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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먹는 여우 Jul 08. 2024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가?

<맡겨진 소녀> - by 클레어 키건 -

<맡겨진 소녀> -by 클레어 키건-


어릴 적 읽은 진 웹스터의 소설 <키다리 아저씨>(1912년)는 나에게 동화 같은 로맨스에 대한 로망을 심어주었다. 글을 잘 쓰고 싶었던 나에게 글발 하나로 익명의 후원자로부터 후원을 받는다는 설정이 무척 흥미로웠다. 키다리 아저씨는 문학적 감수성도 있고 경제적 능력에 키도 크다. 게다가 TV애니메이션 속 키다리 아저씨는 잘생기기까지 했다. 여성의 참정권이 없던 시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내면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여성이라는 소설이 지닌 사회적 의미는 차치해두고 멀리서 따뜻하게 지켜 봐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게 했다. 


어른이 된 지금 한 편의 소설을 읽고 그때의 키다리 아저씨가 다시 소환되었다. 물론 로맨스의 감성은 아니다.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라는 좀 더 현실적인 시각에서 소설을 들여다 보았다.


클레어 키건의 단편소설 <맡겨진 소녀>(다산북스, 2023년). 


시를 닮은 소설이다. 절제된 언어와 압축된 표현으로 긴 여운을 남겨준다. 단어 하나, 풍경 묘사 하나 무의미한 것이 없다. 도처에 넘쳐나는 함축적인 묘사와 더불어 촘촘하게 짜여진 구성이 단편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무한대로 확장시키는 듯 하다.


원제 “foster”. 

사전적 의미는 “수양부모로서 아이를 맡아 기르다”이다. 

한글판 번역은 “맡겨진 소녀”. 


“맡겨진다”라는 말에서 부모로부터의 거부당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맡겨짐”은 예상과 달리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소녀는 남의 집에 맡겨짐으로써 응당 받아야 했을 따뜻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아이를 잃은 킨셀라 부부는 소녀를 맡아 기르며 다시 평범한 부모의 역할을 되찾았다. 소녀와 킨셀라 부부는 타인이지만 서로의 결핍을 채우며 진정한 가족이 되어 갔다. 


이야기 속으로 좀더 들어가 보자.

소설은 1980년대 초 아일랜드가 배경이다. 엄마가 다섯째 아이를 출산하기 전까지 아이가 없는 먼 친척 부부의 집에 여름 몇 달 동안 맡겨져야 했던 어린 소녀의 이야기로 주인공 소녀의 1인칭 시점에서 묘사되고 서술되었다. 작가는 소녀의 눈을 빌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스토리 전개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부분은 낯선 환경에서 느껴야 했던 소녀의 불안, 걱정, 어색함이 원래 그 나이의 소녀가 경험했어야 할 소소한 일상들과 감정들을 겪으며 서서히 변화해 가는 과정의 묘사이다. 여기에는 소녀에게 보여준 킨셀라 부부의 정성스런 보살핌과 배려가 그 중심에 있다. 소녀의 부모와 킨셀라 부부의 양육 스타일은 극명하게 달랐다. 소녀의 부모는 소녀를 남의 집에 오랫동안 맡기고 싶어했다. “원하는 만큼 데리고 있으면 안되나?”(p.15) 아빠는 소녀를 천덕꾸러기처럼 대했다. “애가 말썽을 안 피워야 할 텐데요. 불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너”(p.21) 가난한 가정의 가장임에도 아빠는 카드게임에서 생계를 꾸려가는 데에 중요한 암소를 잃었다.(p.9) 나무가 아파 보인다는 소녀의 순수하고 반짝이는 표현에 아빠는 수양버들이라며 핀잔을 주고,(p.11) 안고 있던 루바브 줄기가 떨어져도 아빠는 주울 생각도 하지 않아 결국 킨셀라 아저씨가 허리를 숙여 주웠으며,(p.20)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도 없이 아빠는 떠났다.(p.21) 그런 아빠가 떠난 후 바람은 더 시원하게 불었고 크고 하얀 구름이 헛간을 넘어 왔다.(p.21) 마치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이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p.30)


킨셀라 부부의 집안에서는 빵 굽는 냄새와 소독약 냄새(p.14)가 난다. 소녀의 집과는 달리 깨끗하고 안정되고 평온하다. 킨셀라 부부는 소녀에게 익숙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작가는 소녀가 도착한 첫날 소녀를 목욕시키는 킨셀라 아주머니의 섬세하고 정성스러운 손길을 천천히 그려낸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담고 옷을 벗기고 발을 씻기고 손톱 밑의 때는 족집게로 빼고 머리를 감겨 주고 온몸에 비누칠을 하고 엉킨 머리카락을 빗어 준다.(P.24) 제대로 된 보살핌은 유난스럽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주머니가 뒤에 서 있지만 내 숨소리가 연달아 돌아와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그게 자기 숨소리라도 되는 것처럼” (p.29)  


아주머니는 뉴스를 보는 내내 나를 무릎에 앉히고 내 맨발을 느긋하게 어루만진다. “발가락이 길고 멋지구나”(p.43)


거칠고 무관심한 아빠와 달리 킨셀라 아저씨는 소녀에게 따뜻하고 든든한 울타리와도 같았다. 아저씨는 매일 소녀에게 달리기를 시키며 시간을 재주었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글자를 가르쳐 주었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가르쳐주어야 할 삶에 대한 지혜도 일러 주었다. 어떤 대답도 요구도 다그치지 않는다. 아저씨는 소녀의 손을 잡고 소녀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여 준다(p.70). 거친 파도가 일렁이는 바닷물에 들어가 목말을 태워주며 말한다. “무서울 거 없다!”(p.71)고.


작가가 킨셀라 부부와 소녀와의 관계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진정한 부모의 역할, 좋은어른의 모습이다. 특별할거 없는 일상이지만 순간순간마다 소녀의 장점을 발견하고 응원한다. 우물에 빠지지 않도록 바지 벨트를 잡아 줄 수도 있다. 부부는 소녀에게 안정과 신뢰를 주고 소녀는 그런 부부를 통해 성장한다. 때로는 고통과 시련을 먼저 경험한 어른으로서 어두운 밤길을 밝혀주는 달빛처럼 인생의 안내자가 되어 주기도 한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내 아이들에게 어떤 부모였는지 나의 양육 태도를 점검해 보았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내가 원하는 자녀상과 목표를 만들어 놓고 남들이 하는 대로 무작정 달려가고 있었던 건 아닌지, “다 너희들을 위한 것”이라며 아이에 대한 내 자신의 욕심을 합리화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아이의 좋은 성적과 좋은 대학 입학이 나의 역량이고 자녀를 잘 키운 좋은 부모의 기준이 된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돌이켜보면 아이를 키우면서 종종 맞닥뜨리는 것들이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코칭이고 간섭인지 그 경계의 모호성, 자율과 통제 사이에서의 딜레마, 아이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과 한계를 설정하는 것 사이의 균형, 비교 육아로 인한 좌절감 등 매 순간 갈림길에서 방향을 잃어 버리곤 했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소위 “최고의” “올바른” 양육법들도 시기마다 다르게 유행을 타는 것이고, 방송과 인터넷에는 검증되지 않은 사적이고 왜곡된 육아 경험들이 보편적이고 신뢰할 만한 정보가 되어 전달되었다. 아이를 잘 키워보려는 열정을 장착해 보지만 양육에 대한 불안감과 스트레스는 더욱 높아져 갔다. 어쩌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좋은 부모가 되겠다는 강박이 나 스스로를 옭아매고 갈팡질팡하게 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8살 터울의 두 아이를 키우며 이제는 제법 육아의 고수가 된 듯 마음에 느긋함을 가진다. 모든 것이 서툴렀던 초보 육아맘에서부터 시작해 예상치 못했던 이런저런 시행착오들을 겪으며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 남들처럼 좋은 영어유치원을 다니지 않아도 학원 최상위반에 들어가지 못해도 너도나도 꿈꾸는 의대를 가지 않아도 그렇게 조금은 느리고 다를지라도 조급하지 않다. 결국 아이들은 부모의 안정과 신뢰가 있다면 무엇이든 이루어낼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본다.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스스로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데 이런 나의 오랜 경험이 지금도 여전히 배움을 즐거운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아이들이 공부 때문에 마음을 다치지 않고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 주는 것, 자기 주도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회복탄력성”이나 “좌절내구력”이라는 키워드도 결국 실패와 좌절을 발판으로 삼아 도약하는 힘일 것이다. 그런 힘을 아이들이 가질 수 있도록 곁에서 믿고 지켜봐 줄 수 있는 부모이자 어른이 되고 싶다.


멀리서 지켜봐 주고 따뜻하게 응원해 주었던 키다리 아저씨처럼.


한번에 읽어 내려갈 만한 분량의 짧은 이야기이지만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깊이는 만만치 않은 소설이다. 굳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한정 지을 필요가 있을까. 내 삶을 긍정으로 바꿔주는 안정감과 신뢰를 주는 사람이 곁에 있어 주기를,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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