상작가였던 그는 영혜에게 그녀의 나신 위에 꽃 그림을 그려 촬영해도 되겠냐는 부탁을 하고, 식물같은 삶을 살고 싶었던 그녀는 수긍한다. 촬영을 하면서 그는 점점 욕망이 커져 자신의 남자 동료를 불러 그의 나신 위에 다른 색의 꽃을 그려 둘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촬영하고자 한다. 하지만 동료는 촬영 중 그의 지시를 거부하고, 그는 직접 자신의 몸에 꽃을 그려 그녀와의 행위를 촬영한다. 그리곤 다음날 촬영된 비디오를 발견한 아내에게 모든 것을 걸리고 만다. 3부에서는 그의 아내의 시선에서 그 사건 이후, 정신병원에 간 영혜를 바라본다. 영혜는 병원에서 그녀는 상반신을 온전히 드러낸 채 햇빛을 쐬기도 하고 물구나무서기를 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나무라고 생각하고, 채식을 포함한 모든 음식을 거부한다. 의사의 강제적인 음식공급마저 실패하고, 영혜와 그녀의 언니가 구급차를 타고 큰 병원으로 이동하면서 작품은 끝이 난다.
3. 육식과 채식 그리고 죄책감
육식을 하지 않으면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육식은 중요하다. 하지만 영혜는 어릴 적 자신을 물었던 개를 오타바이에 매달고 죽을 때까지 동네를 돌며 끌고 다닌 뒤 보신탕을 만들어 먹은 아버지의 폭력성에 대한 죄책감, 꿈에서 알 수 없는 시신들을 바라본 경험으로 인해 큰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는 육식에 대한 무거운 죄책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녀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모든 육식을 거부하는 것뿐이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먹은 수많은 생명들이 자신의 목에서 울부짖다는 죄책감에 상반신의 옷을 모두 입지 않고, 햇빛을 쐬며 편안함을 느낀다. 그녀는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주의자가 되었지만 채식 또한 생명을 먹는 것이라는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모든 음식은 생명으로 만들어지기에 그녀는 끝내 모든 음식의 섭취를 거부하게 된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그녀가 자신을 햇빛만을 쐬며 자라는 나무로 칭하는 이유는 더 이상 그 어떤 생명도 잡아먹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가해자가 되기도,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선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겐 악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러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에 자신의 삶에 대해 결백하기 어려우며, 누구나 그에 대한 책임의 무게를 지며 살아간다. 다만 영혜는 자신이 느끼는 무게에 더욱 민감했을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야말로 솔직하게 속죄하는 길을 걷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은 그리 달갑지 않다. 그녀를 대하는 주변인의 태도를 통해 우리 사회는 이러한 폭력과 잔혹성이 일상화되어 이에 대한 책임감도,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 사회는 너무나 아픈 사회이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기에 타인을 짓밟고 나아가는 것이 ‘경쟁’이라는 단어로 정당화되는 세상이다. 그리고 경쟁에서 패배한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 아픔을 함께하려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도태되며, 소외되곤 한다.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닌, 사회적인척 하는 동물이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앞으로만 나아가기 위해 뒤쳐진 이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가 지금의 높이까지 올라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나’가 저 밑에 깔려 있을까? 이 질문에 있어서 현대인은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아프지만 기억해야 한다. 고통스럽지만 책임을 느껴야 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육식을 하지 말자는 주장을 담은 작품이 아니다. 그 속에 담긴 인간의 폭력성과 잔혹성, 그리고 이를 잊은 채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 이를 보여주고 싶었던 작품이다. 육식을 거부하는 채식주의자는 과연 떳떳할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생명인 식물을 먹는 일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어쩌면 채식은 육식보다도 더욱 잔인한 일일지도 모른다. 동물은 자신이 저항을 할 수 있으며,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반면, 식물은 그저 모든 것을 견뎌내야 하니까. 채식주의는 오히려 약자를 공격하는 위선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