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사는 둘째 언니가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아마 엄마 집에 들른 모양이다. 먼 곳에 살다 보니 자주 못 보는 손녀 얼굴을 보려고 엄마가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셨을 거다. 엄마는 화면에 비친 손녀의 얼굴을 반기며 '많이 컸네, 예뻐졌네'를 연신 반복하시며 행복해하셨다. 하지만 화면 속 엄마의 모습에 마음이 씁쓸해졌다. 카메라에 비친 엄마의 얼굴이 예전보다 한층 더 늙어 보였다. 그 사실이 싫었다. 나이 든 엄마의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전화가 걸려온 시간, 아이는 30분 동안 허락받은 게임에 푹 빠져 있었다. 아이에게 게임을 잠시 멈추고 할머니와 통화를 먼저 하자고 했지만 아이의 눈은 계속해서 패드를 향해 있다. 할머니가 무슨 말을 물어도 “네?, 네?” 되묻기만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통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는 손녀를 눈치채고 선 “어서 놀아”하며 엄마도 빨리 전화를 끊으셨다. 할머니에게 얼굴 한 번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 딸의 모습에 폭발하고 말았다.
“너는 할머니보다 게임이 그렇게 중요해?” 할머니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딸에게, 내 엄마를 건성으로 대하는 딸에게 서운해서 큰 목소리 터져 나왔다. “게임은 언제 어디서건 니 패드만 열면 아무 때나 할 수 있어. 그런데 할머니는 안 그래. 할머니는 언젠가는 보고 싶어도, 목소리가 듣고 싶어도 못 만나는 날이 온단 말이야. 엄마가 지금 엄마할머니가 아무리 그리워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화가 났다. 하지만 아이를 향한 화는 나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통화하는 동안 성의 없이 엄마를 대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딸들과 전화로 통화하시는 것을 삶의 낙으로 생각하시는 엄마였다. 하루가 멀다 하게 걸려 오던 엄마의 전화가 언젠가부터 뜸해졌다. 대신 아이에게 가끔 전화를 거시는 것 같았다. 먼저 전화를 걸진 못할지언정 걸려온 엄마의 전화에도 바쁘니 다음에 통화하자며 전화기를 내려놓는 살갑지 않은 딸이 바로 나였다.
며칠 전, 유명 원로 여배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최근까지 TV에 나오던 터라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여배우의 나이는 75세라고 했다. 우리 엄마와 비슷한 나이였다. 갑자기 죽음이 겁이 났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되신 외할아버지는 양아들이었던 외삼촌댁에서 모시게 되었었다. 아버지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거 같아 엄마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으셨단다. 딸 집에 방문한 외할아버지에게 저녁이 되자 “아부지, 더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가세요”라고 하니 “아야, 한번 가면 다시는 못 온단다.”라고 외할아버지는 대답하셨단다. 엄마는 남동생집으로 가시라는 말뿐이 아니었던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외할아버지의 대답이 마음을 찔러 그날밤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외할아버지는 주무시다가 심장마비로 다시 못 오시는 곳으로 가셨다. 엄마는 지금도 가끔 그날의 이야기를 하신다.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해서 너무 후회스럽다고.
마흔을 훌쩍 넘어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엄마가 없는 세상이 어떨지 상상이 안된다. 명절이면 매번 자신이 묻힐 곳이라며 납골당에 우리를 데려가시는 엄마. 한걸음 한걸음 준비하시는 엄마와 달리 나는 아무 준비도 못하고 있다. 엄마의 전화를 귀찮아하는 나는, 하지 말아야 할 입바른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 나는,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내어 드리지 못한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로 후회를 하게 될까? 넘치게 받은 사랑이 사무쳐 그리움으로 가득할 밤들을 어떻게 견뎌낼까?
준비가 필요한 건 엄마가 아닌, 나였다. 어린 시절, 어버이날이면 편지에 꼭 적곤 했던 ‘커서 꼭 효도할께요’라는 약속을 이제는 지켜야 할 때다. 내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더 늦기 전에, 알려드려야 한다. 아이를 키워보니 알겠다.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따뜻하게 “엄마”하고 불러주는 그 한마디뿐이라는 것을.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곁에 계셔 주시는 엄마가 감사하다. 이제는 내가 더 자주 엄마에게 다정한 안부를 건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