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오스트레일리아의 연구진이 DNA 분석을 통해 동물의 자연수명을 추정하는 방법을 밝혔는데 그 방법에 따라 인간의 자연수명을 추정해 보니 38년 정도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연구진은 "의학기술의 발달과 생활양식의 변화가 지난 200년 동안 인간의 평균 수명을 2배 이상 늘렸다"라고 지적했다.
https://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923737.html#ace04ou
자연수명이 38세… 요즘 주변에서 누군가가 병으로 38세에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쩌다 그렇게 젊은 나이에… ’라는 안타까워하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위의 연구 결과를 보니 38세를 젊은 나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인류 전체 역사를 두고 보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기대 수명이 38세인 시대에 살았던 인류와 기대 수명이 80세인 시대를 살고 있는 인류가 건강을 바라보는 방식에 차이가 있었을까?
스토아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에픽테토스가 건강을 바라본 방식을 살펴보자. 그는 기원전 50년경 지금의 튀르키예 파묵칼레 지역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노예 신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철학을 공부했고 노예에서 해방되면서 철학자의 삶을 살았다. 기원전 50년이었으면 기대 수명이 길지 않았던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85세까지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게다가 노예에서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노예의 삶은 건강을 유지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85세까지 살았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몸(건강)을 내 권한(통제) 밖의 일이라고 여겼다. 내 권한 밖의 것을 얻으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나의 권한으로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님으로 집착하게 되면 불행해질 것이라고 했다.
의학의 발전과 생활양식의 변화가 이뤄지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에픽테토스의 시대보다는 건강에 대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식생활을 관리하고, 운동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손 씻기를 잘하고, 혈압 측정을
자주 하고, 혈당을 측정하고, 건강검진을 잘 챙기는 등의 행동들이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할만하다. 하지만 이렇게 잘 통제된 생활을 했지만 병에 걸리는 사람들을 나는 주변에서 흔히 보았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무언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다. 다음 기사를 읽어보자.
https://www.chosun.com/culture-life/health/2022/05/26/NXO73YOOA5GPRJTW2AUCAYAI7Q/?outputType=amp
‘암 대부분은 복불복’… 그러니 오늘날에도 여전히 에픽테토스의 말은 유효하다. 건강은 유지하고 싶고, 가지고 싶고, 잃지 않고 싶은 대상이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에픽테토스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했던 것이 아니다. 스토아학파의 또 다른 철학자 키케로(고대 로마 정치인)는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궁수의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어떤 사람이 화살을 과녁에 맞힐 때 목표로 두어야 할 것은 과녁을 명중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 내에서 화살을 정확하게 조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어야 한다. 시위를 벗어난 화살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이고 돌풍에 의해 과녁 바깥으로 튕길 수도, 과녁을 맞힐 수도 있다. ‘과녁을 맞히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감을 가지고 살기보다는 과녁을 맞히기 위해 조준을 잘하려고 하는 태도는 기대수명이 80세인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