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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송 Jan 19. 2024

선을 지키는 여자

4. 하늘에서 기도하는 나

온몸이 돌덩이처럼 경직됐다. 이마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난 땀이 흥건한 두 손을 비벼대며 간절히,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기도 중이다.

하느님, 부처님, 성모마리아님... 또 누가있지? 단군? 아님 산타에게 이 소원을 빌면 이루어질까?

난 머릿속에 떠오르는 신들을 박박 긁어모아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기도 중이다. 혹시 수능을 새로 치냐고? 아님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있냐고? 애석하게도 모두 아니다. 난 지금 내가 탄 비행기가 제발 공중에 뜨지 않고 이대로 활주로를 따라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서울까지 가 달라는 하찮고도 빈약한 염원을 담아 중얼거리는 중이다.


난 비행기를 탈 때마다 이런 한심한 기도를 한다. 왜냐하면 난 육교조차 잘 건너지 못하는 극심한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비행기를 안 타면 되지 왜 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KTX가 없던 라떼 시절, 가장 빠른 새마을호 기차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왕복 9시간이 걸렸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업체 미팅을 끝내고 당일 부산으로 돌아오려면 매 맞는 심정으로 벌벌 떨며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젠장, KTX 넌 왜 이제야 나타난 거냐.

보통 사람이라면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자기 좌석 번호를 찾지만 난 아니다. 난 내가 원하는 것을 찾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사람. 즉, 대상 물색을 시작한다.


내 타깃에는 나름대로의 조건이 있다.

첫째, 혼자 타야 한다. 아무래도 동승자가 있다면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거나, 동승자가 날 때릴 수도 있다.

둘째, 인상이 온화하고 순한 맛이 느껴져야 한다. 내가 말을 걸면 잘 받아 줄 거 같이 순한 맛을 가진 인상이면 일단 리스트에 올린다.

셋째, 남자는 가산점이 부여된다. 여기서 군필이냐 아니냐는 상관이 없다. 일단 남자가 더 튼튼한 건 사실이기 때문에 가산점을 준다.

이렇게 세 가지 조건에 충족되면 그날의 픽이 선정된다. 난 이렇게 비행기를 탈 때마다 원픽을 고른 뒤 혹시나 몰라 2순위까지 골라둔다.


그토록 기도했건만 그날도 어김없이 비행기는 활주로를 미친 듯이 내달려 바닥에서 몸체를 띄우고 말았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나자. 내 정신 줄도 날 떠난다. 난 반쯤 혼미한 상태로 점점 돌이 되어 가고, 안전벨트 불이 꺼지면서 안정 고도에 올랐다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안정 고도라니? 난 지금 이렇게 불안정한데!! 난 여전히 안전벨트를 풀지 않은 채 벨트를 부여잡고 처녀 귀신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너무나 고요한 비행기 안에서 내 심장은 혼자 죽어라 나대고 있고 갑자기 비행기가 파도 타듯 울렁거리더니 안전벨트 불이 들어오며 자리에 앉아 벨트를 착용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이때, 난 이러다 진짜 처녀 귀신이 될 것 같다는 생존 본능이 뽐어져 나오며 안전벨트를 과감히 풀어헤치고 좀 전에 물색해 둔 원픽에게 순간이동처럼 잽싸게 다가갔다.


나의 앞뒤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동승자가 있어 자칫 연행될 수도 있는 위험이 있다. 

타깃의 첫 번째 조건에 부적합!

앞줄 건너편 좌석에 완전 순한 맛으로 보이는 오늘의 원픽에게 ‘나는 요동치는 촛불이니 꺼지지 않게 도와주세요...’라는 애절한 눈빛으로 말을 걸었다.

“제가 몸이 안 좋아서 그런데 혹시 제 옆에 앉아 주실 수 있나요?”

지금 생각하면 이불킥을 해도 모자란다. 어떻게 이런 부탁을 했었을까.

고상함을 지키려 두려움에 덜덜 떠는 소크라테스보다 생존을 위해 체면 따위 내팽개쳐 버리는 돼지가 되는 게 이 상황의 나에겐 더 낫다고나 할까.


원픽은 처음에 ‘이 여자 뭐임?’이란 표정으로 날 바라봤지만, 밀가루같이 창백한 내 얼굴을 보더니 내 옆 좌석에 앉아 주었다.


내가 비행기를 탈 때 이런 무리수까지 두며 옆에 믿음직한 누군가를 앉히려는 이유가 있다. 일전에 비행기를 타면서 지인을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다. 그때 그 지인이 자리를 바꿔 내 옆에 앉게 됐는데 그날 고소공포증이 덜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학습 효과로 인해 그날 이후로 난 비행기를 타면 대상을 물색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다시 돌아가, 비행기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거 같은 불안감이 물밀듯이 밀려오며 내 심장은 옆에 있는 원픽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난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처럼 무언가 잡을 것을 찾기 시작하며 원픽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손만 좀 잡아주시면 안될까요?”

아... 지금 생각하면 진짜 이불킥을 수십 번 해도 부족하다. 이건 뭐 ‘손만 잡고 잘게.’도 아니고... 댄스 교습소에서 ‘손 한번 잡아 주이소.’도 아니고... 오만 추태란 추태는 다 부린 그때의 나.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난 지금 소크라테스보다 돼지를 택할 수밖에 없다.


결혼식에서 아빠가 내 손을 살짝 얹어 신랑에게 데리고 갈 때처럼 난 원픽의 손 위에 내 손을 살짝 포개어 놓은 채로 눈을 감고 있다. 내 옆에 누군가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놓여 서로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원픽은 나에게 수차례 부산으로 돌아갈 땐 기차를 타고 가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공포의 시간을 거쳐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순간, 난 다시 소크라테스로 돌아와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다.


내 손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 원픽의 손도 땀이 묻었고(얼마나 찝찝했을까?) 원픽은 친절하게도 손수건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난 손에 흐르는 땀을 후다닥 닦고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감사의 인사를 하고 줄행랑을 쳤다.


결혼을 한 후, 남편이 베트남 주재원 생활을 하게 되면서 하노이행 비행기를 탔을 때도 다를 게 없었다. 혹시나 비즈니스 좌석에 앉으면 내 고소공포증이 덜하지 않을까 싶어 정말 큰마음을 먹고 비즈니스석을 결제했지만 좌석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 비싼 좌석에서 난 4시간 동안 물 한 잔조차 마시지 못했고, 기내식은 넘어가지도 않을 거 같아 받지도 않았다.


그래서 항상 대상을 물색하게 된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 감사 인사도 전하고 싶지만 명함을 교환하거나 통성명을 하거나 전화번호를 받는 일은 하지 않는다. 왜냐면 나는 선을 지키는 여자니까.


인생은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듯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다. 나는 그분들의 도움으로 두려웠던 오늘의 페이지를 평범하게 어제로 넘길 수 있었고, 그분들에게는 평범할 수 있었던 오늘이 특별한 어제로 남아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지금까지 내 손을 잡아주었던 원픽님들께 깊은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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