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죽지 않아서 느끼는 것들
1. 번개탄
2019년 5월. 침대 밑에 번개탄이 있었다. 나는 죽고 싶다기보다는 죽어야 했다. 하루 온종일 머릿속에 팝업창처럼 '나는 죽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걸 어떻게 끌 수 있는지 몰랐다. 번개탄을 사고 나서야 나는 조금 떳떳한 사람이 되었다.
죽기를 결심했으나 어쩐지 살아 숨 쉬는 날들이 이어졌다. 4학년 1학기였다. 모든 걸 내팽개치지도 못한 채 수업에 가고 국가근로도 했다. 내가 죽어야 한다는 믿음의 기원도 근거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무력하게 복종했다. 횡단보도 초록불을 기다릴 때면 차에 치이지 않겠다고, 살겠다고 멈춰 서서 기다리는 그 순간이 끔찍하게 길었다. 살아서 하는 모든 행동들이 수치스러웠다.
벌레를 싫어한다. 그런데 내가 그 벌레 같았다. 충분한 공격을 당했는데도 죽음의 순간을 무의미하게 유보하듯 발버둥을 치는 벌레 같았다. '꾸역꾸역' 살아있는 나를 경멸했다.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느냐고, 왜 내가 죽어 마땅한 사람이냐고, 나를 위해 소리치는 목소리는 내 안에 없었다.
심리상담을 그만뒀다. 기억나지 않는 핑계를 대면서. 상담을 받는 동안은 죽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상담사선생님이 내 죽음에 목놓아 우시진 않겠지만, 결코 반가운 소식은 아닐 테니까. 그분을 배려하는 마음보다는 이런 이유가 내 죽음을 방해하는 것이 싫었다.
2. 샴푸
갈수록 수업을 나가지 않았고 근로만 겨우 나갔던 것 같다. 혹시 내가 안 죽고 살게 되면 무단결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근로는 빠지지 못했다. 나는 번개탄을 사놓고도 내가 죽지 않을 경우까지 신경 쓰던 머리 복잡한 사람이었다.
밖에 나가는 날이 아니면 씻지 않았기에 주말이 되면 꾀죄죄한 몰골이 됐다. 어느 날에는 좀 더 결단이 섰다.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비록 오늘은 아닐지라도 죽음이 코앞에 온 것 같아 떳떳해졌다. 그러다 이런 생각을 했다. 이 꼴로 죽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이왕이면 좀 깨끗한 모습으로 죽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
샤워를 하려고 보니 샴푸가 없었다. 나는 샴푸가 떨어지기 전에 항상 새 샴푸를 미리 사뒀다. 그러나 죽을 결심이 견고해지자 새 샴푸를 구비해 둘 필요성이 사라졌다.
샴푸를 사러 밖에 나갔다. 그 와중에도 할인 제품을 샀다. 죽을 마당에 돈 아껴 무엇하냐는 내 안의 비웃음은 덤이었다.
머리를 감는데 샴푸에서 향이 났다. 그 샴푸의 이름도, 용기 디자인도, 향의 종류도 그 무엇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향이 났다. 죽은 영혼에 걸맞지 않게 감각기관이 제 할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게 우스웠다. 그런 동시에 내가 더 살아있으면 어떤 향이든 더 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샴푸향이 나를 다음날 다시 병원에 가게 했다. 진료실에서 고해성사를 했다. 전부터 이어지던 입원 권유를 마침내 받아들였다. 질병휴학 처리를 하고 입원했다.
3. 영양제
나는 그렇게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게 거짓이라면 더 그럴듯한 얘기를 지어냈을 거다. 그러나 정말로 동아줄은커녕 지푸라기만도 못한 것 같은 그 사소한 향기를 붙든 덕에 나는 지금 살아있다.
그러나 샴푸가 아니었더래도 나는 무엇이라도 붙들었을 것이다. 늘 눕던 침대의 아늑함이든 서늘한 새벽 공기든 그 뭐든 간에. 살고 싶은 내 마음이 나를 구했다.
그러고 나서도 또 몇 번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갔다. 별일이 없을 때도 이따금 우울의 늪에 빠졌고 얼마 전에는 정말로 별일이 생기기도 했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내 얘기를 듣곤 날 위해 기도해야겠다고 하셨다. 스트레스성 구토에 시달리며 욕실 의자에 앉아 새벽 내 속을 게워냈다. 그때 죽었으면 이런 일은 겪지 않을 텐데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내 의지로 영양제를 챙겨 먹는 날이 오기도 했다. 아파 죽을 지경도 아닌데 그냥 더 건강해지려고 약을 챙겨 먹는 일은 내 사전에 없었다. 그러나 살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기왕 살아있을 거 더 건강하고 싶었고 더 행복하고 싶었다.
영양제를 먹는 내 모습이 좋았다. 어느 해 내 신년목표는 '자살 안 하기'였다. 그런데 이제는 더 나아가 '잘' 살고 싶은 마음까지 생겨났다는 게 뭉클하고 반가웠다.
번개탄과 샴푸와 영양제. 내 삶의 소재가 더 무엇이 될지 아직 나는 모른다. 다만 나는 살고 싶은 내 마음에 솔직하기로 했다. 그리고 떳떳하기로 했다. 내 삶이 어떻게 이어질지 두렵고 걱정되는 마음보다는, 어떻게든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지금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