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있었지만 더 이상 없는 것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by 패트릭 브링리
<수학의 위로> -by 마이클 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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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 죽음에 대한 첫 기억은 육개장이다.
초등학생이던 시절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방학이 되면 놀러 가던 큰아버지 댁에 이번에는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갔다. 큰아버지 댁이 있는 좁은 골목에 들어서자 무겁고 우울한 공기가 나를 엄습했다. 대문 앞에 짚으로 얼기설기 꼬아 만든 커다란 짚신이 놓여 있었다. 담을 넘어 곡소리가 들렸다. 무서웠다. 왠지 이 문턱을 넘어서면 세상 모든 귀신들이 내 몸에 들러붙을 것만 같았다. 7월 무더운 여름이었다. 습한 공기는 더욱 무겁게 내려앉아 내 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평범했던 공간이 어느 한순간 슬픔으로 뒤덮여버린 낯선 상황에 어찌할 바 몰랐다. 어른들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던 건 음식들이 차려진 긴 탁자 앞에 앉을 때였다. 할머니께서 내 눈앞에 보이는 병풍 뒤에 누워 계시다고, 날씨가 너무 더워 괜찮을까 모르겠다고. 그리고 곧 내 앞에 국그릇 하나가 놓였다. 고기 덩어리와 함께 알 수 없는 건더기들이 담겨 있는 불그스름한 국물이었다. 진하고 시큼한 육개장 특유의 향이 올라왔다.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급체를 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그 이후의 기억은 흐릿해 정확하지 않지만 며칠 동안 몸이 많이 아팠다. 그렇게 나에게 죽음은 상실의 슬픔을 느끼기도 전에 육개장처럼 붉고 거무튀튀한 공포로 각인되었다. 이제 나는 가까운 이들의 부고소식을 더 많이 듣는 나이가 되었다. 여전히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안고, 그 상실의 슬픔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두 편의 에세이가 있다. 모두 죽음으로 인한 상실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서 수학자는 수학을 통해서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슬픔을 위로한다.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웅진 지식하우스, 2023년)는 뉴욕에서 화려한 직장 생활을 시작한 저자가 형의 암투병과 죽음을 겪은 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어 상실의 슬픔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담아낸 에세이다.
저자에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현실의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도피하면서 형의 죽음을 애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형이 살아있을 적에 가족이 함께 했던 추억의 장소였고 그가 예술의 아름다움을 처음 접한 곳이기도 했다. 미술관의 시간은 세상과는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느리고 고요하며 정돈된 환경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예술 작품의 이야기에 오롯이 집중하고 교감할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도 회화와 조각에서부터 고대 이집트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미술관의 많은 예술 작품들이 죽음이라는 상실의 경험에 맞닿아 있다. 그곳에는 탄생하는 아기 예수와 고난 받고 죽어가는 예수가 있다. 거장들은 필멸하는 인간의 나약한 육신에 주목하며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그들의 습작에서 조차 실패와 고통의 필연성을 볼 수 있다. 신에 대한 경외와 영원에 대한 염원이 있지만 인간은 결코 죽음을 면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세상과의 단절을 위해 숨어 들어간 미술관에서 뜻밖에도 삶과 죽음에 대한 내면적인 성찰과 자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멈추지 않는 인생여정에서 삶이란 고통, 죽음, 슬픔으로 점철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그 상실의 슬픔을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다시 그에게 삶은 고군분투하고 성장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저자 패트릭 브링리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10년을 경비원으로 일했다. 상실의 슬픔을 토해내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미술관의 예술 작품들은 그에게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지금 곁에 가족을 잃고 상실의 슬픔에 빠져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지 돌아보자. 표현하지 않아도 괜찮아 보일지라도 후회와 상처가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슬픔을 애도하고 추모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다려 주어야 한다.
나는 예술 작품에 감정이입을 한다. 작품을 보고 왈칵 눈물이 터졌고 멈출 수 없어 그냥 그대로 둔 적도 있었다. 작품을 감상하는 당시의 감정 상태나 처한 상황에 따라 같은 작품이 전혀 다르게 읽히기도 했고, 매번 새로운 감정들이 솟아 오르곤 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었던 저자처럼 어쩌면 나도 이미 나만의 방식으로 슬픔과 상처를 극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고 공감되었던 문장이다.
“많은 경우 예술은 우리가 세상이 그대로 멈춰 섰으면 하는 순간에서 비롯한다. 너무도 아름답거나, 진실되거나, 장엄하거나, 슬픈 나머지 삶을 계속하면서는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순간 말이다. 예술가들은 그 덧없는 순간들을 기록해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들은 덧없이 흘러가버리지 않고 세대를 거듭하도록 계속 아름답고, 진실되고, 장엄하고, 슬프고, 기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믿게 해 준다.” (p.324)
그렇다면 수학자는 상실의 슬픔에 어떻게 접근할까? 마이클 프레임의 <수학의 위로>(디플롯, 2022년)는 프랙털기하학으로 이 주제를 다룬다. “슬픔” 혹은 “비탄”이라는 감정의 문제를 정확한 정의와 명확한 규칙에 따라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학문인 수학 그중에서도 점, 선, 면, 도형, 공간을 다루는 기하학으로 풀어간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원제는 “Geometry of grief” 비탄(혹은 큰 슬픔)의 기하학이다.
저자는 비탄에 대해 불가역성, 즉 죽음과 같이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 대한 반응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고양이를 잃었다. 평생의 업으로 삼아온 교수직을 인지능력에 문제가 생기면서 그만두게 되었고, 기하학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머릿속에서 빠져나갔다.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었고, 비탄이었다. 프랙털기하학을 전공한 저자가 이러한 비탄을 보듬는 방법으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고 익숙한 기하학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분은 전체를 닮는다"
프랙털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유사성과 순환성이다. 프랙털이란,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닮은 형태로 끝없이 반복되는 구조를 말하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사리의 잎이나 공작의 깃털무늬, 우주의 모습이 대표적인 프랙털 구조이다. 우리의 행동 양상도 프랙털에 가깝다. 우리는 크고 작은 선택을 할 때마다 비슷한 선택을 하는 자기 유사성을 보인다. 또 하루의 일과와 1년, 더 나아가 인생 전체가 유사한 구조로 흘러간다는 점에서도 프랙털이다. 얼핏 무질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일정한 기하학적 구조가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가 수없이 만나는 크고 작은 상실과 비탄 역시 자기 유사성을 띠며 되풀이되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부모를 잃은 커다란 비탄 안에는 더 이상 부모와 함께 경험할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작은 비탄들이 몰아칠 것이다. 하나의 비탄 이후에도 우리는 또 비슷한 비탄들을 만나고 경험할 것이다. 기르던 고양이가 죽었지만 또다시 고양이를 키울 것이고 지인들의 부고소식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늘 비슷한 사고와 죽음의 뉴스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반복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인생여정은 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그 자체로 돌이킬 수 없다. 저자의 말처럼 반복되는 상실과 비탄이 삶의 일부분이라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비탄의 경험은 다른 비탄에 대해 공감하게 하고, 사라진 이들과의 추억을 나누게 하며, 남을 돕는 선행을 이끈다. 마치 새롭게 가지가 뻗어 나가며 자기 유사성을 반복하는 프랙털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다시 기하학에서 답을 찾는다.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살아 계신다. 아버지께서는 지병을 가지고 계시고 시아버님께서는 치매를 앓고 계신다. 나도 언젠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슬픔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을 당시 지인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셨던 분이라 이런 이별에 익숙했던 것일까, 담담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상실과 비탄을 미리 경험해 보았다고, 또 그런 감정에 익숙하다 할지라도 비탄의 고통을 무디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실의 슬픔을, 비탄을 위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은 언제나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는다. 상실은 외면한다고 해서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비탄이 내게도 어김없이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이제는 그 빈 구멍을 어떻게 메우느냐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