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할 수 없는 것들
나는 1938년생 아버지와 1945년생 어머니 사이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첫째 누나가 아버지 전처의 소생이므로
이 경우 2남 1녀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위로 각 4살, 6살, 10살 터울의 생물학적 형제들이 있다. (누나 - 형 - 누나.. 순이다)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는 이들은 4남매의 막내라는 자리를 내리사랑의 꼭짓점쯤으로 짐작하기 쉽지만
애석하게도 내게 주어진 운명은 그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장남이자 형이라는 자와는 인연을 끊고 살아온 지 어느덧 십 년의 세월이 훌쩍 넘었고
두 누나들과도 기간의 차이만 있을 뿐
절연의 상태임은 동일하다.
내가 굳이 “생물학적”이라는 구분을 둔 이유다.
곱씹어보니 놀랍게도
집에서나 밖에서나, 어린 시절 부모형제 6명 모두가 한 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은 기억이 없다.
각자 결혼이라는 출구를 찾아 도피하듯 떠나기 전까지 그래도 상당 기간 한 집에서 뭉개고 살아왔음에도
식구(食口)라는 표현이 무색하리만치 우리는 그랬다.
외식, 여행, 함께 찍은 사진 등등..
가족이라는 소속감을 되새길 만한 소소한 흔적조차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기이하게 느껴진다.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1996년에 장남이자 형이 결혼하면서 구리시의 작은 아파트에 부모님과 살림을 합쳤다.
이미 두 누나들은 이십 대에 접어들기가 무섭게 직장과 결혼을 핑계로 집을 떠난 후였다.
당시 나는 군복무 중이었는데
전역하는 날 물어물어 찾아 간 그 집의 안방은 장남의 신혼살림이 차지하고 있었고
주방 옆 작은 방에는 부모님이, 그리고 나머지 방 하나를 내 몫으로 남겨둔 거였다.
책상과 싱글침대를 나란히 배치하고 나면 여분의 공간에 사람 하나 겨우 누울 수 있는 크기의 방이었다.
얼핏 듣기로는 형수 된 사람이 그 아파트에 남아있던 대출금을 얼마간 대신 갚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겨우 서른 살인 아들에게 안방을 내주고 뒷방으로 물러 난 부모님의 처사가 이해되질 않았다.
덕분에 나까지도 의도치 않은 더부살이 신세가 돼버렸다.
정말이지 숨 막히고 아수라장 같던 우리의 동거는
내가 2003년에 결혼을 하고 나서야 끝을 맺었다.
그 사이 그 좁은 집에는 두 명의 조카들이 차례로 태어나 어느새 유치원에 입학해 있었다.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음에도 결혼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렀던 건
무엇보다 엄마에 대한 어설픈 연민과 동정,
나라도 남아서 버팀이 되어야겠다는 그릇된 희망으로 주저하고 망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정작 내 안의 상처는 소리없이 곪아가고 있었고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이제사 다 부질없는 얘기긴해도
나는 최대한 서둘러 그곳을
그 사람들을,
벗어났어야 했다.
아빠한테 가서
이혼서류에 도장 좀 찍어달라고 그래
부모님은 지난 2013년쯤
상호 합의 하에 법률 상 부부라는 지위를 포기했다.
이미 그전부터 엄마는
장남 집에서 함께 살아온 아버지를 떠나
인근의 원룸에 혼자 나와 지내고 있었고
왕래는 커녕, 연락마저 단절한 후였으므로
그것으로 두 분 간의 혼인관계는
자연스레 종료된 걸로 비춰지기 충분했었다.
그러던 와중에 엄마가 나를 따로 불러
이혼을 위해 아버지를 설득해 주기를 부탁했는데
들어 본 이유는 다름 아닌 “호적 정리”였다
당시 주변의 어느 이웃이
단독세대의 노인에게 임대주택 입주의 기회가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자
이에 솔깃해진 엄마가 그 길로 바로 이혼의 결심을 굳힌 거였다.
그 해 아버지가 76세, 어머니가 69세였다.
돌이키기엔 너무 오랜 세월이
손길이 닿지 않은 야생의 덩굴처럼 얽혀 있었다.
굳이 변호사와 같은 전문가의 조력이 필요한 사안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혼 절차에 필요한 서류를 부모님 대신 내가 준비하고 작성해서 법원에 제출했으며
두 차례의 지정된 출석 기일 또한 모두 동행하게 되었다.
세상 어느 자식이 친 부모의 이혼에
이런 식으로 나서고 관여하고 싶을까 싶지만
당신들의 지긋지긋한 다툼을 아주 일찍부터 목도해 온 나는 비교적 별 감흥 없이 그 과정 모두를 감내했다.
당시 3명의 형제 중 누구도
이 상황을 같이 나누고자 내게 손 내밀지 않았다.
다행히 양육해야 할 미성년 자녀도, 나눠야 할 재산도 없던 이혼 청구는 별 이견없이 받아들여졌다.
재판부의 결정이 난 두번째 법원 출석을 마친 어느 늦은 오후
이혼신고를 서두르고 싶어 마음이 급해진 엄마는 구청 앞에,
아무 일정이 없던 이버지는 장남과 같이 사는 아파트 입구까지 모셔다 드리는 것으로
나의 임무는 마무리되었다.
엄마와 아버지와 내가 마지막으로 함께 이동하는 차 안에는
특별히 어색한 기운이 느껴지거나 하지도 않았고
각자의 시선으로 지나치는 창 밖의 풍경을 담으면 그 뿐,
침묵을 대신해 누군가 억지로 말을 꺼내야 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나역시 그저 평소처럼
라디오 방송에서 아는 노래가 나오면
작지만 흥얼거리듯 따라 부를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부부 혹은 가족이란
더없이 숭고하고
지켜내기 위해 때로는 숙고해야 할 가치이겠으나
또 다른 어떤 경우에는
임대주택 입주 자격에 걸림밖에 되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
실제로 엄마는 이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열 평 남짓의 임대 아파트에 당첨되었다.
담담했던 나와는 다르게
부모님의 이혼을 몹시도 부끄러이 여기고
불만을 토로했던 둘째 누나도 얼마 전,
이십여 년의 결혼 생활만에 이혼했다고 한다.
엄마에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렇게 부끄러운 이혼을 너는 왜 하게 되었냐고,
따져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