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우 Jul 05. 2024

문경  소녀의  에세이

천사언니와  나

천사  언니와  나

리 집에 굿판이 벌어졌다. 북 치는 소리, 무당의 방울 흔드는 소리, 나쁜 잡귀를 쫓아  병을 낫게 하기 위한 굿이었다. 나에게는 8살 많은 언니가 있다.
그때 고등학교를 대구에서 마친 언니는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져 집에 와 있었다. 지금으로 보면 조현 병이었다. 그 당시에는 정신과에 대해 잘 몰랐고 어린 나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슬픈 일이었다. 예전의 언니와는 전혀 달라 있는 언니여서 엄마는 주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낫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착하다가도 가끔씩 돌변하는 언니는 가족들이 감당하기에 버겁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우리에게 화내는 날이 많으셨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어느 날 나는 칠판을 보면서 결심한다. 오늘은 집에 일찍 가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자. 중2 초여름의 일이다. 우리 집에는 시골에서 농사도 많이 짓고 이런저런 가축도 키우고 있었는데 소는 내 담당이었다. 난 학교가 끝나면 공부도 할 겸 친구들과 노는 게 좋아서 늦게 귀가하곤 했는데 아버지에게 혼나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그날은 일찍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서 소꼴도 쓸고 소죽을 끓여 놔야겠다고 생각했다. 하교하고 책가방을 마루에 던지고 8살 많은 언니를 불렀다. 외양간 옆, 소꼴을 썰어 두는 곳으로 갔다. 언니는 소꼴을 썰고 나는 소꼴을 넣었다. 그런데 언니가 작두로 소꼴을 써는데  그만 내 왼손 엄지손가락도 같이 작두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뭔가 가슴 서늘한 느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가 나오셔서 깜짝 놀라시고 옆집에 아주머니도 놀라서 달려오셨고 언니는 어쩔 줄 몰라하였다.
흐르는 피를 보시고 떨어진 손가락을 찾아 동네 봉고차를 운전하시는 분을 불러 병원이 있는 곳까지 달려갔다. 병원은 멀고 차 안에서 보는 뭉우리재의 나무는 우거져있었다. 우리 동네는 시골이어서 병원이 없어  멀리 시내에 있는 이외과라는 병원으로 갔다.
그 의사 선생님은 손가락을 봉함하면 더 썩어 들어가서 위험해진다고 하셨다. 겁이 난 엄마는  그냥 그대로 손가락을 꿰매 나는 영원히 왼쪽 엄지손가락을 잃게 되었다.

그날 밤에 많이 아팠다. 마취도 안 해 주셨는지 마취가 풀린 탓인지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통증, 너무 아파서 이 통증을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나 생각한 끝에 난 그 통증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 통증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자 15살의 소녀는 정말 통증이 가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때의 기억을 살려 어떤 어려운 일이나 아픔이 생길 때 그것을 피하기보다는 그것을 인정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한다. 그럼으로써 나 자신을 지키고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난 많은 생각을 했다. 가재나 새우 같은 동물이 다리가 하나 잘려도 다시 난다는 것이 생각났고, 나도 자고 나면 내 손가락도 다시 돌아와 있기를 간절히 빌기도 했다. 사춘기 소녀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들고 아픈 상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 보다 더 슬픈 것은 엄마의 아픈 맘이었다.
딸 한 명은 조현 병을 앓고 있고 막내딸은 손가락을 잃었으니 얼마나 아픔의 무게가 컸을까.
엄마는 내 손을 어루만지면서 자기의 손가락을 내 손에 붙여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나의 부주의로 엄마를 가슴 아프게 했다는 게 어린 맘에도 죄송해서 엄마에게 말했었다. “엄마! 나 이 손가락 하나 없다고 내 인생이 달라지지 않아.   
나 열심히 잘 살아나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셔요 “라고 위로해 드렸다.
언니도 저렇게 아파 있는데 나라도 부모님께 걱정 끼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그러나 왼쪽 엄지손가락을 잃고부터 왼손을 내놓는 것이 왠지 부끄러웠다. 그래서 굳이 일부러 말하지 않고 숨기게 되었다. 장애를 가진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불편한 것이라고 했는데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늘 장애인을 바라보는 비장애인의 마음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막상 길을 가다 돌을 맞듯 장애를 가지게 되었을 때 마음을 어떻게 해야 되는 지도 잘 생각해 봐야 하는 것 같다.
큰 장애는 아니었지만 내 손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놓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또한 사춘기의 나는 조현 병의 언니도 부끄러웠고 언니가 마음을 단단히 잡고 있지 못해 온 가족을 괴롭힌다고 생각해 원망스럽기도 했다.
언니는 불쑥불쑥 집을 나가는 일도 있었고  환영과 환청을 쫓아 혼잣말을 하거나 웃기도 했다. 엄마는 언니를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써 보았지만 방법이 없어 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하고, 병원을 다니며 치료받기도 했다. 병원에 입원하면 부모님은 맘 아파하며 괴로워하셨고 집에 있으면 감당하기 버거워하셨다. 나의 사춘기 시절은 늘 농사일과 언니 사이에서 고군분투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가슴 한편이 아팠다.

40년 전의 작은 시골 마을은 지금만큼 정보도 의학도 발달 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우리 부모님만큼 나이를 먹어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자신이 아픈 것보다 자식이 아픈 게 더 가슴 아픈데 부모님이 느끼셨을  삶의 고통이 가슴 저민다.

지금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나는 두 아이를 키워 독립시키고 일본현지 통역 가이드 일을 하면서 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가끔 나는 어느 미국의 대학 강사가 한 말을 투어 중 손님들에게 전하곤 한다. '20달러의 지폐는 구겨져도 발에 밟혀도 그 가치는 변함없습니다. 내가 살아가다 구겨지고 밟혀도 나의 가치는 그 20달러의 가치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언니는 조현 병을 앓고 나는 손가락을 잃었지만 우리의 본연의 가치는 늘 변함이 없음을 기억한다.
 언니는 식당 하는 오빠 밑에서 오빠를 도와 가면서 같이 지내고 있다. 언니는 63살이나 되었지만 머리카락 하나 세지 않고 새까맣다. 의사 선생님 말에 의하면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기억하는 시간도 짧다고 하신다. 며칠 전에는 같이 덕수궁에 놀러 가서 그 앞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서 맥주도 한 잔 하면서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착하고 어진 천사 같은 언니는 아직도 나만 보면 미안하다고 하면서 내 손을 쓰다듬는다.  나는 언니 잘못이 아니라고 재차 말하며 사랑하는 그녀를 감싸 안는다.

작가의 이전글 문경 소녀의 에세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