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모습이 두려운 우리에게
나의 냉소를 비판했던 자들 와서 들어라.
내가 밤낮없이 굶어가며 극단적인 방식으로 기름기를 걷어내는 동안 세상은 묘하게 친절해져 있었다. 아아, 가증스러워. 난 그게 싫어서 늘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저런 허울뿐인 친절에 속지 말자. 그들이 보는 건 껍데기뿐이야. 저건 가식이고 거품일 뿐이야… 그렇지만 난 무서웠다. 언젠가 내가 다시 예전과 같아진다면 이런 거품조차 사라지게 될까 봐. 무엇보다 내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될까 봐 두려웠다.
더욱 가증스러웠던 것은 굶주린 내 마음이었다. 오랜 시간 다정함을 필요로 했던 나는 일단 반쪽짜리 칭찬이 주어지기만 하면 거창한 결심 같은 건 모두 제쳐 버리고 먹어치워 버리는 일에 급급했다. 고마워요. 그러니 더 줘요. 날 더 아껴달란 말예요. 염치없는 고백도 서슴지 않아 기가 차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 저녁은 굶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뭐 어쩌겠어.
여기 진솔한 고백이 하나 있다. 나는 여전히 겁쟁이고, 외톨이이며,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다. 난 여전히 내 껍질과 속질까지 마음에 들지 않아 숨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마치 나비가 되다 만 번데기처럼… 만약 그들이 내 정서와 사상의 불온함을 감지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내게 도망칠 힘이 남아 있을까? 내가 저항할 수 있을까?
보아라, 내가 스스로와 진퇴양난의 애증 관계 사이에 있음은 자명하다. 그렇지만 바깥에 보이는 나는 그저 이미지에 불과하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모두 나를 떠나갈 때 끝까지 내 곁에 남아있을 사람은 결국 내가 아닌가. 굳이 다른 사람에게 뭘 요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것들 대부분은 이미 내 안에 있는데.
내 신념은 기본적으로 삶에 의미가 없다는 것에서 뻗어나간다. 나는 이 우주에서 아주 찰나의 존재이고… 인생은 혼란이다. 나에게 주어진 의미나 사명 같은 건 없다. 나는 뼈 빠지게 일하겠지만 돈은 언제나 턱없이 부족할 것이고 번지르르한 내 신념도 언젠가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리고 말 테다. 그래도 버텨야 하고 나는 그럴 것이다. 이 혼란 속에서 나를 지키고 (나는 이 비유를 퍽 좋아한다) 내 몸이라는 신전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나와 똑같이 고독하고 의미 없고 쓸쓸하지만 찬란한 싸움을 하는 이들에게 항상 친절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야지.
나는 거울을 마주하지 않는 이상 내 모습을 마주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눈 속을 들여다 보고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지 않는 이상 내 껍데기를 바라볼 수 없다는 말이다. 껍데기에 속아 내용물을 잃어선 안 된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내가 하는 생각, 신념, 선택이어야만 한다.
그러니 울지 말아라. 저울 위에 찍힌 숫자 때문에 스스로를 원망하지 말아라. 거울 앞에서 서성이며 영혼을 바치지 말아라. 부탁하건대 괜히 죄책감을 느끼면서 음식을 먹거나 굶거나 게워내지 말거라. 외부의 것들은 절대 너를 정의하지 못한다. 너를 정의하는 것은 네가 하는 생각, 신념, 선택뿐이다. 앞으로 무슨 선택을 하든, 그것은 오로지 너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간에 너의 몸은 네가 지켜야 하는 신전이다. 어차피 모두의 기준에 맞출 수는 없으니, 신전을 네 취향으로 가꿔 보도록 해라.
너의 식사 시간이 제법 편안하길 기도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