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을 사로잡는 게 너무 많았던 학창 시절
주구장창 식당 아르바이트 얘기만 썼기에 잊고 계신 독자분들이 계시겠지만, 나는 독일에 성악을 더 공부하기 위해 나왔다. 아니, 사실 도피 유학이라고 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헛바람이 들어서 춤만 춰댔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남학생으로 산다는 것, 그것도 인싸로 사는 것은 정해져 있다. 재밌거나, 운동을 잘하거나, 싸움을 잘하거나, 차은우 배우처럼 생겼거나, 노래를 잘하는 것.
이 중 하나만 가져도 학창 시절은 편할 것이다.
공부를 잘하는 게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덕목이라지만 그건 미래를 위한 가능성일 뿐 학창 시절을 인싸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학생이었을 때엔.
나는 어릴 때부터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변성기가 찾아온 중학교 3학년 전까지는 꽤나 유려한 미성을 가졌고, 노래방을 가면 당시에 인기 있던 락발라드를 생목으로 곧잘 소화했다. 당시 아마추어 세계에선 고음이 곧 노래를 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변성기가 찾아온 후 내 목소리는 굉장한 저음으로 내려갔다. (성악 파트도 베이스 바리톤이다)
그렇게 나의 고음은 더 이상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고등학교 진학 후 노래를 못하는 애로 분류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되니 내 친구들은 편하게 한 곡조 뽑으면 다음날 엄청난 인싸가 되곤 했는데 나는 그저 부러운 마음으로 쳐다만 보았다. 어느 날 댄스 동아리 모집 공고가 눈에 들어오더라. 우리 학교는 동아리 활동이 필수였기에 나는 거기로 지원을 했고 처음 동아리 모임을 한 날 선배들의 화려한 춤사위에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 길로 계속 춤만 췄다.
하지만 춤조차 엄청난 재능을 보이진 못했다. 지나고 보니 축제 때 춤을 추면 친구들이 환호해 주는 그 맛이 맛있던 것뿐, 춤을 깊이 사랑하고 더 나아가야겠다는 향상심은 없던 것 같다. 고3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시기가 찾아오니 그런 어정쩡한 학생 댄서가 들어갈 대학이 없더라.
내 아버지는 학벌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셨는데, 내가 서울권 대학도 못 들어갈 성적을 보시곤 그 길로 성악하시는 분에게 데려가셨다.
갑자기 웬 성악가냐고? 아버지는 성우 출신이라 방송 쪽에 인맥을 약간 갖고 계셨는데 성우 혹은 방송인으로서 지원할 과가 있으니 그쪽으로 가보자 하신다. 그러기 위해선 기초가 필요한데 성악 발성만 한 게 없다 하신다. 당신께서도 그렇게 배우셨다고. 그걸 고3의 절반이 지나서야 얘기해 주시다니. 참 무심하셨다.
그렇게 성악가에게 레슨을 받고 그분의 노래를 듣는데 또 그것이 내 귀를 사로잡는다. 그렇게 수능이 끝날 때까지 레슨을 받다가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성악과로 지원하겠습니다’
그날 아버지의 잔소리를 거짓말 안 보태고 6시간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