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작)
1.
가정용 커피머신을 샀을 때가 떠오른다. 그 무렵 ㅁ은 바리스타 노릇에 빠져 지냈다. 이제는 서당 개 수준을 넘어섰지만 그 시절에는 미완의 솜씨였는데도 라테아트에까지 도전했다. 결과는, 잘되어봤자 모난 데 없이 둥글린 동그라미였고 대개는 알아보기 힘든 형체에 그쳤다.
그러던 어느 날, ㅁ이 자기 작품을 내려다보더니 큭 하고 후추 알갱이를 뿜듯 웃었다. “이것 좀 봐 봐. 그 아저씨 닮지 않았어?” 잔을 내 쪽으로 밀며 하는 말이었다.
나는 커피 잔 안을 들여다보았다. 뭉게뭉게 두유 구름에 뚫린 몇몇 틈새.
“왜 그 있잖아, 우리가 대출받은 은행에”
“아, 그 사람!”
그제야 커피 수면에 일렁이는 두유 크림이 한 사람의 얼굴로 다가왔다. 부리부리한 눈과 두툼한 입술. 결혼 전에 받은 신혼부부 전세자금 대출의 담당자였다. 이름이 뭐더라, 최 뭐였는데. 나는 눈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지금이야 물론 그 은행원의 이름 세 글자를 알지만 혹시 모를 분란은 피하고 싶으므로 ‘최’라고만 해 두겠다. 생김새에 직업, 이름까지 밝혔다가는 누구인지 눈치채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내 아량만큼이나 좁은 세상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 닮았네. 확실히 닮았어.” 중얼거리다가 나는 티스푼으로 커피를 휘저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동작이었지만 어딘가 잔혹한 구석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ㅁ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걸작을 파괴하다니 어쩌고 하는, 평소라면 나오고도 남았을 농담은 삼가고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릴 뿐이었다. 타다닥, 빗방울이 떨어지거나 장작이 타는 소리 같았다.
“왜 그래? 지금 뭔가 있는 거 같은데?” 하고 물은 사람은 나였다. ㅁ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랐다. 기억 속 깊은 곳의 서랍을 열어 보는 느낌이랄까.
“아, 그 아저씨 말을 싹 무시하길 잘했지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때도 듣자마자 뭔 헛소리야 싶었지만.”
입구 근처를 맴도는 화법이었지만 나는 ㅁ을 닦달하거나 다그치지 않았다. 커피를 스푼으로 휘저은 다음 한 모금 마시고 또 한 모금 마셨다. 기다릴 테니 준비되면 이야기하라는 신호였다. 결혼한 지 2년쯤 지났으니 그 정도 합은 맞춰진 단계였다. 최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어 안달이 나지도 않았으므로 참을성은 충분했다. 나는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달가운 감정을 모아 봤자 식탁에 흩어진 커피 가루만큼도 안 됐다.
“신경 쓸 것도 없는 헛소리야.”
“어떤 헛소리였는데 뜸을 들이실까. 밥 타겠네.” 부부 사이에 이 정도 추임새쯤은 넣어 줘야겠지.
“아니, 대뜸 너랑 결혼하지 말라고 하잖아.”
입안에 머금고 굴리던 커피가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갔다. 예비 신부 몰래 신용카드나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서 비자금을 조성해 놔라, 기껏해야 그쯤을 예상한 나에게는 상당한 일격이었다. 뒤통수가 띵했다. 생각지도 않은 고밀도의 정보다. 원두를 너무 곱게 갈아 넣으면 커피를 뽑아내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커피 머신이 된 기분이다. 시댁 식구나 친구, 선후배가 아니라 은행원 얘기가 맞나, 의심스러웠다. 청첩장까지 찍어 놓고 전세자금 대출을 받으러 온 고객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하는 은행원이 존재한다고?
“어이없지? 직접 들은 난 어땠겠어. 괜히 자기 기분까지 상할까 봐 나만 알고 있으려 그랬는데 입이 방정이다 그치?”
내가 최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곳은 신혼집을 계약한 공인중개사무소였다. 중개사는 전세자금 대출을 받을 예정이라면 자기가 아는 은행원을 연결해 주겠다며 최를 불렀다. 최는 참고 자료로 결혼식장 계약서나 청첩장이 필요하다고 했고, 나는 가방에 넣어 다니던 청첩장을 그 자리에서 건넸다. 초대가 아니라 증빙이었다.
ㅁ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나는 식탁과 맞닿은 벽에 걸린 사진을 바라보았다. 결혼 전 ㅁ의 방에서 파란색 커튼을 배경으로 노란색 니트를 입은 채 웃는 나. 우리가 서로 찍어 준 사진을 바둑판처럼 엇갈리게 배열해서 내 옆에는 ㅁ이 있고 ㅁ 위에는 내가 있고 내 위에도 ㅁ이 있다. ㅁ은 보정에 긴 시간을 들여 내 얼굴에서 기미와 주근깨를 지워 줬다. 잡티가 모조리 제거된 서른쯤의 내가 사는 거 참 우습다 그치, 하는 듯했다.
2.
나는 시내버스 안에 앉아 차창 밖을 내다본다. 프리랜서 생활과 병행할 아르바이트 자리의 면접을 보러 가는 길이지만 엉뚱한 생각에 골몰해 있다. 은행원 최 말이다.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5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때 ㅁ은 짧은 회고를 끝내고도 내게서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뭐 그런 사람이 다 있어. 오지랖 장난 아니네.” 기가 차다는 듯 웃어넘겼다. 변화는 눈에 띄지 않는 안쪽에서 일어났다. 그곳은 좁고 깊으며 비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시선으로 가득하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 애정이나 연민은 찾을 길 없는, 길거리 좌판의 빛바랜 플라스틱 바구니 속 과일에서 흠과 멍을 수색하는 눈빛. 대출 신청자가 적격인지 부적격인지 가리는 은행원의 응시와도 비슷할 듯하다. 이 은행원은 최나 박, 김과 같은 실재나 실체가 아니라 다분히 관념적인 존재라는 점은 밝혀 둬야겠지만.
보도를 걸어가는 사람들과 전선 위에 앉은 비둘기를 바라보는 이 순간에도 그 눈빛은 내 관점과 시야를 점령하고 있다. 사소하고 조용해서 평화롭기까지 한 점령이다. 점령자는 나라는 열매 한 알을 손끝으로 톡 쳐서 저 내밀한 구석으로 데굴데굴 굴려 보냈을 뿐이다.
“갑자기 전화해서는 예비 신부한테 무슨 문제가 있냐는 거야. 신혼집에 전입 신고하는 걸 좀 늦추면 안 되냐고 자기한테 물어봤다면서, 나도 알고 있는 일이냐고.”
ㅁ이 2년 가까이 혼자 간직한 이야기는 케이크에 올라간 장식용 체리에 지나지 않았다. 케이크는 나에게 있었다. 크림은 오래되어 가라앉고 빵은 쥐가 파먹듯 뜯긴 몰골로. 그렇다, 최가 말한 대로 내가 최에게 그런 문의를 했었다.
결혼 전에 나는 엄마, 언니와 함께 후미진 동네의 연립주택에 살았다. 갈라진 벽 틈으로 햇볕과 바람이 새어드는 월셋집이었고 세대주는 나였다. 우리 세 사람은 한심하리만치 대책도 없고 가난했으나 그건 내가 즐기는 주제가 아니다. 버스를 타고 옆 동네로 향하는 15분이라면 상한 과일처럼 시큼하고 물컹거리는 가난의 핵심까지 도달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차라리 생각의 나침반을 최에게로 돌리자.
대출은 ㅁ의 이름으로 받을 테지만 내가 보증인으로 들어가고 우리 둘 다 신혼집에 전입신고도 해야 했다. 그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전입신고를 해서 빠져나가면 내가 살던 집은 엄마나 언니 이름으로 월세 계약을 다시 맺어야 하는데, 집주인이 우리에게 세를 준 뒤 담보 대출을 한도 끝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다. 재계약으로 확정일자를 새로 받으면 보증금에 관한 권리도 새 날짜에서 재출발한다. 집에 문제가 생길 경우, 다른 채권자보다 순위가 밀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이 있다는 뜻이었다.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무슨 문제가 생긴다고 그래요. 오늘 이사 나가면 내일 새 사람이 들어오는 집인데 그 돈 받아서 저 돈 메꾸면 되지. 아가씨, 괜한 걱정 말고 결혼 준비나 야물게 해요. 그깟 월세 보증금 그거 얼마 하지도 않는 돈 갖고 속 끓이지 말고.”
엄마와 언니의 등쌀에 공인중개사무소를 찾아갔다가 들은 말이다. 안심이 되려는 한편으로 슬픔과 수치가 뒤섞인 감정이 올라왔다. 그깟 거 얼마 안 된다고 정의된 보증금은 우리 세 식구가 힘을 합쳐 마련한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아무 걱정 말라는 호언장담을 전했는데도 엄마와 언니는 근심을 그치지 않았다. 내가 결혼이라는 인생의 전환점 앞에서 숨이 차 헉헉대던 시기였다. 말로만 듣던 결혼 준비는 과연 가파른 언덕길이어서, 신경 쓸 고비가 한두 군데도 아니었다. 가진 돈 없이 하는 결혼이니 간소하기 짝이 없는데도 중압감만큼은 분에 넘치게 거창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엄마와 언니를 멍텅구리 같은 현실에 남겨 두고 나만 달아난다는 죄책감이 결혼을 앞둔 감상인 척 침투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언니가 어디에선가 ‘보증인의 전입신고 시기는 은행 담당자 재량권에 속한다더라.’는 뜬소문을 물어 와서는, 조만간 집을 빼서 이사할 테니 그때까지만 전입신고를 늦춰 달라 사정해 보라며 채근했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고 느긋했더라면 다른 방법을 궁리해 봤겠지만 지치고 괴롭던 나는 반쯤은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최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을 듣던 몇 초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맛없는 여물을 씹다 말고 밭 갈러 나가야 하는 여윈 누렁소 같던 기분. 최가 전화를 받았고, 나는 언니가 떠맡긴 부탁을 더듬거리며 읊었다. 침묵도 눈빛만큼 싸늘해질 수 있구나 절감한 순간이 그때 말고 또 있었나? 최는 두서없는 말을 듣는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길지도 않은 몇 문장으로 나(와 언니와 엄마)의 청원을 거절했다. 그러고서는 ㅁ에게 전화를 걸어 나와 결혼하지 말라 했고. 앞뒤 상황을 맞춰 보니 그랬다.
이제 다 왔다. 이번 정류장이다.
휴대폰 액정에 얼굴을 비춰 보며 벼락치기 면접 준비를 한다. 최를 머릿속에서 끌어내 바지 뒷주머니, 코 푼 휴지 틈에 쑤셔 넣는 일도 잊지 말 것. 수첩을 펼쳐 면접 장소를 확인한다. 나는 꽤나 아날로그형이라, 어디든 갖고 다니는 이 수첩에 뭐든 시시콜콜 적어 둔다. 정류장에서 직진하다가 좌회전, 아파트 단지가 나오면 상가 건물 307호. 근무 시간은 월, 수, 금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어중간한 시간대였지만 옆 동네라 가까운 데다가 시급도 괜찮은 편이라 지원했다. 하는 일은 사무실 정리와 사무 보조라 했다. 설명만 보면 간단한 일이지만 합격할 자신은 없었다. 결혼 전부터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 생활을 해 왔으니 경력 밑바닥까지 긁어 써도 이력서에는 광활한 여백이 남았다. 면접 보러 오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고는 놀란 나머지 ㅁ의 어깨를 후려쳤을 정도다.
상가 건물까지는 도착했는데 307호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겉보기에는 무 자른 듯 네모나게 생겨서는 안으로 파고들수록 무슨 이런 미로 같은 건물이 다 있는지. 면접 시간은 다가오고 뒤늦게 긴장이 됐다. 땀이 나고 심장이 뛴다. 같은 모퉁이를 세 번이나 도니 복도 끝에서 307호가 나온다. 조금 전까지는 없었는데 싶지만 그럴 리가. ‘택배는 문 앞에 놓고 가 주세요.’라고 문에 써 붙인 종이를 보며 숨을 골랐다. 내 껍데기만 택배 상자처럼 문 앞에 놔두고 혼만 챙겨 집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대체 몇 년 만의 면접인가, 무섭다. 내 안의 눈빛이 이 멍청아 바지 지퍼 열렸어, 알려 준다. 바지를 확인했지만 지퍼는 잠겨 있다. 휘파람 비슷한 소리가 나도록 한숨을 내쉬고는 10시 정각에 307호의 문을 두드렸다. 답이 없다. 10초 기다린 다음에 또 두드린다. 기척이 없다. 10시 1분이 되기 전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음흉한 건물과 달리 307호는 아담하고 아늑했다. 맞은편 창문으로 청명한 가을날 햇빛이 비쳐 들어온다. 낮은 소파 세트와 벽을 등지고 놓인 나무 책상. 문 옆으로 난 좁은 복도를 따라 탕비실과 문 닫힌 방이 하나. 얼마간 사무적인 느낌을 주는 가정집 같다. 나뭇잎 문양이 찍힌 커튼부터 아무리 봐도 가정용이고.
“오셨군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기겁해서 나는 탄력받은 스프링처럼 뛰어올랐다. 뒤를 돌아보니 검정 슬랙스에 파란 셔츠를 입은 여성이다. 나이는 60대 후반쯤?
“이런, 미안해요.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노크라도 하고 들어올걸 그랬나 봐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안녕하세요.” 나는 조금이라도 좋은 인상을 주려고 허둥댔다. 솔직히 말해서, 사무실이 마음에 들었다. 노크 어쩌고 하는 얘기는 설마 농담이겠지.
“어디 보자, 송은서 씨? 맞지요?” 바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확인하더니 나를 보며 한 말이다. 나와 똑같은 수첩이다. 어쩐지 이 사람도 마음에 든다. “나도 송씨랍니다, 송미연. 송 여사라고들 부르죠. 여사란 말이 썩 좋지는 않지만 어머님보단 낫다 싶어서 그러려니 해요. 왜 나이 좀 먹었다 싶은 사람한텐 어딜 가든 어머님, 아버님, 그러나 몰라.”
소파에 마주 앉았으나 여사가 내온 따뜻한 캐모마일 차와 바삭한 코코넛 쿠키 때문인지 면접보다는 티타임 같다. 여사는 일하는 날도 듬성듬성한 데다가 근무 시간도 짧은데 괜찮겠느냐고, 요일도 시간도 애매해서 그런지 지원자도 몇 안 되는 데다가 면접 보러 온 사람도 이런저런 이유로 퇴짜를 놓더라며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일할 사람은 이번에 처음 구해 본다고 한다. 내가 초보 고용주를 면접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다.
“은서, 이름이 예뻐요. 난 몇 년 전에 개명했는데 원래 이름이 뭐였느냐면 점례였어요. 나이가 들면 익숙해지겠지 싶어서 기다렸는데 해가 가면 갈수록 나랑 안 어울려.”
나는 웃어도 될지 몰라서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점례라는 이름은 너무나도 힙해서, 설원의 웅덩이에 비친 하늘처럼 쨍한 색감의 셔츠를 기막히게 소화하는 이 여인도 감당하기 버거울 듯하다.
“마음에 안 들고 익숙해지지도 않는 구석이 나한테 있으니 뭐 어쩌겠어요, 바꿔야지. 은서 씨는 어때요, 바꾸고 싶은 데가 있나요?”
본격적인 면접 시작인가, 각오하니 솔직한 대답과 모범답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바꾸고 싶은 부분이라. 내 안에서 나를 보는 은행원의 시선? 아니면 그럴듯한 사회적 자아를 대출받기에는 어느 구석으로 보나 부적격인 송은서 그 자체? 은서, 그래요 은서, 이름이야 어여쁘지요. 이름은.
“이런, 곤란한 질문이었나요. 미안해요. 그나저나 여기서 하는 일이 전화 받고 우편물 분류하고 손님 오면 다과 내드리고, 아침에는 청소 좀 하고요. 이 정도인데 지루하지 않겠어요?”
“지루하긴요, 전 괜찮습니다.” 돈 벌려고 하는 일이란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좋다.
“좀 오래 일해 주었으면 하는데요. 난 사람이든 뭐든 한번 정들이면 쉽게 헤어나질 못해서. 이름 바꾸는 것도 15년이나 고민했는걸요.”
“마침 저도 오래 일할 곳을 찾고 있었어요.” 오랜만에 해 보니 아르바이트 구하기도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한 번으로 끝난다면 대환영이다.
“그렇다면 좋아요, 같이 일해 보는 걸로 결정을 지을까요?”
“지금 바로요?”
“길게 끌 거 있나요. 눈치를 보니 우리 둘 다 서로 합격인 거 같은데.” 미연 여사(나는 이렇게 부르기로 결정했다.)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보기보다 손가락 마디가 굵고 따뜻한 손이었다. “은서 씨. 고맙고, 축하해요.”
결혼식 전날 ‘결혼 축하합니다.’라던 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자세를 고쳐 앉는 척하며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은 최를 소파와 엉덩이 사이로 뭉갰다. 커피 위에 뜬 얼굴을 티스푼으로 휘저어 없애듯이.
3.
나는 그림 앞에 서 있다. 여사의 방, 책상 뒤쪽 벽에 걸린 풍경화인데 언덕 전경에는 아무런 특징도 없다. 며칠 전, 여사도 나처럼 이렇게 그림 앞에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긴 뒷모습으로.
그날 집에 돌아가서 ㅁ과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꼭 아무도 찾지 않는 탐정사무소 같아. 의뢰인은 한 명도 없고, 탐정은 방에 틀어박혀서 암모나이트 화석이나 들여다보는 거지.”
우리는 침대에 드러누워 각자의 휴대폰으로 디카페인 원두를 검색하던 참이었다. 요즘 들어 심장이 카페인만 들어가면 민감하게 구는데도 두유라테를 포기할 마음이 없기에 해결책으로 디카페인 커피를 찾아냈다. 추운 날씨와 라테는 사이좋은 짝꿍이었고, 미연 여사의 사무실에서 일한 지도 두 달이 흘러 초겨울에 이르렀다.
“그럼 자기는 뭐야? 조수? 비서?”
“탐정이 탐정 노릇을 안 하는데 조수는 무슨. 전화랑 우편물도 안 오고 손님도 없으니까 비서도 아니고. 갈 때마다 청소는 하니까 청소부라고 해야 하나?”
매주 월, 수, 금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응접실 책상에 앉아 사무실을 지켰지만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연결이 안 되어 있나 싶어서 수화기를 들어 귀에 대 보는 클리셰를 범할 정도로 잠잠했다. 세상에서 버려진 주소인 듯 신용카드 청구서 한 장 날아오지 않았고, 손님이라고는 지나가는 길에 들러 본다는 식으로 신흥 종교를 전도하러 온 젊은 남녀 한 쌍이 전부였다. 그 남녀마저 없었다면 나는 307호가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인다고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청소는 갈 때마다 했다. 아침 9시 50분쯤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면 커튼을 걷고 창문부터 열었다. 청소기로 바닥과 집기의 먼지를 빨아들이고 물걸레질도 했다. 탕비실로 가서 차와 음료수, 과자를 정리하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전기 주전자에 물도 채운다. 그렇게 30분쯤 보내고 책상에 앉으면 점심시간 전까지는 여사가 왔다. 여동생이 구워 줬다는 쿠키나 빵, 냉장고 속 재료가 총출동한 볶음밥 등등을 무려 둘리가 그려진 도시락 가방에 넣어 와서는 응접실 탁자에 펼쳐놓고 나랑 나눠 먹었다. 소풍 같은 점심밥을 먹고 나면 여사는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휴대폰으로 잡다한 검색을 했다. 컴퓨터도 없고 인터넷 선도 깔려 있지 않은 곳이었다. 까만 증조할머니 수첩을 꺼낼 때부터 얼마나 구식인지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래서 뭐 불만이라는 얘기는 아니고.
“같이 점심 먹을 사람이 필요해서 날 뽑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어.”
“화요일이랑 목요일은?”
“글쎄, 단식의 날인가. 아님 아예 사무실에 안 나오거나.”
“청소해 줄 사람이 필요한 걸 수도 있지.”
“그건 도우미 서비스가 더 편할 텐데.”
“손이 가도 사람을 직접 고용해서 관리하고 싶은 거 아닐까? 요새는 뭐든 다 파견이랑 외주로 돌리니까 좀 옛날식이긴 하지만 사실은 그게 더 음, 그래, 정중한 방법 같아.”
나는 휴대폰을 쇄골 근처에 놓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만 해도 8년째 외주자로 밥벌이를 해 오고 있다. 말이 프리랜서지, 일이 있으면 있고 없으면 끝도 모르게 없어서 잠재적 백수에 가까웠다. 느슨하고 헐거운 아르바이트라도 구해야겠다는 결심도 경제적 필요 때문이었다고만 생각했는데, 타인과 소통하고 싶다는 욕구도 웬만큼은 작용하지 않았을까. ㅁ과 가족, 몇 안 되는 친구 말고 완전한 타인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서 소통하고 싶다는 마음 말이다. 집 앞 슈퍼에 갈 때도 심호흡부터 하는 집순이가, 의외네.
“여사님이야 매사에 정중하지. 친절하고 정감도 있는데 선을 넘지는 않거든. 방 청소도 직접 한다 그러고. 그건 내가 해도 괜찮은데.”
여사는 탕비실 옆에 있는 방에 머물렀지만 그곳 청소는 나에게 맡기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하겠다 했지만 직접이든 간접이든 그냥 안 하는 눈치였다. 방에 틀어박혀 무엇을 하는지는 나도 몰랐다. 무슨 일로인가 한두 번 들어가 봤지만 암모나이트 화석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건 방에 들어오지 말란 소리를 돌려서 한 거 아냐? 왜 회사에서도 자기 책상 건드리는 거 싫어하는 사람 있잖아.”
“아, 그런 뜻인가. 못 들어오게 한 적은 없는데, 문도 안 잠가 놓고. 앞으론 좀 조심해야겠다.” 하고서 디카페인 원두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찰나, 퇴근 전에 본 여사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녹차가 떨어져서 사 오겠다 말하려고 방으로 갔더니 여사가 팔짱을 낀 채 벽을 향해 서 있었다. 어딘가 기묘한 장면이었는데, 풍경화가 아니라 그 너머를 보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것도 내가 방문 앞에서 두 번이나 부른 다음에야 말소리를 알아들을 만큼 깊은 생각에 빠진 채.
여사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며칠 사이 내 잠재의식은 그림 뒤에 무엇인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결론을 입증하려고 그림 앞에 서 있다.
금요일 10시 10분. 창문을 열어젖히고서 청소기를 돌리다 말고 이 방에 왔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나는 ㅁ에게 말한 대로라면 출입을 스스로 삼가야 했을 방에 어쩐지 ‘몰래’ 들어왔다. 들어왔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책상에 등이 보이게 엎어 놓은 책이나 공책, 뚜껑 열린 펜을 건드리지도 않았고 찢은 종이가 가득한 쓰레기통을 비우지도 않았고 응접실과 똑같은 커튼이 쳐진 창문을 열지도 않았다.
그림 앞에 섰을 뿐이다.
잠시 뒤, 5초에서 10초쯤 망설이다가 그림 뒤를 살펴보겠지만.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액자 테두리를 밀었다. 액자 테두리에는 먼지가 없었다.
짐작이 맞았다. 그림 뒤에는 무엇인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벽에 설치된 금고였다. 도끼로 내리찍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튼튼한 금고.
그림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고는 도망치듯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카페인을 과음한 사람처럼 심장이 뛰었다.
4.
진실이란 사실과 해석을 모은 다음 제목을 지어서 붙여 놓은 상자가 아닐까. 어떤 사람의 상자 안은 도서관 서가처럼 질서정연하지만 누군가는 그 안을 온갖 분별없는 잡동사니로 채운다. 내 상자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여사 방에서 금고를 보았으니 하는 말이지만 그 상자를 일종의 금고라고 바꾸어 말해도 무방할 듯하다. 내 금고에는 나 자신을 깐깐한 구매자나 냉정한 은행원처럼 뜯어 보는 시선만 가득하지 않을까, 생각하면 착잡해진다. 여사가 금고를 열어서 보여 줬을 때, 나는 그분이 한층 더 가깝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부담스럽기도 했다. 속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마음이나 금고나 비슷하다.
ㅁ은 업무차 은행에 갔다가 최를 보았다. 그리고 그 시간쯤, 나는 여사 방에서 금고 안을 보았다. 나중에 시간을 맞추어 보니 이 둘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ㅁ의 목격담은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들었지만 말이다.
“승진했는지 창구 뒤쪽에서 일하고 있더라. 하긴 5년인가 6년인가, 그쯤 지났으니까. 응? 아니, 나랑은 눈도 안 마주쳤어. 엄청 바빠 보이더라고.” 저녁밥을 먹고 디카페인 원두로 내린 에스프레소와 두유라테를 마실 때 ㅁ이 아 참, 하더니 꺼낸 말이었다. “왜 그래? 그 아저씨 얘기 하니까 기분이 별로야?” 내 안색을 살피면서 덧붙인다.
내 표정이 이상했나. 그렇기도 했을 것이다. 금고 이야기를 하려다가 두유 거품과 함께 삼킨 참이었으니까. 비누 받침 하나도 의논해서 사는 우리에게 거액이 든 금고라면 가십 중의 가십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최를 보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금고는 묻어 두기로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리 목격담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빵 반죽에 올리는 소금과 이스트 사이에 거리를 두듯이 말이다. 넓어봤자 반죽의 테두리 안이니 언젠가는 말하게 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더 있다가, ㅁ처럼 1년이나 2년쯤 속으로 식히고 삭힌 다음에 우연이나 실수로. 소금과 이스트가 밀가루 반죽에 스며들어 빵을 만들듯이 최와 금고가 내 안에서 합쳐지리라는 예감.
“기분 좋을 건 없는 사람이지. 암튼 그 아저씨도 멀리는 못 갔나 보네.” 나는 심상한 척하며 두유 거품을 입술에 묻혔다. 우리는 신혼부부 전세대출로 마련한 집에 아직도 살고 있고, 최도 이 도시를 맴도는 모양이다. ㅁ이 다니는 회사는 우리 집에서 버스로 25분쯤 걸리는 곳이었다.
ㅁ이 샤워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간 다음에야 나는 삐걱거리는 식탁 의자에 기대앉아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곱씹어 보았다. 아침에 출근하니 미연 여사가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웬일인가 싶었는데 방에서 얼굴만 내밀더니 “은서 씨, 좀 이따가 방으로 와 줄래요?” 했다. 나는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탕비실로 가서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마셨다. 컵을 씻어 건조대에 올리고 손에 크림을 바르니 3분이 지났다. 방 앞으로 가서 노크하자 문이 열리더니 여사가 어서 들어오라는 듯 손으로 내 팔을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문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린 눈치였다. 여사는 문을 잠갔다. 전등을 켜지 않은 데다가 커튼이 지퍼처럼 아물려 있어서 방은 어두웠다. 그래서인지 한참 지난 다음에야 금고가 눈에 들어왔다. 풍경화가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고 그 뒤로는 활짝 열린 금고. 여사가 전등을 켜자, 금고 안이 보였다.
돈이었다. 고액권 뭉치.
“놀라게 해서 미안하지만 말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사는 그 돈이 얼마쯤 되는지 낮고 빠른 어조로 말해 주었다. 듣는 사람이 약간의 불쾌감을 느낄 만한 액수였다. 여사는 금고 문을 닫고 풍경화를 제자리에 돌려놓더니 나를 책상 앞쪽의 소파에 앉혔다. 그러고는 자신도 내 옆에 앉는다.
가짜 지폐가 아닐까? 둘리 가방에 과자와 도시락을 넣어 다니는 미연 여사의 짓궂은 장난이라든지. 5년 전 ㅁ이 최의 말을 전해 주었을 때도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ㅁ은 그런 장난으로 상대에게 타격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미연 여사도 마찬가지였다. 알고 지낸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허튼 돈 자랑을 하거나 허풍을 떨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은서 씨도 금고는 눈치챘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더는 미룰 수가 없었어요.”
나는 빨개지는 얼굴을 헛기침으로 무마했다. 내가 방으로 ‘몰래’ 들어와 그림 뒤를 훔쳐보았다는 것을 아는구나. 액자 위치가 평소와는 달랐거나 그랬겠지. 금고를 보고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허둥대며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처음부터 해야 할 이야기였어요. 이를테면 근무 환경 같은 거니까요. 그런데 나한테는 또 내 나름대로 비밀 같은 거고, 말했다가 은서 씨가 부담스러워하면 어쩌나 싶어서 우물쭈물하다가 타이밍을 놓쳤죠. 이상한 소리 같겠지만 은서 씨를 보자마자 이 사람이구나, 우린 아주 잘 지낼 거야, 싶었거든요.”
고개를 숙인 채 여사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면접 보는 날 여사가 금고와 거액의 존재를 밝혔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ㅁ과 상의했을 테고 우리는 이상한 곳, 이상한 사람, 이상한 돈이라는 결론을 내렸겠지. 이 사람이 어떻게 저런 거액을 갖고 있을까, 왜 금고에 현금으로 보관해 두었을까, 혹시 검은돈이 아닐까, 추측과 억측으로 지금도 머릿속이 시끄러우니까. 나는 밀가루 반죽의 테두리를 넘어 저 멀리 도망쳤을 테고 이곳에 출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합법적인 돈이니까 혹시라도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저건 우리 집안 돈이에요. 조부모님과 부모님과 내 돈이 무른 비누처럼 뭉쳐 있죠. 나라도 은행에 입금하면 될 일인데 사람이 그렇잖아요, 살던 대로 쭉 살게 되더라고요. 돌아가신 양반들처럼 딱히 은행을 못 믿는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면서요. 지금이라도 은서 씨한테 선택권을 줘야 할 거 같아요. 그렇지만 난 은서 씨와 앞으로도 쭉 같이 일하고 싶다는 점은 알아주었으면 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았어요. 생각을 좀 해 봐도 될까요?”
“그럼요, 당연하죠. 원한다면 이 방에 카메라 같은 걸 설치할 수도 있어요. 돈이 아니라 은서 씨를 위해서요.”
화장실에서 ㅁ이 부르는 시끄러운 노래가 기억의 스위치를 내린다. 나는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최의 이름과 은행 이름을 조합해 검색해 본다. 최는 ㅁ이 말한 지점의 차장이고, 지난달 무슨 행사에선가 행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 부엉이처럼 커다랗게 뜬 눈으로도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은행에 입금하든가’라고 미연 여사는 말했다. 나에게 선택권을 줘야 할 것 같다고 말이다. 선택권. 근무냐 퇴사냐, 둘 중 하나라고 이해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자세를 고쳐 앉는다. 금고, 돈, 은행, 선택권······. 이 모든 것이 한데 합쳐지는 장면을 상상했다. 무른 비누 조각이 한 덩어리로 뭉쳐진다. 오븐처럼 뜨거운 머릿속에서 비누 반죽이 펑! 부풀어 올랐다.
5.
최는 왜 ㅁ에게 나, 송은서와 결혼하지 말라고 했을까.
전입신고를 꺼리는 나 때문에 대출에 문제가 생겨서 귀찮아질까 봐 싹을 자르려 했을지도 모른다. 금융 면에서 보자면 나처럼 싯누런 떡잎이 가정 경제에 얼마나 치명적인 독으로 자라나는지 수년간 지켜봐 왔기에 경고 한마디를 해 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어차피 ‘모른다’로 매듭이 지어지는 짐작밖에는 못 했지만, 나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최의 속뜻과 의도를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그 사람 몫이고, 나에게는 내 몫의 고민이 따로 있다. 나의 하나뿐인 남편, ㅁ이다. 나는 우리 집 부엌의 찬장과 냉장고에 있는 익숙한 재료로 내가 아는 빵만 만드는 소박한 제빵사니까.
우리 결혼이 ㅁ에게 어떤 피해를 끼쳤는가 하는 문제를 나는 밀가루 반죽처럼 치대고 주물러 왔다. 반죽을 밀대로 밀어 종잇장처럼 얇게 펼치는가 하면 틀을 위에 놓고 눌러 여러 모양으로 찍어 냈다가 뭉쳐서 굵은 머리채처럼 땋기도 했다. 은행원의 충언을 무시하고 나와 결혼한 결과, ㅁ은 어떤 손해를 보았는가. ㅁ은 소액을 투자한 주식마다 손실을 입을 만큼 투자에는 재주가 없다. 그렇다면 몇십 년에 이르게 될 삶과 생활을 투자한 결혼이란 대서사시에서는 어떤 고난에 직면하였는가. 그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이직 면접을 앞둔 은행원처럼 차갑고도 소심한 심장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결혼생활에서 ㅁ의 득과 실을 결정짓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이기 때문이다.
가끔 ㅁ에게 “요즘 어때, 행복해?” 물어본다. 뜬금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해하던 ㅁ도 능숙한 웃음을 지으며 “최고로 행복하지.” 대답할 만큼 결혼생활에 관록이 붙었다. 그는 분명히 나와 지낸 7년 동안 손실을 입었다. 노후 준비가 되지 않은 장모, 매달 처가로 건너가는 용돈, 이따금 친정과 통화를 끝내고는 울상을 짓는 아내······. 이런 돌부리를 얕은 개울물 들여다보듯 예상했다 해도 ㅁ은 나와 결혼했을까? 놀랍게도 그랬으리라 본다. 결혼해 보니 ㅁ은 둔감하고도 대담한 사람이었다.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하거나 지나간 결정을 후회하는 감정을 손해만 보는 주식처럼 쓸모없다고 생각하며 처분하는 사람 말이다. ㅁ은 꼭 필요한 재로만 써서 빵을 굽고, 그 재료는 우리 둘이 공유하는 삶에서 기르고 돌보아서 거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따금 두려워진다. 정성을 다해 키운 벼를 추수했는데 벼와 똑 닮은 잡초라면 그건 얼마나 잔인한 악담일까.
“돈을 금고에만 넣어 두시면 손해가 아닐까요. 예금 이자가 꽤 클 텐데요. 돈이 안전한 곳으로 가면 저도 부담이 덜할 거 같고요.” 금고 안을 보고 나서 며칠 뒤, 미연 여사에게 말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그런데 어느 은행에다 입금해야 하나. 내가 그쪽으론 아주 꽝이어서요.” 기다리던 해답이라는 듯 반색하면서도 여사는 나에게 일거리를 남겼다.
고백하자면 그 전날, 은행에 다녀온 참이었다. 최가 근무하는 은행이었다. 등과 목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창구 뒤쪽에 앉은 최를 살펴보았다. ㅁ이 말했듯 최는 찡그린 표정으로 모니터만 노려보았고 벗겨지기 시작한 이마에는 피로함이 어른거렸다.
“미안하지만 은서 씨가 좀 알아봐 줄래요?”
“아, 그럴까요.”
은행을 알아보러 외근을 나가기로 했다. 갈 곳은 뻔했다. 택시를 탔더니 차가 막히지 않는 대낮이라 15분 만에 도착. 은행에 들어가 번호표를 뽑고 대기석에 앉는다. 나도 ㅁ처럼 업무차 공식적으로 은행에 방문한 셈이었다.
뭘 어쩌겠다는 계획은 없다. 내 돈도 아니고, 내 권력도 아니고, 요즘 은행에서는 예금보다 대출을 반기지 않나 싶기도 하고. 나는 세상 물정을 모르고 내 마음도 모른다. 이쯤에서 돌아가야 하나. 미연 여사에게는 제일 큰 은행에 연락해 보라 둘러대고 CCTV부터 달자고 제안한다면? 만에 하나 금고에 탈이 나도 내 무고함은 입증되겠지. 아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생겼으니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는 편이 나으려나. 그러다가 훗날 사무실에 도둑이라도 들었는데 내가 정보를 흘렸다고 의심받으면? 미연 여사가 그럴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은 닫힌 금고처럼 모를 일이니까······.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미래의 불행을 막으려면(나는 ㅁ과 달리 실현되지 않은 걱정을 날마다 오늘 날짜로 대출받는 유형이다.) 돈을 은행에 입금하게 해야겠다. 다만 여기 말고 다른 은행에.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전광판에 내 번호표의 숫자가 떴다. 창구에 앉은 은행원이 내 번호를 부르는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예금을 좀 하고 싶은데요.” 창구로 가서 번호표를 내밀고 말했다.
“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앞으로는 입구에 있는 ATM을 이용해서 입금하시면 오늘처럼 오래 기다리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주임 명찰을 단 은행원이 말했다.
“그게 아니라, 상담을 받아 볼까 해서 왔어요. 저희 사무실 여사······, 대표님 돈이라서요.”
금액이 어느 정도냐는 직설적인 질문에 나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입 밖으로 뱉어놓고 보니 확실히 비현실적인 액수였다. 주임은 놀란 기색은 아니었으나 마우스를 쥐었다가 놓고는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뒤쪽으로 갔다. 수박을 고르듯 오른손으로 이마를 두드리고 있는 최 차장에게로. 인생의 물줄기는 얼마나 교묘하게 속마음이 파놓은 고랑을 타고 흐르는지. 허리를 숙여 소곤거리는 주임의 말을 듣던 최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찰나에 시선이 마주쳤으나 나를 알아보지는 못하는 듯했다. 최는 내가 가장 길게 대화를 나누어 본 은행원이지만 그에게 나는 7년 전에 스쳐 간 손님일 뿐이다.
“저희 쪽에서 귀사로 찾아뵙고 상세한 설명을 드려도 될까요?” 주임이 창구로 돌아와서 말했다.
예금이 푸대접받는 시절은 아닌가 보다. 하긴 그렇지, 돈 싫다는 곳이 어디 있다고. 미연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 시간을 잡았다. 은행에서는 오늘이라도 방문하고 싶어 했지만 여사는 금요일 오후 2시에 와 달라고 했다. 주임은 금요일에 찾아갈 직원이라면서 명함을 건넸다. 두꺼운 미색 종이에서 최의 이름이 새까맣게 빛났다. 운명이란 어디까지 고의이고 어디부터 우연일까.
최는 금요일 오후 2시가 되기 10분 전에 찾아왔다. 최의 주문대로 따뜻한 둥굴레차를 준비해서 갖다주었으나 최는 나를 투명 인간으로 대했다. 그의 관심은 현금 주인인 미연 여사에게 99퍼센트 할당되었다. 뭐, 당연한 일이다. 나라면 차를 준비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쯤은 했겠지만.
탕비실로 자리를 피해 진하게 우린 홍차를 마시는데 창밖으로 가로수 가지가 앙상했다. “현금 출처는 물론 증명이······.”, “운반은 저희 쪽에서······.”, “저는 맹탕이라 결정은 은서 씨가······.”와 같은 말소리가 잘린 나뭇가지처럼 쪼개진 채로 날아들었다. 미연 여사가 어떤 말로 추어올리든 나는 심부름꾼일 뿐이다. 같은 공간을 일정한 시간 동안 공유하지만 실상을 파악할 수는 없는 부유한 여인의 일꾼. 나는 혀끝으로 홍차의 떫은맛을 느끼면서 웃음을 지었다.
대화가 정리되는 기척이 들려 나가 보니 최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비로소 내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상대의 적격과 부적격을 가리는 은행원처럼 공정하고도 엄격한 눈빛으로.
6.
“여사님이 번호를 알려 주셨는데 이미 저장이 된 번호더라고요.” 최는 이런 말로 서두를 열었다. 미연 여사가 최에게 전화번호를 알려 줘도 되겠느냐 물어서 그러시라고 대답했었다.
네에, 대답하며 우리 동 앞의 벤치에 앉는다. 엉덩이와 코끝이 차가웠다. 잘 구운 도자기 빛깔 하늘로 새가 날아간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여러 마리. 통화가 길어지지 않으면 좋겠는데. ㅁ에게 두부조림을 하겠으니 어울리는 술을 한 병 사서 들어오라고 말해 놓았다. 내일은 토요일, ㅁ이 토마토 파스타를 하겠지. ㅁ과 내가 부부로 살아갈 미래가 이상하고도 희미한 감탄으로 다가왔다. 올해 끄트머리에 결혼기념일이 남아 있다.
“제가 기억력이 형편없어서 뭐든 적어 두는데요, 예전 기록을 뒤져 보니까 송은서 씨와 부군의 성함이 몇 번 나오더군요.”
이 사람도 까맣고 조그만 수첩을 사용할까, 생각하다가 나만 듣도록 피식 웃었다. 설마, 엑셀 파일 같은 걸 쓰겠지. 방대한 문서의 셀 몇 개를 차지하고 있을 송은서란 이름. 최의 기록 속에서 나를 수식하는 말이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다.
“제가 부군께 주제넘은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는 얘기는, 들으셨겠죠?”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나는 시치미를 떼었다.
“그렇다면 이거 제가 괜한 소리를 한 셈인데요.” 최는 염려라고는 얼씬도 하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객관적인 정보와 수치로 고객을 판단해야겠지만 프로그램에 숨겨진 뒷문처럼 저에게도 저만의 방법이 있죠. 고객의 말과 행동, 주저하고 망설이는 부분, 서두르는 대목, 이 모든 것이 판단의 근거가 됩니다. 거기에 직감까지 작용하면 이따금 선을 넘기도 했을 테죠. 그것도 다 열정이 있을 때 얘깁니다.”
“글쎄요, 주제넘은 말이라 하셨던가요?” 하고서 어깨를 으쓱했다. 공중으로 치솟는 어깨의 날카로운 각도가 짧은 잡음으로라도 저편에 가 닿았으면.
“어쨌거나 대출은 실행되었고 두 분은 결혼하셨지요. 지금껏 행복하게 살아오셨을 테고요.”
“결혼 축하를 해 주신 덕분인가 봐요.” 감히 남의 행복을 운운하지 말라. 우리 모두 자신의 불행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잔챙이일 뿐이므로 당신은 당신 자신의 행과 불행이나 고뇌하기를.
“어느 은행에 입금할지는 송은서 씨가 고를 거라고 여사님이 그러시던데요.”
“은행 일은 전혀 모르시는 분이라, 제가 알아봐 드리기로 했어요.”
“살다 보면 인생에 전환점이 몇 번은 오게 마련이죠. 지금 제가 그 전환점 앞에 서 있는 모양입니다. 은행을 그만둘 때가 되었나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송은서 씨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조금 더 다니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어느 쪽이 더 제 인생에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입니다만.”
“심사숙고한 다음 여사님께 잘 말씀드릴게요. 아무리 그래도 결정은 여사님이 하시는 거니까요.” 최와 대화를 이어갈수록 위산이 역류하듯 목구멍과 속이 쓰렸다. 이 사람은 내 불운하고 애처롭던 시절을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게 한다. 먼 훗날에 이 초겨울의 오후 한때도 그런 방식으로 기억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짓궂은 장난을 왜 시작했던가 후회가 밀려왔다. 장난이 아니라면 이 모든 것은 무엇일까. 화풀이? 복수? 엉킨 매듭을 자르려는 헛손질? 나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지쳤다.
“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맥 빠지도록 평범한 당부를 끝으로 최는 전화를 끊었다.
한참을 추위에 떨며 앉았다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빨리하여 아파트 단지 밖으로 벗어나 택시를 잡아탄다. 1분이라도 빨리 사무실로 돌아가서 미연 여사에게 최가 근무하는 지점에 입금하면 어떻겠냐고 말해야지. 주제넘은 열정을 잃어버린 은행원을 남에게 빌린 선의로 조롱한다면 그 얼마나 관대한 모욕일까. 아니 아니, 그렇지 않아. 금고의 돈은 원래대로 두어도 된다고 말하자. 이제 괜찮다고, 더는 신경 쓰이지 않고 관심도 없지만 금고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버스에서 내려 상가 건물의 계단을 오르는 동안 진한 커피를 마신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가락 끝으로 문질러 지우듯 307호가 사라지고 벽만 남아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여사는 사람에게서 태어난 자가 아니며 나를 시험하거나 도와주려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사가 아닐까.
307호는 변함없고 여전했다. ‘택배는 문 앞에 놓고 가 주세요.’라는 종잇장은 끝부분이 말려 올라가 나달거렸다. 누가 뭐래도 지상의 풍경이다. 여사가 가 버려서 잠긴 문을 열쇠로 열었다. 여사 방으로 들어가서 풍경화를 바라보고 선다.
저 뒤에 금고가 있다.
그 앞에 내가 있다.
나는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안다. 나를 물끄러미, 하염없이, 바라보고 바라보다 얼굴이 닳아 버린 사람이다. 그 흐릿한 얼굴로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뒤만 돌아보던 사람이다.
온몸에 힘을 주고 웃어 본다. 입술과 턱에, 뺨에, 눈썹과 이마에 등불이 켜지듯 윤곽선이 돌아온다. 자아, 이제 됐다. 다 지나갔고, 너무 그렇게 용쓸 것 없다. 나를 보는 눈길에 간장 양념이 보글거리는 두부조림처럼 따뜻한 빛이 어린다.
사무실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배가 고팠다. ㅁ은 퇴근길에 어떤 술을 사 올까? 나는 조금 전과는 다른 이유로 발걸음을 빨리해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