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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마 Mar 04. 2024

성인 ADHD와 콘서타 63mg

콘서타를 증량했다

콘서타 54mg에서 더 증량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여성은 54mg을 최대용량으로 복용한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기 때문에 나 또한 이 용량에서 계속 유지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2월 29일 목요일에 내원하고 나서는 증량된 63mg을 복용하게 됐다. 의사가 증량을 결심하게 만든 내 최근 에피소드들은 다음과 같다.


1. 퇴근할 때 가방 싸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선생님은 내가 방전이 되어서 그럴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마 이 부분도 고려해서 증량하신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이 점에서 직장 내 다른 사람들과 크게 두드러진다. 정말 말 그대로 가방을 싸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뭘 챙겨야 하는지, 어질러진 책상을 어디부터 정리해야 하는지, 챙겨야 할 물건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가운데 무엇부터 가방에 집어넣어야 하는지, 그 모든 것들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게 내겐 어렵다. 같이 퇴근하려고 기다리는 친한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오늘은 빨리 챙겼네."라고 말할 때 너스레를 떨며 웃지만 사실 내 마음은 심란했다. 어쩔 땐 이미 시간이 꽤 지체된 와중에 여전히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서, 그냥 먼저들 가라고 한 적도 있다.


2. 책상이 지나치게 어수선하다.

1번이랑 연관이 있다. 내 책상은 더럽다. 큰맘 먹고 결심해서 아주 가끔 공들여 치웠을 때나 잠깐 깨끗하고, 그 외 모든 시간에는 눈에 띄게 더럽다. 그리고 그걸 직장 내 모든 사람들이 안다. 이미 지적도 들었다. 저번 글에서도 적었지만, 난 정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책상을 내내 깨끗하게 유지하는지 오히려 그게 신기하다. 눈 한번 감았다 뜨면, 정신을 차려보면, 다시 내 책상은 난장판이 되어 있는데, 남들의 책상은 얄밉도록 정돈되어 있다. 그냥 미관상 보기 안 좋은 것에만 그치면 다행일 텐데, 책상이든 책꽂이든 수납공간이든 다 정리가 안 되어 있어서 내 자료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3. 멀티가 심각하게 안된다.

최근 가장 소름 돋았던 순간들은 다 이와 관련돼 있다. 내가 멀티를 심각하게 못한다는 사실과, 그걸 모두가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어떤 동료가 내게 '경주마'같다고 했다. 심지어 그는 업무를 직접 공유하는 사이도 아닌데 그냥 한눈에 봐도 내가 그래보인다고 했다. 또 다른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뭔가를 하고 있을 때 나를 부르면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내게는 이런 기억이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한 번에 한 가지만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멀티플레이에 능숙한 사람들만이 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만 살아남을 수 있다(당연히 그런 일인 줄 모르고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 보건대 내가 멀티를 못하는 이유는... 한 번에 한 가지에만 지나치게 집중해서 동시처리해야 하는 여러 할 일들에 집중력을 분산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콘서타 용량이 늘어난 게 다행이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희비가 교차한다는 말이 정말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싶다. 증량 후 4일 차인데 그중 하루는 까먹고 못 먹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가 도저히 기억이 안 나서 먹었겠거니 하고 안 먹었는데, 알고 보니 안 먹은 거였다. 그리고 그 약을 안 먹었단 사실을 명백히 깨닫게 된 계기는, 직장에서의 내 책상 꼬라지였다. 


증량 후 첫날, 그러니까 63mg을 처음 복용한 첫날에, 처음으로 책상이 온종일 가지런해졌다. 정리가 우스울 정도로 쉬워졌다. 가장 적합한 표현을 찾자면, '저절로' 정리가 됐다. 보통의 내 책상은 퇴근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책으로 탑이 쌓인다. 심지어 그 탑이 두 개 이상이다. 그런데 63mg을 복용했더니 책탑이 쌓이질 않았다. 증량 후 이틀이 지나자 다른 사람들도 그 변화를 눈치채고 한 마디씩 했다. 내 책상이 깨끗하다고, 심지어 하루종일 깨끗하다며 놀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괜히 더 으스댔지만, 내심 씁쓸했다.


그러다 증량 후 3일 차에 약을 까먹었다. 고용량이라 두 번 먹느니보다 차라리 안 먹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안 먹었더니, 거짓말처럼 다시 정리가 하나도 안 됐다. 다시 책탑이 두 개, 세 개씩 쌓였다. 내가 약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존 증상의 재현을 통해 깨닫게 된다는 게 슬펐다. 


증량 후 책상 정리가 잘 되니까 퇴근 후 짐 싸는 시간도 좀 줄어들었다. 그런데 업무 효율이나 멀티에 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 충동성도 아직 크게 개선되진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난 지금도 일이 밀려있는데 갑자기 브런치가 쓰고 싶어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원 주기가 2주로 짧아졌다. 상담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증량 후 일부 증상이라도 크게 개선되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심지어 조금의 심장 두근거림도 없고, 그 외에도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 


그런데 슬프다. 사람들이 나를 특이한 사람 취급하더라도, 내심 권위 있는 누군가가 이제는 나를 '정상인' 카테고리에 편입시켜주길 바랐는데... 아직도 갈길이 먼가 싶어서 어쩐지 힘이 빠진다. 정상과 비정상을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없단 사실은 나도 안다. 어쩌면 내가 슬프고 피곤한 이유는 내가 비정상이어서가 아니라, 정상이니 비정상이니 하는 것들을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는 지금의 내 처지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집에서 약 먹는 걸 까먹고 온 날 이후로, 그냥 약을 직장에 놔두고 먹기로 했다. 그럼 까먹어서 조금 늦게 먹게 되더라도 바로 먹을 순 있으니까. 그런데 그 약봉지를 사무실에 있는 쓰레기통에 못 버리고 그대로 내 가방에 넣고 집에 와서 버린다. 혹시 누가 '콘서타' 이름이 적힌 약봉지를 보고 내가 ADHD 환자인 걸 알까 봐. ADHD는 죄도 아니고 흠도 아니지만 그걸 누가 알아서 득이 될 일은 또 아닌 것 같다. 


고를 수만 있었다면야 절대 ADHD 환자로서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ADHD를 안고도 내가 앞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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