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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마 Feb 15. 2024

ADHD 약을 먹어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

여전히 환자임을 깨닫는 순간들

입사 두 달째. 애잔한 신입으로 소문이 났다. 내가 열심히 하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휴무일에 나와서 일하는 거 그만하라고 말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나를 챙길 줄 모르는 것 같다는 소리도 들었다. 이건 열심히 하는 걸 넘어서 갈아 넣고 있는 수준이라고, 스스로 억울해지지 말라는 뼈아픈 조언도 들었다. 


ADHD 약의 효과를 체감하고 나서, 세상이 만만해 보였다. 이제 다 잘될 것 같았다. 그런 느낌마저 낙관이 아니라 합리적 추론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나는 벌써 이 안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 되었다. 짠한 만큼 우스운 사람이 되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하다.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한다. 할 일이 많고 시간이 없을 때는 중요도와 긴급도를 고려해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에 따라 일처리를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 여기까지 타이핑을 하다 멈추고 한참을 생각했다. 이게 왜 안 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충동 조절이 안 되어서 그런가? 기억력이 나빠서 그런가? 충동 조절도 잘 안 되고 여전히 기억력도 나쁘다면, 지금은 약의 효과가 사라진 것일까?


그건 또 아니다. 정말로 아니다. 여기까지 쓰고 기가 막혀서 웃었다. 나는 설연휴 내내 잠만 잤다. 쉬는 동안 약을 먹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 약을 먹지 않았다. 지치고 귀찮기도 했다. 아무튼 약을 안 먹었더니 신생아처럼 잠만 잤다. 어쩌다 깨면 음식을 마구 밀어 넣었다. 나는 이런 하루가 놀랍지 않고 익숙하다. 한동안 떨쳐 보냈어도, 그런 순간들로 하루하루가 채워질 때의 서늘함을 여전히 기억한다. 몇 달 약 먹었다고 나란 사람 자체가 변한 줄로 단단히 착각했던 걸 반성하면서 일할 때 절대 약 빠뜨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무일인데 약을 못 챙겨 먹은 때가 있었다. 그날 나는 서서 졸았다. 서서 뭔가를 하는데 졸려서 휘청댔다. 당장 집에 돌아가서 약을 그제라도 챙겨 먹고 싶었지만 그럴 새가 없었다. 그 하루가 얼마나 못 미덥고 아슬아슬했던가를 떠올리니 어쩐지 서럽다.


ADHD 글을 적으면서도 갈수록 ADHD가 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ADHD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런 것도 이젠 별로 신경이 안 쓰인다. 난 그냥 '내' ADHD가 버겁다. 내가 느끼는 내 ADHD는 어쩌면 그냥 막연함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내 머릿속이 뿌연 것처럼 내 ADHD도 뿌옇다. ADHD의 가장 큰 특징을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가. 내가 오늘 도대체 왜 열심히 일해도 계속 일이 밀리고 뭣 하나 제대로 되지 않는지를 파헤치기 위해, 10분 단위로 쪼갠 시간기록지를 들고 다니며 분주히 기록하다가, 그걸 기록 중이란 사실조차 도중에 잊어버린 것이 ADHD의 특징일까. 아니면 그걸 조금이나마 기록함으로써 깨달은, 어떤 일을 하려다가 본래의 목적을 잊고 무의식적이면서 연쇄적으로 자꾸만 다른 행동들을 일삼는다는 것이 더 큰 특징일까.


머릿속이 다시 뿌얘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솔직히 힘들다. 기댈 데가 사라진 절망감이 불쾌하다. 


내일 병원에 간다. 해 바뀌고 나서 처음 가는 것 같다. 도중에 못 가서 가족에게 부탁해 대리처방을 받았다.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으시면 뭐라고 할까. 약을 더 올릴 순 없을 텐데. 


ADHD가 짜증 나고 버거운 이유는 아마 이거인 것 같다. 내가 어떤 점이 뒤떨어지는지, 왜 그 점이 부족하고,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걸 몰라서라기보다는... 그냥 남들은 왜 그걸 잘해내는지, 그냥 그게 이해가 안 간다. 왜 다른 사람들 책상은 가지런하고 깨끗할까? 근무시간 동안 네다섯 번 알람을 맞춰놓고 그때마다 계속 청소를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내 책상이 끊임없이 난장판이 되어갈 동안 그들의 책상은 무탈한 것인지, 그냥 그걸 모르겠다. 그런 걸 다 모르겠다. 


병원 가는 걸 꽤 좋아했는데 거의 처음으로 병원 가기가 싫어졌다. 약을 안 먹을 순 없으니 그냥 약이나 받아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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