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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 달라 Feb 22. 2024

두 번의 OT가 선물한 것

이제야 나를 알았네.


수능을 마치고 세 개의 대학에 지원했다. 두 곳의 공대와 교대 한 곳. 여중, 여고를 나왔지만 남자들 틈에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담임 선생님의 권유를 덥석 물었다. 어려서부터 여자는 선생님이 최고라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나머지 한 장은 교대에 지원했다. 먼저 공대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어느 곳이든 가기만 하면 밝은 미래가 준비되어 있을 거라는 철없는 생각에 일단 등록을 했다. 그런데, 오리엔테이션이 졸업식과 겹치고 말았다.


"반장인데 졸업식에는 참석해야지."


담임 선생님께서 설득하셨지만, 들뜬 마음에 당차게 거부했다.


"미래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겠습니다."


졸업식이 다음 날이었지만, 나는 부푼 기대를 안고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학교 정문을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상상한 대로 청춘의 낭만을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버스에 오름과 동시에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공대 남학생 틈에 앉아있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나처럼 불안하게 서있던 여학생과 통성명을 하고 뒷자리에 같이 앉았다. 덩치가 커다란 선배는 단전에서 끓어올린 걸걸한 목소리로 신입생 기강을 잡기 시작했다.


“바위 처~럼 살아가 보자! 투쟁! 투쟁!”


투쟁가를 들이밀며 큰 소리로 따라 부를 것을 강요했다. 불쾌한 기분에 인상을 쓰니 “저기 뒤쪽 여학생들 크게 불러라!” 어김없이 면박을 주었다.


속리산까지 가는 버스에서의 세 시간이 지옥 같았다. 옆자리 여학생도 기분이 나쁘기는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첫 만남이었지만, 선배들이 불편함은 충분히 공유했다. 졸업식까지 불참해가며 참석한 오리엔테이션인데 생각지 못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무척 당황했다.


도착 후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접한 광경은 더 가관이었다. 신입생이 모두 남자인 항공운항과 학생들은 벌써 손목에 빨간 손수건을 두르고 팔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열을 맞춰 이동하고 있었다. ‘이건 무슨, 북한 열병식인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다른 두 곳의 대학에서 예비 합격한 상태였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숙소 한 쪽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계속되는 선배들의 딱딱한 지시에 어쩔 수 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옆자리 친구와 나는 깊은 얘기를 나누지는 않아도 떨어지면 큰일 날 것처럼 붙어서 다녔다.


그런데, 나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갑자기 한 선배가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학생이 있는지 큰 소리로 물었다.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었다. 우리 둘은 번쩍 손을 들었다. 내일 있을 졸업식을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떴다. 지정된 장소에 가니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이 자리를 뜨겠다는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학교 측에서는 우리를 근처의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데려다주었다. 짧은 시간 동지애를 나누었던 친구는 서울로, 나는 인천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집으로 돌아오겠다는 선택을 하기까지 미래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합격이 취소되는 것도 아니고, 나머지 두 학교에서도 예비 번호를 받아 놓았기 때문에 조금은 기다려보자는 마음이었다. 확실한 것은 내가 강압적인 분위기를 몸서리치게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늦은 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께서 교대에서 합격 연락이 왔다며 반겨주셨다. 공대는 맞지 않으니 이제 남은 선택은 교대뿐이었다. 졸업식 후 새로운 마음으로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다. 아담하고 조용한 교정에 몇 대 되지 않는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들이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반겨주었다. 비슷한 분위기의 학생들 틈에 끼어 자리를 잡았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한 선배가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분명 공대 오리엔테이션에서도 들었던 묵직한 투쟁가인데 밝고 통통 튀는 대중가요처럼 들렸다. 음악에 맞춘 가벼운 몸동작으로 신입생을 이끌어가는 선배의 모습에 긴장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지난번 오리엔테이션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에 이곳이 나에게 안성맞춤인 장소임을 드디어 깨달았다.


대학을 선택하기까지 나에 대한 이해와 진로에 대한 고민이 전무했던 것 같다. 시도 때도 없이 바뀌던 어린 시절의 꿈은 눈에 보이는 외형적 요소에서 발견한 것들이 많았다. 예쁘니까 미스코리아, 운동을 잘하니까 군인, 말을 조리 있게 하니 아나운서. 하지만, 정작 나는 어떤 사람이며,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다. 두 번의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편안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를 짓누르는 분위기에서 불합리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싸우는 성격이 아니었다. 애초에 갈등을 만들지 않는다.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의 칭찬과 조언이 나에게는 더 효과 있다.


나는 가진 것을 나누기 좋아하는 사람이다. 눈썰미가 있어 몸으로 하는 것들은 빨리 익히는 편이다. 먼저 목표에 도달하면 주변의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민다. 그런 성격 때문이었는지, 초등학교 때부터 선생님들께서는 내 옆자리에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을 많이 앉히셨다.


이제서야 잊고 있던 나의 성향이 보였다. 재주 많은 것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르쳐야 할 아이들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것저것 배워온 것들을 잘 활용해서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나에게 알맞은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내 입으로 초등학교 선생님에 대한 꿈을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부모님께서는 어떻게 간파하시고 나를 교육대학으로 이끈 것일까? 아마도 나의 성향을 가장 잘 파악하고 계셨을 테니 당연한 이끌림이었을 것이다.


돌고 돌아서야 교대라는 곳에 안착하고 선생님이 되어 보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어려서부터 나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고 진로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엉뚱한 공대 오리엔테이션의 경험이 있었기에 진로 선택에 방점을 찍을 수 있었다.



© kel_foto,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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