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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란이 Jul 04. 2024

정신건강의학과 입원기

#1 입원 전 - 복잡했던 나의 삶

  2023년 말에서 2024년 초, 석사과정 대학원생으로 막학기를 맞이할 때였다. 이제 일도 익숙해져서 나름 수월하게 잘하고 있었고, 지도교수와 주변 사람들의 신임도 얻었다. 모두가 일을 잘하게 되었다고 칭찬해 주었다. 일이 수월해지니 가끔씩 가던 본가에 좀 더 자주 갈 수 있게 되었고, 본가는 예전과는 달리 평화롭기만 했다. 부모님의 사이는 좋았고, 동생과는 약간 어색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고, 귀여운 반려묘 먼지까지. 부족할 것이 없는 집이었다. 그렇게 좋은 환경에서, 일터에서는 열심히 실험하면서 논문 데이터를 뽑았고, 논문 초안을 작성하며 열심히, 그리고 남들의 부러움을 사며 일을 했다. 친구들과의 사이도 좋아서 가끔씩이지만 정기적으로 보는 친구들 무리가 몇몇 있었고, 그들은 모두 내 편이었다. 평소 ADHD가 있는 나는 동네에 있는 작은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을 다니고 있었고, 여느 대학원생이 그렇듯이 스트레스가 많기 때문에 ADHD약과 더불어 스트레스 조절을 위한 가벼운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처방받아먹고 있었다. 그렇게 1년 반을 잘 지내왔다.


  그때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와 이별했다. 예견된 이별이었고, 이 친구와는 언젠가 헤어질 줄 알고 있었다.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그 시점이 2024년 1월 초였을 뿐이었다. 여느 이별과 다름없이 몇 주 정도 힘든 시기를 겪었고, 이후 괜찮아졌다. 워낙 괜찮아져서 소개팅까지 했다. (물론 소개팅 결과는 좋지 않았다. 주선자와 어색해질 뻔.) 그렇게 1월을 보냈고, 대학원 일은 이상 없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다 2월 초, 설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아무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나는 친할머니에게 큰 애정은 없었고, 다만 과거에 남아선호사상과 제사 문제로 며느리들과 손녀들을 괴롭혔던 것 때문에 원망하는 감정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다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졌고, 요양원에서 오랫동안 고생하시는 것을 보면서 생긴 인간적인 안타까움, 딱 그 정도가 있었다. 뭐, 물론 나의 핏줄이기에 아예 마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에 있어서 크게 슬퍼할 만큼은 아니었다. 연구실에서 일을 하다가 전화를 받고 급하게 짐을 챙겨 장례식장으로 향했고, 차가 너무 막히는 퇴근 시간이었어서 구급차를 타고 모신 할머니보다 늦게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심지어 손님들도 먼저 와계셨다. 상주도 없이 몇 명의 가족들만 도착했고, 상복을 입지도 못한 채 손님을 받았다. 혼란 그 자체였다. 몇 시간 후 겨우겨우 가족들이 다 모여 상복을 차려입고 손님을 받았다. 할머니가 어디 계신지도 생각나지 않고, 그냥 손님을 받고 음식을 나르고 인사를 드리는 일련의 과정만 계속해서 반복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도, 아무 생각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다음 날 입관 때 할머니를 처음 뵈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할머니는 어딘가 모르게 편안하신 것처럼 보였다. 장의사 선생님은 할머니께 화장을 해드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그냥 금방이라도 잠에서 깨어나 말씀을 하실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눈물을 참는 아빠를 보았다. 옛날의 사건이 떠올랐다. 나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내 머릿속엔 “내가 과거에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장례식을 하지 않았을 텐데.” 이 생각뿐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큰아버지와 함께 사시던 친할머니께서 갑자기 우리 집에 와서 지내신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강력히 반대했지만, 어른들의 결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때 당시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웠고 사이도 좋지 않았다. 집도 작아서 친할머니께서 오셔도 거실밖에는 지내실 공간이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 집은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을 대신해서, 외할머니께서 바로 앞 동에 사시며 매일 오셔서 살림을 해주고 계셨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 집엔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시면 사돈관계인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나, 11살 동생까지 총 4명이 있는 것이었다.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다. 사돈은 계속해서 살림 방식을 갖고 부딪히셨고, 나와 동생을 키워주고 돌봐주신 외할머니는 여자 쪽의 부모라는 이유로 친할머니께 계속해서 굽히셨다. 그리고 친할머니는 자꾸 위생관념이 흔들리는, 이상행동을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치매 초기 증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그 뒤처리를 하느라 힘드셨고, 나와 동생은 덩그러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외할머니가 힘들지 않도록. (동생은 그때를 기억하는지, 힘들었는지 물어보고 싶긴 하다.) 나는 그때에 정말 최고조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집에 가기 싫어서 학교에서 경비아저씨가 내쫓을 때까지 공부를 했고, 친구들과 밤늦게 동네를 돌아다니는 등 집에 들어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터지는 법. 친할머니의 실수로 양말 하나가 이상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외할머니는 사돈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으니 나를 붙잡고 왜 이렇게 했느냐며 혼을 내셨다. 나는 억울했다. 내가 하지 않았는데, 나는 지금 너무나도 힘든데, 내 편인 외할머니가 나에게 뭐라고 하는 것에 나는 정말로 무너졌다. 그렇게 나와 외할머니의 눈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서로 스트레스가 가득 찬 상태였기에, 또한 스트레스 원인인 친할머니에게는 화를 못 내니 서로에게 화를 내며 상처를 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싸우고 나니 외할머니는 나를 껴안으며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때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히며 바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더 이상 친할머니와 같이 살 수 없으니 나를 내보내든 친할머니를 내보내든 알아서 해! 엄마 아빠는 일하러 나가서 잘 모르겠지만 이 집안은 지옥이야. 난 도저히 못 참아!”라고 빽 소리를 질렀다. 아빠는 충격을 받으셨는지 퇴근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바로 집에 오셔서 상황을 살피셨고, 결국 큰고모와 함께 원룸을 알아보고 간단히 가구를 채운 후 친할머니를 그곳으로 따로 모셨다. 그 과정은 정말 수일 내로 빠르게 진행됐다. 그때 잠시동안은 너무나도 후련했다. 더 이상 사돈과 어린 동생이 있는 지옥 같은 집에 있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나 곧 그 후련함은 어마어마한 죄책감으로 변했다. 친할머니가 원룸으로 가신 이후 치매 증상이 급격하게 나빠졌고, 그곳에 얼마 지내지 못하시고 바로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셨기 때문이다. 내가 아빠에게 딸과 어머니 중 한 명을 선택하게 만들었고, 아빠가 나를 선택해서 친할머니를 밖으로 내보냈기 때문에 친할머니가 급격하게 아프게 된 것이라는 죄책감이 가슴속 깊이 자리 잡혔다.  


  입관 이후 내내 그 죄책감이 떠나질 않았다. 애써 울음을 참는 아빠를 보며 더 힘들었다. 아빠가 너무나도 불쌍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부모가 없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빠는 강한 척하려는 것인지 혹은 정말 진심인지, 장례식 도중에도, 장례식이 끝난 이후에도 괜찮아 보였다. 그렇게 괜찮아 보이는 것조차 나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아빠가 정말 괜찮은 걸 수도 있지만, 그럴 확률은 정말 낮으니까. 아빠도 나처럼 힘든 것 티 안 내고 혼자 참는 성격인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아니까. 하지만 장례식이 모두 끝난 이후에, 오랜만에 모두 모인 친척들이 서로를 기념한다고 술을 한 잔 기울이며 신나게 놀았다. 그렇게 분위기는 환기됐고, 슬픈 이야기는 마치 금기어가 된 것 마냥 등장하지 않았다. 다들 재미있게 웃고 떠들고 각자 집에 돌아갔다. 우리 가족도 그 이후로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너무나 큰 스프링을 억지로 꾹꾹 눌러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2월 말쯤, 멀쩡하던 연구실 컴퓨터가 고장이 났다. 오전까지만 해도 잘 쓰던 컴퓨터였는데, 점심식사를 하고 돌아오니 고장이 나있었다. 그리고 나는 1~2월간 열심히 실험하여 모은 데이터를 모두 잃어버렸다. 그때 처음 알았다.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고 당황스러우면 아무런 리액션이 나오지 않고 얼어버린다는 것을. 논문 데이터를 낼 것이라고 하면서 정말 열심히 살았던, 기왕 인정받은 김에 진짜 열심히 해보자는 마음으로 일했던 그 결과물을 다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매달 백업을 하다가 너무 정신이 없어 백업하는 것을 잊은 딱 그 시기에. 참, 세상이 날 괴롭힌다는 것이 꼭 날 보고 하는 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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