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자신과 맞는 사람이 있다. 마치 태어나기 전부터 짝으로 정해진 것처럼, 곁에 있으면 힘이 되는 환상의 짝꿍.
참 감사하게도 학창 시절과 유학 시절에 내 곁에는 언제나 저런 이들이 있었다. 마음이 맞는 친구가 없어서 불안해질 즈음이면 마법처럼 그런 사람이 나타난다. 만남의 계기도 참 신기하다. 거기에는 늘 '우연'이 따라붙는다.
우연히 같은 교회에 다닌다던지, 우연히 같은 만화 캐릭터를 좋아한다던지, 우연히 같은 고민을 끌어안고 있다던지... 그 많은 우연이 쌓이고 쌓여서 '내 잃어버린 반쪽'이 된다. 그렇게 '어쩌다 찾은 공통점'으로 이어져서 시간을 보내면 얼마나 즐거운지, 어느새 친구가 된 계기는 까맣게 잊어먹기 일쑤다.
이런 경험을 돌이켜보면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 옛말이 떠오른다. 사춘기 시절의 내가 인간관계에 불안을 느낄 때마다 어머니가 해주셨던 말이다. 엄마는 자신도 똑같은 걱정을 했었지만 혼자 살란 법은 없다고, 언젠가 나도 아빠처럼 마음이 꼭 맞는 짝을 만날 거라고 위로했다.
나는 그 말에 위안을 얻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없었다. 계속 불안이 맴돌았기 때문이다.
'이런 성격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나타난다고? 정말로? 짚신은 처음부터 한 쌍으로 만들어져도, 사람은 그러란 법이 없잖아. 어쩌면 나는 평생 모난 돌처럼 혼자 살지도 몰라...'
그렇게 끝을 모르고 불어난 의심을 나 혼자만의 힘으로 꺼트릴 수 없었다. 나 대신 이를 가라앉힌 건 타인의 존재였다. 엄마의 위안에서만 등장하던 '짝이 맞는 짚신'의 존재를 실감한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은 특별하거나 운명적인 만남을 계기로 '뿅'하고 생기는 게 아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저 일상에서 스쳐가는 인연들과 우연이 축적된 결과 마음을 맞춰가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으레 그 나잇대 아이들이 그렇듯이 나도 운명이나 로맨스 같은 걸 꿈꿨으니까.
하지만 살다 보니 그렇지 않다는 걸 여실히 느낀다. 사람의 마음은 반으로 정확하게 쪼개진 하트가 아니라, 이리저리 파편이 튀고 모난 모양으로 깨진 하트다. 그러니 상대방과 마음을 맞추려면 안 맞는 부분을 다듬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의 못난 부분을 갈아내고, 비죽 튀어나온 상대방의 결점을 받아들이는 공정을 거쳐야 비로소 마음이 하나가 된다.
이런 깨달음을 얻고 주변을 둘러보자, 모두가 나와 한 쌍으로 보였다. 내 곁에 남은 이들은 모두 '우연히' 만난 나를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깎아낼 줄 알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대단한 친구들에게 사랑받았다. 그 사실을 되새길수록, 내 어린 시절을 괴롭히던 불안과 열등감은 말끔하게 사라진다.
지금도 나는 마음 조각을 들여다본다. 우연히 서로의 조각이 맞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어긋난 부분도 감싸 안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아야 하므로. 더 나아가서, 우연히 만난 이 아름다운 인연들을 필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