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주화입마
스르르르.... 눈이 자꾸 감긴다.
내 눈꺼풀은 이미 내 조절력에서 벗어났다.
북대구에서 미팅을 마치고 부산을 내려가는 길인데 운전대를 잡자마자 눈꺼풀이 자꾸 눈을 가린다. 휴게소까지는 30분 이상 가야 하는데 1분이 멀다 하고 내 눈이 감긴다. 이따금씩 보이는 졸음쉼터마다 들러 눈을 붙여 보지만 소용이 없다. 겨우 청도휴게소에 도착한 나는 두나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지금 눈이 자꾸만 감겨서 운전할 수가 없는데 커피를 마실까?”
“언니... 언니는 지금 잠이 오는 게 아니야... 배가 고픈 거야. 커피는 무슨, 빨리 라면이나 한 그릇 때려!“
라면을 먹으라고? 내가 잠 오는 게 아니라 배가 고픈 거라고?? 아니, 내가 지금 눈이 감길 정도로 배가 고픈 거라고?? 두나의 라면 먹으라는 말은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내 팔랑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라면을 주문하고 있었다. 뭐지? 왜 라면 냄새를 맡자마자 왜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지? 난 라면 한 그릇을 5분 컷으로 순삭해 버렸다. 정말... 정말 말도 안 되게도 라면 한 그릇을 비우자, 그렇게 감기던 내 눈은 마치 심봉사가 눈을 뜬 것처럼 번쩍 뜨이는 것이 아닌가!
정말 두나 말대로 난 졸린 게 아니라 배가 고픈 것이었다. 사실 난 그때 두 달 동안 운동과 식단 관리로 10kg을 감량한 상태였다. 그만큼 난 내 목표가 생기면 독하게 달성하고 내가 정한 선이 있으면 확실하게 지키는 선을 지키는 여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에는 더욱 철저하다. 기한을 지키지 못한다는 거, 오타가 생긴다는 거, 이런 작은 실수조차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날은 포항 현장에 마지막 설치 작업이 있는 날이었다. 작업 상황을 미리 확인하기 위해 난 서둘러 먼저 출발했다. 한참을 가고 있는데 현장에 설치할 물건을 찾으러 간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장님! 방금 물건 받았는데요. 음... 문제가 있어요. 오타가 나왔는데 3000이 2000으로 출력됐습니다. 수정해서 다시 출력하면 오늘 안에 현장 설치는 되지 않을 거 같아요”
오타라니! 중간 미팅도 아니고 최종 결과물에 오타라니?? 내가? 이 선을 지키는 여자가?? 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난 이런 작은 실수조차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 만약 실수가 생긴다면 난 급성으로 긴장을 하기 시작한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난 내 실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심장까지 뛰기 시작했다. 휴게소에서 진정이라도 해야 할 거 같아 커피를 주문하는데.
‘2,000원’ 라면도 ‘2,000원’ 핫바도 ‘2,000원’
아!! 왜 다 2000인거야!! 난 휴게소에서조차 마음 편히 쉬지 못하고 2000이라는 오타만 계속 눈에 아른거렸다.
긴장감으로 굳어가는 내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현장에 도착했다. 도망가 버리고 싶었지만, 직원의 실수를 책임지는 것도 내 몫인 것을….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처녀 귀신같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난 담당자에게 아직 제출하지도 않은 결과물에 오타가 있다는 실수에 대해 솔직히 말씀드렸다.
그런데 내가 너무 새가슴인가? 여자가 소심했던 걸까 초보 사장이라 대응이 미흡했던 걸까 아니면 내 성격이 문제인 건가?
온 세상이 2000으로만 보일 정도로 난 심장이 뛰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사장님 오늘 마무리가 되면 좋았겠지만 괜찮습니다. 우편으로 숫자 ‘2’만 스티커로 보내주시면 현장에서 붙이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하더니 담당자는 웃으며 감사 인사까지 덧붙이는 게 아닌가?
나도 연거푸 감사 인사를 전하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갑자기 내 몸은 마치 무협지에 나오는 치명상인 ‘주화입마’를 입은 것처럼 몸 전체가 굳어가기 시작했다. 정말 마치 마취 주사를 온 몸에 놓은 것처럼 몸이 굳어가자 나는 너무 놀라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난 뭔가 심각한 증상이 아닌가 걱정했지만 의사 선생님께서는 그냥 수액 한 대 맞고 마음 편히 쉬다가라고 했다.
현장 담당자에게서 괜찮다는 말도 들었고 일도 끝나고 돌아가는 길인데 난 아직도 긴장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병원 응급실에 서도 2000이라는 숫자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일에 있어서 완벽주의자인 나는 작은 실수 하나에도 이토록 민감한 사람인데 지금 생각하면 혼돈이 온다.
하이패스가 생긴 초장기에 고속도로에서 들뜬 마음으로 단말기를 구입하고, 하이패스 카드는 따로 구입해서 차에 두면 된다는 말에 나는 세련되게 카드까지 구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통행료 미납으로 고지서가 계속 집으로 날아왔다.
나는 분명 하이패스 기계와 카드를 샀음에도 통행료 미납 고지서가 날아오는 게 놀라 두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하이패스 단말기에 불은 들어와?”
“응.”
“그래? 이상하네. 아! 혹시 하이패스 카드는 샀어? 그거 단말기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카드도 있어야 해!”
“야... 누굴 바보로 아나... 나야 나. 네 언니. 당연히 카드도 뽑았지!”
“그래? 그럼 진짜 이상한데... 내가 지금 갈게.”
두나는 자신이 직접 보겠다고 날 찾아왔다.
“언니, 카드 있다며? 단말기에 카드 없는데?”
“무슨 소리야... 저기 봐. 카드 있잖아.”
“어디?”
“저기 보조석 앞 선반에 올려놨잖아!”
두나는 내가 보조석 앞 선반을 가리키자, 카드를 보고 경악했다.
“언니!!! 미쳤어?? 카드를 단말기에 꽂아야지 여기 왜 올려놔??”
“응? 카드 그냥 올려두면 결제되는 거 아냐?”
“뭔 소리야... 하하하하! 언니 진짜 바보 같다. 세상에 카드를 올려두면 결제되는 게 어딨냐?? 이 맹꽁아!”
난 하이패스 카드를 차에 올려두기만 결제가 되는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허당도 이런 허당이 없다.
나는 완벽주의자인가? 세상 둘도 없는 허당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완벽 옆에 허당이 있어 둘 다 빛나는 거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