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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마 Dec 17. 2023

렌즈를 낀 채로 잠에 든다는 것

내 선택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용기

첫 취업이 존나 망했다. 내 상황이 곱지 않은데 구태여 고운 말로 정제하고 포장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꼴랑 2주도 안 다니고 망했니 어쩌니 하기에 너무 섣부른 거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정말 섣부른 거였음 좋겠다) 난 이걸 몇 가지 근거를 통해 알 수 있다.


첫째. 수요일에 정신과에 간다. 취업 후 의사선생님을 처음 만나는 날이다. 당연히 일은 좀 어떤지 물어보실 것이다. 근데 뭐라 말해야 될지 깝깝하다.


"선생님. 잘 시간도 쉴 시간도 없어요. 몇 시간 일찍 출근해서 몇 시간 늦게 퇴근해도 할 일이 산더미예요. 여기 사람들은 그게 당연한가 봐요. 토요일까지 일했는데 그렇다고 일요일에 쉬는 것도 아녜요. 일요일에도 사실상 일하는 거나 다름없는데 장소가 집일 뿐이에요. 밥 먹을 시간도 빠듯해요. 선생님. 근데 제일 슬픈 게 뭔지 아세요? 제가 평일에 밤을 새워 일하지 않았다고 자책하는 거요. 일요일에 하루 쉬는데 저녁까지 놀았다고 자책하는 거요. 제가 선택을 잘못한 것 같아요. 이 생활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라고 하면 선생님이 대체 나한테 뭐라 하실 것인가. 우선 팔짱을 끼시겠지. 선생님은 내 상태나 상황이 심각하면 팔짱을 끼신다.


아니면 차라리 이렇게 말할까?


"선생님. 너무 바쁘고 힘든데 그런 와중에 활력은 좀 생기는 것 같아요. 배우고 얻어갈 게 많아요. 열심히 하고 있는데 더 열심히 하고 싶어요. 존경할 만한 상사를 만났어요. 그리고 저 생각보다 이 일에 적합한 거 같아요."


아니다. 그냥 이렇게 말하는 게 낫겠다.


"선생님. 약 좀 올려주세요. 그리고 죄송한데 상사 욕 좀 해도 돼요?"


둘째. 친구들한테 한탄을 할 수가 없다. 말할수록 그만두라 할 것이고 웃기게도 나는 당장 그만둘 마음이 없다.


셋째. 상담사에게 털어놓을 수 없다. 말할수록 그만두라 할 것이고 웃기게도 나는 당장 그만둘 마음이 없다.


왜 그만 두기가 싫은가 하면. 그래 아마 내 자존심 때문인 것 같다. 다들 '의외'라고 말하던 내 선택이 틀렸음을 내가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받아들이기가 무서운 것이다. 남들 가는 길만 가려고 하다가 드디어 용기 내서 내 선택을 했는데, '차라리 남들 가는 길로 갈 걸' 하는 후회가 드는 것이 몹시도 당황스럽고 서러운 것이다.


하루는 콘택트렌즈를 끼고 잠들었다. 샤워는 물론이거니와 손을 씻고 렌즈를 빼서 세척하고 다시 보관통에 넣고 어쩌고 할 힘조차 없어서 그냥 잤다. 핸드폰 충전할 정신도 힘도 없어서 그냥 잤다. 다음날 눈이 빨개진 채로 출근했다.


내가 이 업계에서 끝장을 보겠다고 하면 당연히 이 생활을 감수해야겠지만 나는 그런 각오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게 내 실수고 잘못이다. 나는 지금 당장은 할 수 없는 어떤 일을 하고 싶었고 그전까지 여기서 일하려고 했다. 기왕지사 당장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 이쪽 일이 더 낫겠거니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쪽에 발을 들이니 몹시 비상식적인 어떤 문화에 아주 빠르게 적응하고 나 자신을 말 그대로 갈아 넣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새 상당히 적응해 버렸는지 수요일에 정신과 가느라 일을 좀 덜하게 될 걸 상상하며 엄청 짜릿한 일탈쯤으로 기대하고 있다(병원 가느라 빠지는 시간도 원래는 근무시간이 아니다).


만약 내가 대학 들어간 이후로도 짱짱한 멘탈로 정신 바짝 차려서 보편 궤도에 당당히 올라 이 나이가 되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나는 내가 놓친 기회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니까. 근데 과거는 바꿀 수 없고 나한테 지금 이게 꿈이 아니고 현실이다.


쉴 틈이 없고, 돈도 많이 못 벌고, 그렇다고 딱히 인정을 받는 일도 아니다. 크게 보람도 없다고 적으려다가 그건 뺐다. 피로와 스트레스가 눈 녹듯 사라지는 어떤 순간들이 있기는 하다. 지금 생각하면서도 웃음 짓게 되는 어떤 순간들이 정말로 있었다. 이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며칠 안 됐지만 벌써 제법 많이 만났고 생각보다 깊이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 만남과 대화가 이 일의 주변부에 위치한다는 점이 좀 슬프긴 하지만.


얼마 전에 상담사선생님한테 편지를 썼다. 내게 필요한 건 경험 그 자체고, 차라리 성공보다 실패를 많이 해봐야 할 것 같다고 썼다. 이 선택이, 이 경험이 실패가 될 수도 있을 거다. 시간 낭비로, 뼈저린 후회로 남을 수도 있을 거다. 근데 확실한 건 아침이 밝으면 그냥 얌전히 출근할 것 같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p.s. 소제목을 지으며 예상한 거랑은 다르게 글이 마무리됐는데 그냥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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